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마리오네트-152화 (152/162)
  • 152화

    “나는 진심이니까 너도 진지하게 생각해 봐.”

    가보트는 마지막까지 그런 말을 하면서 떠났다.

    곱씹을수록 어이가 없어서 자꾸만 실소가 나왔다.

    보네티 남매를 배웅하고, 나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무거운 옷을 갈아입고 씻고 침실에 들어서자 어느덧 ‘밤’이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때가 되었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찾아올 사람이 두려워서 그런 건 아니었다.

    아까는 상황에 휘말려 위축된 척 굴었을 뿐이다.

    내가 진짜로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거니와 크루엘로가 아직 나를 좋아할지도 모르는 거 아니야?

    흥, 나는 양팔을 벌리고 침대에 널브러졌다.

    “그래, 내가 뭐 죄지었나!”

    내가 크루엘로한테 지은 죄라곤 꿈에서 그를 희롱한 것뿐이다.

    그리고 꿈에서 지은 죄는 현실 법으로 처벌할 수 없다.

    오늘 중 그 악몽도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했는데 오늘 오겠다는 크루엘로가 잘못한 거지.

    그래, 라스티, 너는 무죄야, 너는 당당해!

    나는 한껏 어깨를 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나는 버베나를 불렀다.

    “버베나!”

    “예, 백작님.”

    “혹시 손님이 찾아오면 내가 아프다고 해.”

    “예?”

    “고열이 심하고 사지가 떨려서 도무지 사람을 만날 수가 없는 상태니, 한 일주일쯤 지나서 다시 오라고 전해.”

    그녀는 조금 당황한 듯했으나 곧 침착하게 그러겠노라 답했다.

    황실에서 사람을 참 잘 구해 줬다니까.

    닫힌 문을 보고 나는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죄지은 게 아니라도 만나기 싫을 수는 있잖아.”

    그건 인간으로서의 내 자유 아닌가?

    더군다나 아팠던 것도 사실이다.

    이상하게 지금은 멀쩡해졌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얼마나 속이 울렁거리던지.

    그러니 쉬는 게 맞다.

    나는 침대에 드러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죽은 듯이 숨만 쉬었다.

    그러나 그렇게 몇십 분을 버텨도 통 잠이 오지 않았다.

    “에휴.”

    나는 결국 이불을 걷어 내고 침대에서 일어나 등을 켰다.

    해결이나 하자.

    테이블로 고개를 돌리자 받은 지 며칠이 지났음에도 제법 생소한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페불라의 성물이라는, 저울과 단검이다.

    데이디어에게 건네받은 걸 일단 침실로 가져오기는 했는데, 통 마음의 여유가 없어 제대로 살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페불라와 결판을 짓기로 했으니 이걸 만져야겠다.

    나는 비장한 각오를 마치고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기적을 일으킨다는 거람.”

    겉만 봐서는 통 알 수가 없다.

    저울과 단검이라니.

    솔직히 모양새로만 봐서는 페불라가 아니라 레카논의 성물이라고 해도 믿을 것처럼 생겼다.

    우리 주문 중에도 심판이니, 처단이니 그런 게 있긴 했지만.

    내 신을 협박하기 전에 기능이나 알아볼까.

    성물의 기적을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 신도의 성력을 밀어 넣기만 하면, 성물이 기적을 발휘했으니까.

    간단한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성력을 끌어 올렸다.

    “……뭐야.”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

    “네가 말한 개인적인 사정 말이야, 내가 돌아올 때까진 정리되면 좋겠네.”

    부탁할게, 라스티.

    그 말을 끝으로, 크루엘로는 무도회장을 나섰다.

    한동안 라스티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서.

    제가 이상해졌다는 걸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크루엘로는 원체 평범하지는 않았으나 상식을 알았으며 남들의 배 이상으로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랬던 모습이 거짓말인 것처럼 감정은 통제할 수 없이 들끓었고, 가벼운 일에도 살기를 부풀렸다.

    다른 일에서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괜찮았다.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관심이 없었기에, 냉정하게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었다.

    하나 라스티만 엮이면 마음이 그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그녀를 되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제가 예민하게 구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녀가 죽을 위험이 사라졌으니 같은 위기가 다시 닥쳐오지 않는 한, 마음은 천천히 가라앉을 거라고.

    원인을 모를 때나 할 수 있던 착각이었지, 크루엘로는 제 목을 매만지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에덴의 뱀이 물었던 자리였다.

    금세 아물어 겉으로는 조금도 티가 나지 않았다.

    라스티조차 알아차리지 못했고, 에덴이 죽은 후로는 크루엘로도 신경 쓰지 않았다.

    ‘별거 아닌 줄 알았으니까.’

    어쩌면, 그의 몸에 남은 게 에덴의 성력뿐이었다면 정말 별거 아니라는 양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크루엘로의 몸에는 모리온이 지나갔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시오라가 죽기 직전 성력을 퍼부어 준 덕에 상당히 중화되기는 했으나, 그 부정한 힘을 깔끔히 지워 낼 수는 없었다.

    남은 건 아주 미약한 양이었으나 에덴의 성력과 합쳐져 크루엘로를 부추기기 시작했다.

    참지 마. 화를 내. 죽여. 신경을 거스르게 하는 걸 남겨 두지 마.

    라스티가 받는다는 계시가 이런 느낌일까. 모리온의 흔적은 끊임없이 크루엘로에게 제 뜻을 강요했다.

    흔적만으로도 그러니, 그걸 통째로 집어삼켰으면 어떻게 됐을지는 뻔했다.

    크루엘로는 모리온 앞에서 과민하던 라스티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인을 안들, 그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후.”

    감정은 진정되지 않고 모든 게 갈수록 엉망이 되었다.

