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마리오네트-150화 (150/162)
  • 150화

    미뉴엣이 말을 이어 갔다.

    “지금의 너야 그래, 공작을 이빨 날카로운 고양이쯤으로 여길 수 있겠지. 하지만 네 신이 소멸하면 네 성력도 사라질 거라며. 그런 상태에서 감당할 수 있겠어?”

    “크루엘로가 그렇게 나쁜 애는─.”

    “물론 너를 해치지 않겠지. 머리털 한 올 안 다치게 애지중지할 거야. 그러다 세상이 너무 위험해 보이면 보호라는 이름하에 널 감금할 수도 있는 거고?”

    미뉴엣의 말에, 나는 불과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창문에 박힌 쇠창살과 문을 틀어막은 쇠사슬과 손에 매달린 수갑.

    장난처럼 넘어갔으나, 마냥 장난이 아니라는 건 나도 잘 알았다.

    내색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는지 미뉴엣이 눈가를 조금 찡그렸다.

    그녀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지만 그래, 이렇게 말하더라도 의미 없다는 걸 나도 알아.”

    “음.”

    “힘으로도 권력으로도 상대가 안 되지. 냉정히 말해 보네티에서 공작을 막을 수는 없으니까 너랑 공작이 서로 좋은 감정으로 괜찮은 사이를 유지하는 게 최선이겠지.”

    어느 한쪽이라도 감정이 틀어지면, 파국이 되겠지만.

    그녀가 이어 중얼거린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안일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통 그런 그림이 그려지진 않는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근거는 이번에도 직감뿐이지만.

    “공작은 너를 놓아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너도 별로 그 사람을 멀리할 생각이 없어 보이고.”

    “응.”

    “목줄 단단히 묶어 놓고 잘 길들여 봐. 놓치면 네가 제일 괴로워질 테니까.”

    그래도 나를 걱정해 주는 말을 하나하나 따지고 들고 싶지는 않다.

    나는 얌전히 고개나 끄덕였다.

    미뉴엣은 한동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창밖을 흘금 보았다.

    어느새 황궁이 가까워진 채였다.

    “조만간 보네티 백작저에 와, 보네티의 선조가 페불라의 신도였다니 너도 괜찮은 정령을 소환할 수 있을지 모르는 거잖아?”

    “미안한데 미뉴엣, 나 아직 보네티가 되기로 결정하진 않았어.”

    “상관없어.”

    “뭐?”

    “네가 내 동생이 되기를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넌 내 동생이야. 가주인 내가 그렇게 정했으면 호적 같은 건 어찌 됐든 상관없어.”

    그러니까, 외부인에게 정령 소환진을 유출하겠다는 말이다.

    나는 웃으려다가 콧잔등이 시큰해 코를 한 번 훌쩍였다.

    아, 진짜로.

    미뉴엣이 그녀답지 않게 굴 때 너무 쉽게 감동하는 것 같아.

    나는 일부러 장난스러운 투로 물었다.

    “원로회에서 항의 들어오는 거 아니야?”

    “잊었어? 그럴까 봐 다 가둬 놨잖아.”

    아무렴, 내가 도와줬었지.

    우리는 같이 웃었다.

    “만약, 만에 하나 네가 정말 그 남자가 끔찍해졌는데도 도움을 청할 곳이 없다면, 그래도 나한테 와.”

    “아까는 자신 없다며.”

    “자신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든 해 볼게. 사람 하나 숨기는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미뉴엣.”

    “왜, 라스티.”

    “한번 안아 봐도 돼?”

    “안 돼, 옷 망가져.”

    그녀의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고 빤히 쳐다보자, 미뉴엣은 별수 없다는 듯 양팔을 벌려 주었다.

    나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온 마음이 따뜻한 색으로 물들었다.

    ***

    나는 보네티 남매와 함께 무도회장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의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는 말 사이에 몇 번이나, 시오라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저번엔 크루엘로의 파트너로 무도회에 참가했고, 이번엔 보네티 남매와 함께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미뉴엣이 입적 서류를 준비한 것도 소문이 났다면, 별의별 이야기가 다 튀어나올 것이다.

