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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54화 (154/162)

154화

나는 크루엘로의 품에 파묻혀 한동안 숨을 죽였다.

울지는 않았다.

뭐라고 할까, 울 일도 아니었다.

예고되어 있었고, 그렇기에 나도 준비된 줄 알았던 끝이 닥쳐왔을 뿐이다.

그럼에도 내 심장은 그럴 줄 몰랐다는 듯이 덜컥거렸다.

그게 민망했고, 아무렇지 않은 척 굴다가 이제 와 동요하는 게 창피해서 입 밖으로 꺼내 놓을 생각은 없었다.

분명 그랬는데.

“성, 력이 안 나와, 크루엘로.”

사람의 체온이란 게 생각보다 위안이 되는 걸까?

아니면, 어설프게 팔을 벌려 준 사람이 크루엘로이기 때문에 입이 가벼워진 걸까.

밝은 색으로 여러 번 덧칠한 마음에 누더기같이 물감이 굳어 통 원래의 색을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울지도 않는데, 울고 싶지도 않은데 코끝이 시큰하고 목소리가 먹먹하게 나왔다.

“페불라께서 소멸하셨나 봐.”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꼭 절벽에서 떨어진 것 같았다.

단번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크루엘로는 말없이 나를 끌어안은 양팔에 힘을 주었고 나는 그 온기에 매달리듯 의존했다.

혀를 조이는 나사가 헐거워진 것처럼 생각이 죄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 그렇게 신실한 신도는 아니었단 말이야. 그런데.”

나는 정말, 별말을 다 했다.

개중엔 내가 오래전부터 해 온 생각도 있었고 내 속에 있는지도 몰랐던 생각도 있었다.

내 신앙은 다른 신도들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나를 마지막 신도로 만들고자 낳아 기른 부모님에게 반발심을 품었고 복수하고 싶은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모두가 죽었을 때 내게 남은 게 페불라뿐이어서, 다른 선택지 같은 건 없어서 나는 내 신을 저버리는 일도 하지 못했다.

원망하면서도 섬겼고 증오하면서도 사랑했다.

페불라는 내가 섬기는 신의 이름이었고, 나를 불행하게 만든 새장의 이름이면서 내가 살아온 평생의 이름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이름을 거스르기로 마음먹었고, 사정을 알게 된 이후엔 그녀가 사라지리란 사실을 받아들였다.

당시엔 온몸의 수분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울었지만, 그때뿐이었다.

이제는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에덴을 죽인 이후로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어서 마음이 준비된 줄 알았는데…….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크루엘로. 내 마음이 너무 이상해.”

세상 제일가는 천치가 된 것 같다.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감정이 내 것인데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얼마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비단 이번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나도 어딘가가 고장 났던 게 아닐까.

선배 신도들처럼, 부모님처럼, 그리고 나이젤리아와 에덴처럼.

“나 이상하지?”

불현듯 내뱉고는 내가 놀라 어깨를 퍼드덕거렸다.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크루엘로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아니.”

누가 듣더라도 거짓말일 텐데 그 담담한 울림이 진실하게 느껴졌다.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 라스티.”

“정, 작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땐 아무렇지 않았는데도?”

“네가 이상하다고 말하기엔 세상에 정말로 이상한 인간들이 너무 많거든.”

“뭐?”

“제 권력을 위해 자식을 팔아먹고, 금화 한 닢의 이득을 보려고 남의 목숨을 짓밟고, 제 교단을 부흥시키겠다고 전쟁을 일으키려 하고…… 어설픈 독점욕 때문에 사람을 해치려 하고.”

“그거…….”

“나보다 똑똑하고 이성적이고 성숙한 누군가가, 나한테 해 준 말이야.”

뭐라는 거야.

속이 꽉 막힌 상황에서도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크루엘로가 천연덕스럽게 내뱉은 말은, 내가 에이미일 적 그에게 해 줬던 말이었으니까.