    애당초 이용하기 위해 입적을 제의했으면서, 또다시 입적이니 뭐니 헛짓거리를 하는 보네티.

    무슨 소리를 듣고 온 건지 그날 이후 저를 피하기 시작한 라스티.

    심지어는 그 와중에 별 잡스러운 부스러기까지 끼어들어 이딴 소리를 지껄였다.

    “제가, 제가 백작님께 첫눈에 반했습니다.”

    윌리엄 래버린스라고 했던가.

    그가 저지른 죄를 털어 내 기사단에서 방출되게 만든 데 그친 건, 크루엘로가 최후의 인내심까지 끌어 쓴 결과물이었다.

    다른 신관만큼 강박적으로 굴지는 않아도 라스티는 성직자였고 죄 없는 이가 피해를 보는 것에 민감해했으니까.

    그러나 인내는 점점 닳아 가고 있었다.

    언젠가, 모리온이 부추기는 대로 일을 벌인대도 조금도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라스티에게 다가가는 모두를 죽이고 보네티를 무너뜨리고 라스티를 품에 주저앉히고.

    솔직히 말해, 그런 걸 상상하면 이제는 속이 시원할 지경이었다.

    차라리 라스티라도 멀쩡했다면, 모리온의 흔적에 대해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걸 핑계 삼아 오히려 그 발을 묶어 둘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대체 뭐가 문제야.”

    그는 고개를 꺾은 채, 양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보네티에서 있던 일을 아무리 캐 봐도 도무지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거기서 무슨 말을 들은 걸까, 이제 와 저를 피하는 이유가 뭘까.

    소중하다고 말했잖아.

    미뉴엣 보네티의 목숨보다도 내 쪽이 값어치가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을수록 살기도 끓어오른다.

    그때 처절한 신음이 크루엘로의 상념에 끼어들었다.

    “우윽, 윽!”

    그는 얼굴을 덮은 손을 치우고 시선을 돌렸다.

    사내의 앞에 엎어진 이들이 애원하는 소리였다.

    화풀이라도 하면 좀 나아질까 싶어서 끄집어낸 교단의 잔당들이었다.

    후에 라스티에게 들킬 경우를 대비해, 중범죄자들로만 골라 낸.

    기껏 선별해 낸 보람도 없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정리해.”

    크루엘로의 말에 그의 부하가 움직였다.

    짧은 비명, 그리고 긴 침묵.

    그는 양손으로 제 얼굴을 쓸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런 효과가 없으니 더 시간을 죽일 이유도 없었다.

    지하실을 나오자, 햇빛이 유독 따갑게 느껴졌다.

    두통이 치밀어 올라 크루엘로는 눈가를 찡그렸다.

    그가 품에서 궐련을 꺼냈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의 보좌관이 다가왔다.

    “아이린 호버가 수도원에서 나왔습니다.”

    끄트머리를 잘라 낸 엽궐련을 입에 문 채, 크루엘로는 연기를 깊이 빨아 당겼다.

    아이린 호버?

    “아, 네 번째.”

    원로회에서 붙인 그의 혼담 상대 중 하나였다.

    조금이지만, 비가를 닮았던 걸로 기억한다.

    아비인 호버 백작이 욕심껏 들러붙었다가 끝끝내 감당하지 못해, 딸을 수도원에 밀어 넣었던가.

    그는 고개를 조금 기울인 채 연기를 내뱉었다.

    “그게 왜.”

    “호버 백작 측에서 곧 이쪽에 혼담을 넣으려는 것 같습니다.”

    “허.”

    싫다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어이가 없었으나, 크루엘로는 곧 백작의 진의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에 대한 소문이야 갈수록 요란해졌으나 그래, 행동만 보면 한동안 꽤나 얌전했다.

    보네티도 처음에나 조금 건드는 티를 내고 말았으니까 철이 들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새삼 화이트데저트 공작이 아까워졌고 그런 와중에 공작의 약혼녀 자리는 공석이 됐고.

    남 일처럼 생각을 이어 가다가 크루엘로가 실소했다.

    타이밍을 고른 거라면, 최악의 순간을 잘도 골라냈다.

    살면서 지금만큼 포악해진 때가 없던 것 같은데, 건드려 달라는 건지.

    “오늘 궁정 무도회에 참가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딴 걸 일일이 보고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페불라 백작님께서도 같은 무도회에 참석하실 예정입니다.”

    뭐?

    “하하, 호버 백작이 그 애의 머리털 한 가닥이라도 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갑작스럽게 등장한 라스티가 그저 평민 출신 같으니 손쉬워 보였나 보지?

    터무니없는 망상이다.

    크루엘로는 호버 백작이 외려 망신을 당하는 꼴을 손쉽게 그려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실소하다가도 곧 사내는 불쾌해졌다.

    감정 상태가 변덕스럽기 짝이 없었으나, 최근엔 익숙해진 일이었다.

    “당분간이라도 그 기름진 얼굴을 볼 일이 없으면 좋겠군.”

    “사고를 일으켜 두겠습니다. 아이린 호버 쪽도 처리할까요?”

    “내버려 둬. 아비만 치우면 문제 될 일도 없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공작전하. 무도회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이제 일주일쯤 되었나.

    크루엘로는 라스티를 보지 못한 나날을 세어 보다가 한숨을 삼켰다.

    짧은 듯하지만, 긴 시간이다.

    아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로 그 주변에 갔다간, 또 누굴 죽이겠다는 마음이 들끓을지 몰랐지만.

    ‘잠깐이라면.’

    크루엘로는 엽궐련을 입에서 떼어 내 보좌관에게 건넸다.

    몸에서 인 마나가 거친 냄새들을 깨끗이 지워 낸다.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보좌관이 답했다.

    “준비하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