    내가 시오라 보네티의 대용이라느니, 애당초 시오라도 보네티와의 거래를 위해 준비된 인간이니, 어쩌고저쩌고.

    다른 때였다면 나도 그러한 기대에 부응해 재미있는 상황을 만들어 보고자 했겠지만, 이번엔 그럴 기력이 없었다.

    미뉴엣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던 건 잠깐뿐이었다.

    무도회장의 어딜 쳐다보더라도 허리에 손을 감고 애정 행각을 하는 연인이 있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내 머릿속도 원래 문제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저 사람들은 서로 좋아하니까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나한테는 대체 왜 이러는 건데!

    “야, 라스티, 고개 돌려. 너 지금 황후폐하 노려보고 있어.”

    가보트가 몸소 내 고개를 벽 쪽으로 돌려 주었지만, 나는 여전히 내 생각이 더 중요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런 악몽에 시달리는 거지?

    나는 죄가 없다.

    공적이라면 하늘에 닿을 만큼 많지만.

    “아무래도 안 되겠어.”

    “……뭐가.”

    정말로 주문을 만들든, 기도를 하든, 그것도 아니면 내 손에 들어온 성물을 부숴 버리겠다고 페불라를 협박하든 이 지긋지긋한 상황을 해결해야겠다.

    나는 불끈 주먹을 쥐고 결심했다.

    “아 씨, 불안하게 하지 말고. 뭐가 안 된다는 건데, 라스티.”

    “그런 게 있어.”

    “너, 사고 치지 마라.”

    “내가 사고는 무슨……. 어라, 미뉴엣은 어디 갔어?”

    “인사할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아직도 여기에 있겠냐.”

    “너는 인사할 사람 없어?”

    가보트가 말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없다는 말이군.

    가여운 내 동생이 활력을 되찾게끔 놀려 줄까 하다가 관대하게 참아 주기로 했다.

    나도 인사할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고.

    결심만으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왠지 상황이 절반쯤 해결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한결 또렷해진 정신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웬일인지, 이쪽을 흘금거리는 사람은 많아도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전번에 크루엘로가 횡포를 부린 덕분인지, 아니면 내 분위기가 그토록 우중충하기 때문인지.

    뭐, 편하긴 했다.

    나는 지나가던 하인에게서 와인잔을 하나 건네받아 홀짝였다.

    그러던 중.

    “저 사람…….”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다소 작은 체구에 수수한 인상의 여자가 벽 쪽에 서 있는데 얼굴이 눈에 익었다.

    니나 홀메이즈의 티파티에서 봤었는데 이름이 분명.

    “도리 운드였나?”

    이따금 사람들을 흘금거리는 모양새가 심심해 보였다.

    누굴 기다리나? 아니면 대화에 끼고 싶은 건가? 그런데 왜 혼자……. 잠깐만.

    나는 머릿속에서 지나간 일을 시급히 되감았다.

    크루엘로가 도리 운드로 변신해 저질렀던 그 만행들을 되짚어 본 결과! 별거 없었다.

    그냥 크루엘로가 제 자신을 상대로 험담을 좀 한 정도인데, 그 일로 보복당했을 리는 없으니까.

    아니면 혹시 이쪽인가?

    “듣기로는, 웬 자작가의 아가씨와 사랑의 도피를 떠나려 했다던데.”

    내가 데리고 나간 일로 이상한 소문이 붙었었지.

    혹시 나 때문인가?

    긴가민가하여 도리 운드를 계속 쳐다보는데, 뇌가 뒤늦게 미뉴엣이 줬던 인적 사항을 내뱉었다.

    「인간관계가 깊고 좁은 편. 새로운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니 주의할 것.」

    내 잘못이 아니란 이야기군, 마음이 편안해져서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이거 봐라, 가보트.

    난 인사할 사람 있다.

    “야, 야, 어디 가!”

    “뭐야, 가보트! 왜 이래, 이거 안 놔?”

