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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51화 (151/162)

151화

“……오래전 일이에요. 혼, 담이 버거워서 수도원에 들어갔었는데…….”

“음. 그렇구나.”

“왜 같이 들어오신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우연이 아닐까요?”

도리는 필요 이상으로 내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

그 태도가 의아했다가, 나는 그녀가 나를 어떻게 오해하고 있는지 떠올렸다.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연인의 바람이라도 목격한 사람처럼 되는 건가.

크루엘로와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부정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 상황에 하는 말이 퍽이나 믿기겠다.

그러고는 이유도 없이 다시 크루엘로 쪽을 쳐다봤다가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웃고 있었다.

아.

나는 빠르게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아무튼 잘 어울리네요.”

“네, 네? 아, 어디 가세요?”

“음, 기분이 이상해서요.”

전혀 대답이 되지 않겠지만, 할 말이 그것밖에 없었다.

뭔가, 보면 안 될 걸 본 것 같은데.

아니지.

속이 답답한데 체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니까 아까 너무 와인을 급하게 마셨던 것 같다.

근래 정신 건강이 계속 안 좋았으니, 몸도 영향을 받았나 봐.

아무래도 오늘은 일찍 귀가하는 게 좋겠다.

보네티에서 마차를 두 대나 가져왔으니 한 대쯤 빌려 가도 괜찮겠지.

고개를 끄덕이며 걷는데, 가보트가 당황하며 내 앞을 막아섰다.

“뭐야, 라스티. 어디 가?”

“기분이 이상해서.”

“뭐?”

“아니, 음. 속이 좀 별로야. 돌아가서 쉬려고.”

가보트는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와인 이야기를 하려다가, 다 귀찮아져서 고개를 저었다.

에이, 몰라.

“라스티, 야, 라스티!”

나는 그냥 가보트도 지나쳐 걸었다.

체기가 심한지 걸을수록 속이 울렁거리고 귀가 먹먹해서 꼭 바닷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두 눈에는 무도회장의 출구밖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무작정 걸었으니, 누군가랑 부딪친 것도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툭.

어깨에 약간의 충격이 오더니 몸이 그대로 돌아갔다.

넘어진 건 아니었지만 조금 정신이 들었다.

“죄송합…….”

“기분이 이상, 아, 이게 아니구나. 넵, 괜찮습니다.”

“저기, 잠시만.”

사과를 받는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상대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가 연갈색을 보고 순간적으로 눈가를 찡그렸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머리 색이 같을 뿐, 상대는 에덴이 아니었다.

단정한 연갈색 머리칼에 콧대가 반듯한, 제법 반반한 얼굴.

전에 미뉴엣이 준 인적사항에 이런 인상이 있었던 것 같다.

로츨리에 후작가의 차남이었는데 이름이 뭐더라.

“다인 로츨리에라고 합니다.”

아하.

“실례가 안 된다면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저 지금 작업 걸릴 기분이 아닌데요.”

“그, 런 게 아닙니다. 그냥 어디서 뵌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이건 또 무슨 전형적인 개수작이람.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그 말을 들은 순간 희한하게도 상대가 어딘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왜지?

불길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지만, 괜스레 에덴의 첫인상이 생각났기에 나는 확인하기로 했다.

“잠깐 정도는요.”

우리는 발코니로 자리를 옮겼다.

어제 비가 와서 그런지 바람이 축축했으나 시원했다.

속이 탁 트이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머리도 조금 맑아지는 것 같고.

난간에 기대어 멍하니 바람을 쐬다가 뒤늦게 앞에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왜 멀뚱히 서 있기만 한담, 나는 눈가를 찡그렸다.

“할 말 없으시면 가 볼게요.”

“아, 제가 착각한 게 아닐까 싶어서 신중하게 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맞는 것 같아서.”

“혹시 제가 잃어버린 첫사랑을 닮았다는 설정은 아니시겠죠?”

“예. 그냥, 겨울에 가장 낮은 곳에서 피는 꽃을 알고 계시는가 싶어서 말입니다.”

“무슨 개…….”

잠깐만.

겨울에 가장 낮은 곳에서 피는 꽃?

분명히 귀에 익은 말이었다, 아니 글자라고 해야 하나.

「겨울. 가장 낮은 곳. 아리스타타.」

설마 이 사람…….

교단을 무너뜨린 뒤로 새까맣게 잊고 있던, 어느 조사관이 떠올랐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리스타타?”

“역시 맞았군요!”

그는 꼭 잃어버린 주인을 다시 만난 개처럼 반가워했다.

너무 기뻐하니까 이쪽은 외려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이런 얼굴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인조 가죽을 덧씌운 얼굴이었습니다. 특수한 마법을 써야 벗겨 낼 수 있어서 교단 측에서도 제거하지 못했었지요.”

내가 데이디어의 수행인으로 변장할 때 쓴 수법이잖아!

황궁의 비밀 조사관들이 쓰는 기법을 똑같이 재현했다니.

세상에, 나는 왜 이렇게 똑똑한 걸까.

나 자신에게 소름이 돋아,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 답답했는데 이렇게 뵙게 되어 다행입니다.”

“저는 어떻게 알아보신 거예요?”

“드리기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페불라 백작님에 대해 알게 모르게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소문이라면…….”

“그래도 아는 사람은 다 알 테니, 작위를 내리는 게 제국에 이득이 될 거야. 고대 신의 마지막 사자가 제국의 귀족이라니 얼마나 탐스럽겠어?”

크루엘로가 했던 말을 떠올리니 납득할 수 있었다.