상세한 부분이야 다르겠지만, 크루엘로가 이런 말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에겐 기억력을 비정상적으로 끌어 올려 줄 성력도 없는데.

그런 성의에 퍽 위로가 되었으나 그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이상한 게 아니라 특별하다고 생각해.”

“……내가 에이미일 때, 이런 말도 했었나?”

“아니, 이건 내 생각이야.”

크루엘로는 멋쩍은 듯 웃고는 조심스럽게 나를 품에서 밀어냈다.

시선이 마주친다.

붉은빛 눈동자.

어떤 때는 보석 같다고 생각했고, 어떤 때는 잔혹하다고 생각했던 그 눈이 지금은 꼭 태양처럼 빛난다.

크루엘로의 눈이 태양 같다니.

내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 웃어 버리려는 찰나에.

“너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야, 라스티. 그걸 의심하지 마.”

원인도 모른 채 발밑이 아득해졌다.

속이 울렁거리고 입 안이 말랐다.

왜 이러지.

무도회장에서 느꼈던 체기가 아직 남아 있나 싶었지만, 그것과는 다른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크루엘로의 옷자락을 붙들고, 애써 장난스럽게 물었다.

“너한테?”

“그래, 나한테.”

괜히 물었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통 알 수가 없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굉장히 이상한 얼굴의 여자가 보일 게 분명했다.

“그러면 우리 화해했다고 생각해도 되는 거지, 라스티?”

“화해?”

싸운 적도 없는데 무슨…….

뜬금없는 말에 의아해하던 중, 잊고 있던 일들이 파도처럼 몰려들었다.

그러니까, 나를 창피해 견딜 수 없게 만들었던 그 악몽이 모조리!

세상에!

내 신이 사라진 일이 충격적이긴 했나 보지, 어떻게 그걸 잊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새삼스럽게 크루엘로와의 거리감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이나 가깝다.

알아차린 즉시, 나는 고개를 뒤로 빼려고 했으나 그 순간 크루엘로가 내 얼굴을 붙들었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 있지는 않았다.

저도 모르게 움직인 건지, 크루엘로는 놀라며 손을 거두었으나 나는 못 박힌 듯이 그 자리에 멈추어 눈만 깜박였다.

그가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피하지 마, 라스티.”

“……미안해.”

나는 조그만 목소리로 사과했고 한 박자 늦게는, 그가 꺼냈던 말을 부정했다.

“화해라고 할 것도 없어, 내가 일방적으로 잘못했던 거잖아. 미안해, 크루엘로.”

“……그러면 물어봐도 돼?”

“어?”

“아까 왜 도망갔어?”

“도망간 건 아니야.”

나는 잽싸게 반박했다.

모처럼 시원하게 내뱉을 수 있는 진실인 터라, 입이 빨랐다.

“그땐 진짜로, 너를 피하려던 게 아니라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어. 집으로 돌아가 쉬려고 했을 뿐이야.”

“갑자기 울렁거렸다고?”

“변명하는 거 아니야. 와인을 너무 급하게 마셨는지 체기가 있었거든.”

“겨우 그런 정도로 라스티, 네가 체할 리 없잖아. 독이 들었던 거 아니야?”

“중독됐다면 알았을걸? 그렇게 증상이 가벼웠을 리도 없고.”

그러나 그 정도로 체할 리 없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

시오라로 살 때도, 와인을 좀 빨리 마셨다고 탈이 난 적은 없었다.

내가 체기를 느낀 건 에이미 로열샌드일 때, 그중에서도 몸이 한창 약해져 언제 숨이 넘어갈지 모르던 후반부뿐이었다.

그러면 그냥 기분 탓이었나?

아니면…….

크루엘로는 조금 더 진지해졌다.

“무도회장에서는 네 성력이 남아 있었다는 보장이 있어?”

“그건 없긴 한데.”

“증상이 나타나기 직전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다면 말해 줘.”

“별일 없었어. 그냥 네가 들어온 걸 보고 옆에…….”

