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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53화 (153/162)
  • 153화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고, 크라바트를 꼼꼼히 맨 뒤 장갑을 손에 끼웠다.

    여름이 다가왔음에도 살갗이 드러난 곳은 거의 얼굴뿐.

    크루엘로는 제 차림새를 내려다보며 실소했다.

    “취향이 바뀌었어. 목 끝까지 여며서 조금도 피부가 비치지 않는 복장이 좋아.”

    그런 지나가는 말조차 흘려듣지 못하는 저 자신이 우스웠으나 어쩌겠는가.

    다름 아닌 라스티가 한 말인 것을.

    알아주지 않더라도 신경 써야 제 마음이 편했다.

    매무새를 가다듬고 크루엘로는 황궁으로 향했다.

    황실에서 보낸 초대장에 답신도 없이 왔으나 당연하게도 출입이 가로막히지는 않았다.

    그가 막 무도회장으로 들어서던 때, 마침 입장하려던 여자가 있었다.

    시종장이 입장 순서를 조절해 여자를 멈추게 했다.

    “고, 공작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쪽으로는 관심도 두지 않던 크루엘로가 고개를 틀었다.

    허리춤까지 오는 금발이 돋보이도록 차림새를 가꾼 여자.

    마르고 우울한 얼굴을 보자, 뒤늦게 상대가 누군지 떠올랐다.

    “아이린 호버가 수도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알아차렸을 뿐, 관심이 생겼다는 뜻은 아니다.

    알은체도 않고 크루엘로는 도로 고개를 돌리고 시종장을 향해 턱을 까딱였다.

    그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두 사람의 이름을 함께 호명했다.

    크루엘로가 앞서 걸음을 옮겼고 아이린이 사내를 뒤따랐다.

    “저희 아버지께서 이번에도 과욕을 부리시려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저는 수도원으로 돌아갈 예정이에요. 부디 제 뜻을 오해하지 말아 주셨으면─.”

    “그렇겠지.”

    초조함이 가득 묻어나는 말에, 크루엘로가 심드렁히 내뱉었다.

    “자네에게 뜻이랄 게 어디 있겠나. 늘 아비의 뜻대로 휘둘리는 삶인걸.”

    아이린의 낯빛이 조금 창백해졌다.

    딱히 그녀 모욕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할까, 모욕할 정도의 관심조차 없었다.

    “사사롭게 보복할 만큼 한가하진 않으니 성가시게 굴지만 마.”

    “아버지께서는─.”

    “지은 죄만큼 감당해야지. 억울한가?”

    “……아니요. 관대한 처분에 감사드립니다.”

    관대?

    그 말에, 크루엘로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그는 라스티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정확히,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여기서 말한들 목소리가 들릴 리 없을 텐데도 입이 벌어졌다.

    “라…….”

    그러나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상대는 시선을 피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착각이 아니라는 걸 명확히 하듯, 라스티는 곧장 몸을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멀어질수록 그의 기분은 엉망진창으로 가라앉았다.

    ‘왜?’

    라스티가 저를 피하는 이유가 뭔지 수도 없이 생각했으나 결국 알 수 없었다.

    “너는 조금도 문제 될 게 없어. 그냥 개인적인 문제야. 네가 아니라 내가 잘못된 거라고.”

    “살아가는 덴 비밀이 필요한 거야.”

    외면, 개인적인 문제, 비밀.

    그녀가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예리한 칼날처럼 속을 저며 낸다.

    소중하다느니 돌아오겠다느니, 믿을 수 없도록 귀에 단 말을 내뱉고도 라스티는 도로 제 몸을 베일로 감쌌다.

    신뢰가 쌓일 턱이 없다.

    그러나 크루엘로의 온 마음을 짓누르는 감정은 배신감보다도 더럽고 질척한 것이었다.

    ‘아.’

    멀어지는 저이를 붙잡아 옭매고 싶다.

    주위의 사람을 모조리 난도질해 손 뻗을 곳을 없애고 품에 주저앉히고 싶다.

    그깟 성력만 없으면 할 수 있을 텐데.

    그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영혼에 남은 흔적이 충동을 부추겼다.

    두통이 치밀어 크루엘로는 이마에 손을 짚고 고개를 수그렸다.

    눈가를 찡그린 채 숨을 골랐다.

    전 재산을 기부금으로 들이부어서라도 교황을 만나야 할까.

    그러면 이 탐욕스러운 유혹을 지워 낼 수 있을까.