하기야 신전이며 황제며, 아는 사람이 한둘이어야 말이지.

아무튼 입 가벼운 인간들 같으니라고.

뚱한 표정을 짓자 다인 로츨리에가 멋쩍게 웃었다.

“실은 그 소식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다른 분이 아닐까 생각했었지만, 그분께 확인하지 않은 것이 다행입니다.”

시오라 보네티도 의심 선상에 있었나 보다.

“그렇군요.”

“저번에 제대로 인사드리지 못했습니다. 도와주셔서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도움받은 건 피차 마찬가지인데요. 신경 쓰지 마세요.”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백작님이 없으셨다면 전 그대로 죽은 목숨이었을 텐데요.”

“그렇게 신경이 쓰이시면 돈으로 주시든가요.”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소리 내어 웃었다.

농담 같아? 난 진심이야!

그렇게 말하려던 차에 사내의 귀가 은근히 붉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

그의 웃는 얼굴이 새삼스럽게 수줍어 보였다.

설마 또?

내가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니, 윌리엄 래버린스보다야 개연성 있는 감정이었지만, 그 빈도가 너무 잦으니 슬슬 무서울 지경이다.

아니면 그냥 자의식 과잉인가?

“그러면 다른 날, 제게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혹시 데이트하자는 건 아니죠?”

“예?”

“저한테 반하셨나요?”

착각이 개입할 여지가 없게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다인 로츨리에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보통 당황한 게 아닌지 급기야 뒷걸음질까지 치기 시작했다.

“아니, 저, 저는, 그런 건─!”

저 얼굴만 봐도 정답이다.

혹시 이게 진작 소멸된 사랑의 신의 수작이라면, 같은 패턴은 질린다는 말을 전해 주고 싶다.

나를 당신의 신도로 오해하고 있다면 안경을 바꿔 끼는 게 좋겠다는 말도.

“오, 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결코 사심이 아니라 순수하게 감사의 의미로!”

그는 급기야 발코니의 문에 등이 닿을 지경으로 물러났다.

문제는, 발코니의 문이 꽉 닫히지는 않은 상태라는 것이다.

내버려 두면 다인 로츨리에가 뒤로 벌렁 넘어져 무도회장의 주인공이 되는 게 아닐까?

재미있겠군.

하지만 그 뒤에 사람들은 발코니에 누가 있었는지 확인하려 들 것이다. 내가 다인 로츨리에에게 폭력을 가했다는 소문이 나는 건 아닐까?

재미없겠군.

나는 사람 된 도리로 그에게 다가가 팔을 잡아당겼고, 그 순간 누가 발코니의 문을 열었다.

“윽!”

벌컥 소리와 함께, 외간 남자가 내 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수많은 귀족의 시선이 쏟아진다.

꼭 밀회라도 들킨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 부담스러운 눈길보다도 신경 쓰이는 것은, 나보다 머리 하나는 높은 곳에서 빛나는 붉은색.

그건 발코니 문을 연 주범의 눈이었다.

익숙하면서도 평소 이상으로 살벌한 그 빛을 보고, 나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어, 안녕…….”

공적인 자리에서는 공대하기로 했던 게 떠올라서, 다급히 말을 붙였다.

“하세요, 공작전하. 오랜만이네요.”

내뱉고 나서야, 이런 상황에 인사나 하는 게 굉장히 바보 같아 보일 거라는 걸 알아차렸지만, 뒤늦은 후회였다.

크루엘로는 내 인사를 받아 주지 않았다.

대신하여 말없이 손을 뻗고는 다인 로츨리에의 목덜미를 잡아 거칠게 뜯어냈을 뿐이다.

“죄, 실례했습니다!”

온몸이 새빨개진 다인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는 듯 소리치며, 뛰쳐나갔다.

그리고 나는, 왠지 바람을 피우다 걸린 듯한 기분을 느꼈다.

얼마 전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착각일까.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오늘은 크루엘로한테도 다른 파트너가…….

“어라.”

어디 갔지?

슬쩍 시선을 돌려 봤으나, 크루엘로의 주변에 있어야 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금색 머리칼은 한 가닥도 보이지 않는다.

아이린은 어디에 간 거지?

시야를 넓혀 무도회장 전체를 살펴도 소득이 없었다.

그 대신 알게 된 건, 정말로 그 안의 모든 귀족들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으며 크루엘로의 눈치를 보듯 행동한다는 것이었다.

음.

“저기,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실례하겠습니다.”

슬그머니 문을 열고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크루엘로는 비켜 주지 않았다.

발코니에서 뛰어내리면 수도 사람들한테 너무 자극적인 이슈가 될까?

고민하던 때 그가 입을 열었다.

“오늘.”

오늘 뭐. 왜. 무슨 짓을 하려고.

긴장하며 바라보는데 그는 제 미간을 문지르고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크루엘로가 미소 지었다.

눈동자가 텅 비어 있어서 몹시도 소름 끼쳤다.

“밤에 찾아갈게요, 달링.”

들어본 중, 가장 섬뜩한 ‘달링’이었다.

***

“야,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어. 오늘은 그냥 우리 집에서 자.”

이것은 내 저택까지 나를 데려다준 직후 가보트가 나를 설득하는 소리이다.

안 그래도 희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다.

누가 보면 그 예고를 들은 게 내가 아니라 가보트인 줄 알겠네.

“너도 그 자식 눈 봤잖아? 오늘 밤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괜찮아, 가보트. 아직은 내가 이길 거야.”

“……이길 수 있을 때 죽여 두는 건 어때?”

가보트의 말에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되물었고, 미뉴엣은 소리 내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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