옆에 모르는 여자가 있는 걸 보고 조금 놀란 게 전부다.

이상하게 들릴 것 같아서, 나는 말을 다 내뱉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말하면 꼭 내가 아이린을 질투라도 한 것 같지 않나.

괜히 오해를 만들 필요는 없을 테니까 음.

“아이린 호버? 그 여자가 뭘 했어?”

“하긴 뭘 해, 그냥 본 게 다인데.”

“진지하게 생각해, 라스티. 안 그래도 호버 백작이 너를 타깃 삼았다는 정보가 있었으니까.”

그게 누군데?

호버 백작이면, 대충 아이린 호버의 부모 중 하나일 것이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나를 왜?

추측조차 되지 않았으나 크루엘로는 진지해 보였다.

하나 그렇다고 한들, 당하지도 않았는데 누군가에게 누명을 씌울 수는 없었다.

설사 그 자리에서 성력이 사라졌다고 한들 타인의 악의 정도는 눈치챌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내 생각과 반대로 크루엘로의 기세는 점점 살벌해졌다.

내버려 뒀다가는 애먼 사람을 잡을 판이라, 나는 하는 수 없이 정정했다.

“어쨌거나 아이린 호버가 뭘 하진 않았을 거야.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했다면, 바로 옆에 있던 네가 몰랐을 리가 없잖아. 그냥, 내 몸이 아니라 심리적인 문제였을 수도 있고.”

“심리적인 문제라니.”

“뭐, 음. 내가 그 상황에서 그냥 기분이 안 좋아서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는 거지. 왜, 일상에서도 갑자기 속이 답답해질 수는 있는 거잖아.”

알맹이가 없으니, 말을 이어 갈수록 내용이 이상해졌다.

심리적인 문제라느니 기분이 안 좋아졌다느니, 크루엘로더러 오해하라고 판을 까는 것 같다.

과연 그의 표정도 점차 묘하게 변해 갔다.

“혹시─.”

“그런 건 아니야.”

“아니라니 뭐가?”

대답이 궁색하다.

얼굴에 점점 열기가 몰렸고, 그럴수록 혀가 꼬였다.

“네가 뭘 생각하는지 알 것 같거든. 그러니까, 내가, 그, 네 옆에, 여자가 있는 걸 보고 질…… 했다고 생각하는 거잖아?”

진작 화술 선생을 구할걸!

잊고 있던 과제가 떠오르자 머리를 싸매고 싶어졌다.

이래서 일을 미루면 안 되는 건데.

크루엘로는 내 구구절절한 말을 들으며 점점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주 얄미웠다.

“아니야?”

“아니야.”

“왜 그렇게 생각해?”

“그, 러니까 질투란 건 그런 게 아니잖아, 난!”

근거를 대 반박하려고 했는데 가장 기본적인 부분에서 말문이 막혔다.

질투가 뭐지.

나는 눈을 깜박이다가 답을 알 법한 이에게 물었다.

“그런데 질투할 때 어떤 기분이야?”

다른 사람들이 말하길, 크루엘로가 래버린스 경을 질투했다고 하니 이 애는 알겠지.

그 또한 말문이 막힌 듯, 한 박자를 쉬었다가 입을 열었다.

사내의 시선이 슬쩍 나를 빗나갔다.

“조금 순화해서 말하자면…….”

“순화하지 말고.”

“죽……. 글쎄, 잘 모르겠네.”

“방금 죽여 버리고 싶다고 말하려고 했지.”

“글쎄, 잘 모르겠네.”

험악한 말이었으나 모순적이게도 안심이 된다.

나는 아이린 호버를 죽여 버리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뿐인가, 크루엘로가 그녀를 오해하려고 해서 대신 해명까지 해 주었지.

역시 그때 나는 질투를 한 게 아니라.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고 쳐다보기가 힘들어.”

“뭐……?”

“속이 답답하고 조금 부글거리기도 하고.”

“그럴 리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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