    “네가 있어야 사람들이 안 다가온단 말이야!”

    나를 인간 크루엘로 취급하다니 참을 수 없다.

    나는 가보트의 애절한 손길을 매정하게 뿌리치고 도리 운드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운드 자작 영애 맞으시죠?”

    “아, 안, 안녕하세요.”

    도리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내 얼굴을 보고 더 놀랐는지 그대로 굳기에, 나는 잠시 감상 시간을 내어 주었다.

    곧, 그녀의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죄송, 합니다. 제가 얼굴을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었네요.”

    “괜찮아요, 익숙하니까.”

    “하, 하하. 그……. 페불라 백작님이시죠? 화이트데저트 공작전하의 연인이신.”

    그렇다고 대답하려다가 뒤쪽에 덧붙은 말 때문에 혀가 꼬였다.

    윌리엄 래버린스 덕분에 소문이 이렇게까지 났군.

    미묘한 얼굴로 도리를 쳐다보자 그녀가 변명처럼 입을 열었다.

    “그, 죄송해요. 사생활을 들추려던 건 아니에요, 죄송해요. 그러려고 오신 게 아닐 텐데.”

    “그냥 심심해서 왔어요. 운드 자작 영애도 마침 심심해 보이시길래요.”

    “정말요? 저는 틀림없이 아이린의 이야길 물어보러 오셨다고 생각했는데!”

    다람쥐 같은 얼굴에서 그야말로 말이 쏟아졌다.

    느낌상으로는 문장에서 띄어쓰기를 다 빼 버려야 할 것처럼 빠른 호흡이었다.

    말을 다 내뱉은 즉시 도리가 돌처럼 굳어 버린 것까지, 꼭 희극 같았다.

    나는 조금 재미있어져서 물었다.

    “아이린이 누군데요?”

    “아, 그, 제 친구인데요, 그게…….”

    “왜 그렇게 당황하세요.”

    그 친구가 누구길래.

    그렇게 물어보려던 찰나에 시종장이 그 이름을 높게 호명했다.

    그러나 ‘아이린’은 혼자 들어오는 게 아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듯이, 그곳엔 하늘색 머리칼을 한 장신의 사내가 서 있었다.

    화려한 연미복 차림과 그에 밀리지 않을 만큼 눈에 띄는 얼굴, 틀림없이 크루엘로다.

    그의 뒤쪽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

    금발을 곱게 기르고 녹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얼굴은 조금 비가를 닮은 듯했다.

    두 사람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것만 봐도 따로따로 들어온 건 아닌 듯했다.

    예상치 못한 이 상황이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야, 크루엘로가 얼굴도 내비치지 못할 만큼 바쁘다고 한들, 궁정 무도회에 참석하는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았다.

    황후의 탄일을 기념하는 무도회니 뭐, 올 수도 있지.

    나한테 굳이 무도회장에 온다고 말하지 않은 것도 그럴 만했다.

    바빴으니까, 그리고 그가 내 부하도 아니었으니까.

    뭔가 여자랑 둘이 서 있는 걸 처음 보는 것 같긴 하지만, 음.

    멍하니 눈을 깜박이는데 사람들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귓바퀴를 감아 들어왔다.

    “어머나, 레이디 아이린 아니에요? 수도원에서 나오셨다는 소문이 진짜였나 봐요.”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공작전하랑 같이 들어오셨잖아요! 모양새로 보아 파트너 같은데.”

    “저 레이디께서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셨죠? 그러고 보니 지금 약혼자가 없으실 텐데요.”

    “쉿! 말조심해요. 근처에 페불라 백작이 있는 걸 잊으셨습니까?”

    수도원.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

    그리고 뒤이어진 말들.

    퍼즐 조각처럼 그 단어들이 짜 맞추어진다.

    슬쩍 고개를 틀자, 사색이 된 도리 운드가 보였다.

    “저분이 운드 자작 영애의 친구분이로군요. 저분을 기다리고 계셨나 봐요.”

    “그, 네.”

    “친구분이 화이트데저트 공작전하의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 약혼녀신가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