    그는 느리게 주먹을 쥐었다 펴며 감정을 가라앉혔다.

    노력한 보람이 있어서 다시 얼굴을 들었을 때엔 그럭저럭 평소처럼 보일 수 있었다.

    “공작…… 전하?”

    근처엔, 아직 아이린 호버가 얼쩡거리는 채였다.

    조금이나마 비가를 닮은 얼굴을 보고, 크루엘로는 그나마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이만 돌아가 보는 게 어때.”

    “네, 네?”

    “내가 오늘 심기가 불편할 예정이거든. 자네와 나를 두고 쑥덕거리는 소리가 평소보다 귀에 거슬릴 것 같아서 말이야.”

    답을 듣지 않고 그는 걸음을 옮겼으나, 뒤에서 황급히 무도회장을 빠져나가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미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 아이린의 발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그에 실소가 나왔으나 차라리 그녀가 저보다는 현명했다.

    뒤돌아야 할 때 갈 수 있었으니까.

    실상, 무도회장에서 나가야 할 사람은 크루엘로였다.

    아슬아슬하게 억누르고 있을 뿐, 불같은 감정은 끊임없이 넘실거린다.

    언제 일을 치를지도 모르는 상황에 구태여 남아 있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이성적인 생각을 하더라도, 그는 무작정 걸었다.

    잠시 머뭇거린 새 라스티의 뒷모습은 제법 멀어져 있었다.

    불편한 심기가 겉으로 드러났는지, 아니면 평소의 악명 때문인지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인파가 갈라졌다.

    그렇기에 라스티가 도망치듯 멀어지는 모습이 눈에 더 선명했다.

    라스티.

    라스티.

    라스티.

    자기 파괴적인 의문들이 샘솟는다.

    소중하다는 말은 당시의 상황을 모면하려고 내뱉은 거짓말이었는지.

    아니면, 그 짧은 시간 동안 생각이 바뀌어 버렸는지.

    제 본질을 알고 나니 더는 참을 수 없게 되었는지.

    ‘너도, 내가 역겨워?’

    라스티가 누군가와 부딪치고 함께 발코니로 들어가자 그의 속이 새하얗게 타는 것 같다.

    숨을 억누르고 곧장 문을 열어젖혔다.

    그 순간, 라스티는 휘청이는 누군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동시에 그녀와 크루엘로의 눈이 마주쳤다.

    찾아온 건 그 자신이었음에도 그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할 뻔했다.

    그녀의 청록빛 눈동자에 경멸 따위의 감정이 녹아 있을 것만 같아서.

    마음이 살기로 들끓는 와중에도 그걸 확인하기가 무서워서.

    그러나 말간 눈은 평소와 같았다.

    “어, 안녕…… 하세요, 공작전하. 오랜만이네요.”

    어설프게 내뱉는 인사말과 이 상황이 어색해 죽겠다는 듯 데굴데굴 구르는 눈동자까지.

    짧은 순간 상상했던 최악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여상한 태도에 크루엘로는 느리게 숨을 내뱉었다.

    현실과 상상의 괴리를 깨닫자 한풀 꺾인 마음에서 열기가 빠져나간다.

    그는 그제야 라스티의 품에서 뭉개고 있는 이물질을 치워 낼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그 여유가 잠깐뿐이라는 것도 알았다.

    ‘더는, 안 되겠어.’

    그 곁에 있어야겠다.

    라스티의 앞에 꿇어앉아 괴로움을 호소해야겠다.

    그녀는 성직자였고 모리온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으니 저를 저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흔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았고, 해결할 수 없다면 영원히 머무를 수 있을 테니.

    만약 저를 통제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면, 그녀가 저를 데리고 소중한 이들의 곁을 떠나 멀리 떠나 줄지 어떻게 알겠는가.

    “밤에 찾아갈게요, 달링.”

    그릇된 욕망이 희열로 번진다.

    라스티가 귀가한 걸 알고도, 크루엘로는 곧장 페불라 백작저에 쳐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녀가 저를 피하고 싶어 하더라도 그럴 수 없도록, 사명의 사슬을 옭아매는 길을 천천히 생각했다.

    가능하면 라스티가 저를 외면하는 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모르더라도 괜찮다.

    무너지기 직전의 모래성이라 한들, 관계가 아예 망가져 버리지 않는다면 그걸로 족했으니까.

    그는 몇 시간에 걸쳐 할 말을 정리하고 감정을 가다듬었다.

    마침내 준비를 마쳤을 때는 저택의 사용인들 대부분이 잠들어 있을 시간이었다.

    정문으로 들어갈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는 곧장 라스티를 만나고 싶었다.

    ‘충분히, 오래 기다렸어.’

    백작저의 구조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기에 그는 침실로 향했고, 창틀을 타 넘었다.

    우아하게 구불거리는 흑발의 여자가 놀란 눈으로 그를 맞았다.

    평소처럼 웃는다고 생각했으나 상대에게도 그리 보였을지는 모르겠다.

    “안녕, 라스티.”

    “어, 크루, 엘로.”

    기척을 감추고 온 것도 아니고 창문으로 들어온 게 처음도 아니다.

    그럼에도 라스티는 저를 보고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에는 저를 마주치는 게 달갑지 않아 그러는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니었다.

    “깜, 짝 놀랐네. 크루엘로, 너는 왜 멀쩡한 문을 내버려 두고 또 창문을 넘어 다녀. 남들이 보면 도둑인 줄 알아. 악명에 절도죄도 추가하고 싶어?”

    그녀의 안색은 창백했고 입술에도 핏기가 돌지 않았다.

    어찌나 식은땀을 흘렸는지 잔머리가 뺨에 다 달라붙어서는, 꼭 아픈 사람 같은 행색이었다.

    내면의 욕망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이 사그라진다.

    크루엘로는 그저 걱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 라스티.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아무 일도 없었는데.”

    최근 그렇게나 피하던 시선이 똑바로 맞았다.

    그러나 별로 자연스러워 보이는 모습은 아니었다.

    꼭 오기를 부리는 것처럼, 속에 든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그래, 라스티는 마치 겁에 질린 사람 같았다.

    크루엘로는 그녀가 겁을 먹지 않도록 천천히 다가갔다.

    상대는 주춤주춤 물러났으나 가까워지는 속도가 조금 더 빨랐다.

    침대에 등허리를 부딪쳤을 때가 되어서야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음, 뭐, 그래. 지금 내 상태가 안 좋은 건 맞는 것 같아. 그냥 컨디션 문제야.”

    부하를 시켜 내내 페불라 백작저를 살피게 했으나, 오늘 밤까지 특별한 보고가 들어오지는 않았다.

    무도회장에서 돌아온 직후 라스티는 누굴 만나지도 않았고 어떤 사건에 휘말리지도 않았다.

    그녀를 겁에 질리게 한 문제가 있다면, 그건 분명 내면에서부터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나 추측한들 크루엘로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할까.

    그녀는 이번에도 말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고, 자신은 남을 달래 본 경험이 없었다.

    더군다나 겁에 질린 듯한 라스티라는 게 그 자체로 생소했다.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일로 머릿속이 백지가 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무언가를 해 주고 싶었다.

    무엇 때문인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라스티를 달래고 싶었다.

    크루엘로는…….

    “그래서 말인데 괜찮으면 다음에 올래? 다음 주나, 내일이나, 아니면 그냥 몇 시간 뒤에만 와도 괜찮고…….”

    크루엘로는 어린 시절을 더듬어 떠올렸다.

    제가 조그만 소년일 적, 그리고 라스티가 에이미 로열샌드일 때의 일.

    힘들고 우울할 때 에이미가 제게 나눠 주었던 다정함을.

    위로받았던 기억을 흉내 내 되돌려 주다니 참으로 형편없었으나, 자신이 받았던 위로라는 게 전부 라스티에게 받은 터라 달리 참고할 기억도 없었다.

    크루엘로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팔을 벌렸다.

    라스티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뭐야, 크루엘로. 그냥 컨디션 문제라니까 왜 그래.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나한테 있었어.”

    “뭐?”

    “아주 힘든 일이 있었거든. 위로해 줄래?”

    라스티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녀는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다가 입술을 짓씹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그 느릿한 움직임에 조바심이 일었으나, 크루엘로는 잠자코 그녀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꼭 어린 날의 에이미가 그를 기다려 주었던 것처럼.

    그리고 마침내, 라스티가 그의 품에 들어왔다.

    크루엘로의 등에 양팔을 두르고 힘껏 끌어안았다.

    눈물을 쏟아 내지는 않았으나 그녀의 온몸이 떨리고 있다.

    그는 어색하게 그 등을 도닥이며 속삭였다.

    “괜찮아, 뭐가 됐든 다 괜찮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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