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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49화 (149/162)

149화

그 꿈을 꾸는 게 좋아해서라고?

남들이 들으면 그렇게 오해해 버리는구나.

나는 당황해 눈을 끔벅이다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건 아니래!”

아차.

나도 모르게 소리가 튀어 올랐다.

가보트가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쳐다보기에, 나는 서둘러 표정을 가다듬었다.

“뭐야, 왜 소리를 질러.”

“아니,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말했거든. 그런데 데이디어 경은 죽어도 아니라잖아. 생각하니까 속이 터져서.”

그렇게 말하고는 답답한 속을 가라앉힌다는 듯이 잔을 기울였다.

내 완벽한 임기응변에 가보트는 손쉽게 속아 넘어갔다.

“데이디어가 그렇게까지 부정해? 극단적인 부정은 극단적인 긍정이라던데.”

“…….”

“어쨌거나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

그는 이 화제에 관심이 없다는 티를 팍팍 내며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아니면 뭔데?”

“그냥 생리적인 반응 아니야? 성인이잖아.”

오!

당연한 듯하면서도 내가 예상할 수는 없었던 선택지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난 성직자였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라고 해도 무방하니, 음.

나는 경우의 수를 정리해 봤다.

그의 의견대로라면 이렇다.

매일 입 맞추는 꿈을 꾸는 건 상대방을 좋아하기 때문이거나 혹은 단순한 생리 현상 때문이다.

상대방을 좋아하면 누군가를 질투하게 된다.

나는 크루엘로를 상대로 질투해 본 적이 없다.

고로 내 꿈은 단순한 생리 현상이다!

깔끔해! 하지만 징그러워!

절로 눈가가 일그러졌다.

“그쪽이 더 찝찝해.”

“그러게, 데이디어는 왜 너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냐.”

“……뭐. 할 사람이 어지간히도 없었나 보지.”

“그냥 운동이나 열심히 하라고 해, 아니면 야한 책이라도 보든가.”

앗.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가보트가 해결책을 제시했다.

나는 머릿속에 두 가지를 메모하다가 아차 싶어 고개를 들었다.

“가보트의 인생 작품 베스트 다섯 권만 추천해 줄래?”

아쉽게도 추천 리스트는 얻을 수 없었다.

언제 심드렁했냐는 듯, 얼굴이 새빨개진 가보트가 쿠션을 집어 던졌으니까.

참 나. 요즘 애들은 이해할 수가 없어.

그러나 리스트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내 손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저녁까지 기다렸다가 미뉴엣과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말이다.

“세상에 사랑 같은 건 없어. 그냥 인간의 번식 욕구가 만들어 낸 환상일 뿐이야.”

“무슨 소리야, 미뉴엣. 그러면 연인 간의 감정적 교류도 착각이라고?”

“그건 친지, 동료, 가족 등 인간관계에서 누리는 친교와 다를 바 없어. 성애로만 생기는 특별한 감정 교류가 있다고 믿니, 바티?”

연애 소설 애독자인 가보트는 납득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논리적으로 반박하지도 못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들은 말을 정리했다.

“그러면 미뉴엣, 네 말은 에로스란 결국 친구 관계에 번식 욕구가 끼어든 거란 말이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아니야.”

가보트가 울적한 목소리로 부정했지만, 식사 자리의 누구도 그에게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자식이 필요한 때가 아니라면, 그런 건 생각할 가치도 없어.”

“음, 음. 그러면 역시 운동이나 하라고 전해 줘야겠다.”

“관심 있으면 관련 도서를 몇 개 챙겨 줄게. 어떻게든 욕구만 해소하면 그런 꿈은 꿀 일이 없을 테니까.”

“미뉴엣, 그런 쪽으로 잘 알아?”

“나는 몰라도 자료는 알겠지. 도서 판매량만 들여다봐도 뻔히 나오는걸.”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담백하게 하기도 힘들 텐데.

어쨌거나 뜻밖의 도움을 나는 사양하지 않았고, 빨간 딱지가 붙은 책을 몰래 숨겨 백작저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귀가한 소감이란……!

“어흑흑!”

자괴감이 든다.

기껏 세계까지 구했는데 내가 왜 이런 짓까지 해야 하는지.

인생이 나한테 너무했다.

***

나는 겉옷 안쪽에 꾸역꾸역 숨겨 온 책들을 침대 위에 펼쳤다.

아직 백작으로서의 체면을 잃고 싶지 않았기에 조심해야 했다.

그렇기에 나는 하룻밤 새 이 책들을 다 해치우기로 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진 몰라도 하루 이틀쯤 잠을 자지 않아도 멀쩡한 몸이었으니까.

“좋아.”

나는 퍽 비장하게 첫 장을 넘겼다.

솔직히 말해, 이런 류의 책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페불라는 명색이 이야기의 신이었기에 도서관엔 별의별 책이 다 있었다.

그저 내가 열심히 읽은 적이 없을 뿐이다.

아버지께서 불건전 도서라며 숨겨 두셨기에 호기심에 몰래 들여다봤을 때를 제외하고는, 겉장도 펴 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신전에 내 또래는 없었고 심지어 개중 절반 이상이 피가 통하는 친척이었다.

억지로 로맨스를 꿈꾸기엔 무리가 있는 환경이 아닌가.

신전의 특성상, 언제나 흘러넘치는 성력 덕분도 있어서 그런 관심은 자연스럽게 사그라들었다.

다시 읽는 지금도, 솔직히 의학 도서를 보는 느낌이었다.

이런 게 정말 재미있나?

의아해하면서도 나는 속독으로 쌓여 있는 책 더미를 모조리 해치우고, 다 태워 증거까지 인멸한 뒤에 잠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

“큰일 났다.”

더 악화된 상황을 맞이했다.

이게 말이 돼?

머릿속에 둥실둥실 떠다니던 활자들. 그래, 그 글자 쪼가리들이 오감을 입고 현실처럼 피어났다.

내가 이렇게 상상력이 좋았다고?

뭐든 잘하는 건 알았지만, 설마 이런 것까지…….

“악!”

순간적으로 꿈의 잔상이 스쳐 지나가 나는 비명을 질렀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곧장 무릎을 꿇었다.

두 눈을 감고 양손을 모은 채 페불라 8계명을 몇 번이나 외웠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페불라시여, 혹시 저를 가지고 놀고 계신다면 창문을 세 번 두드려 주세요.

창문 두드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미끄러지듯 매트리스에 엎어져 후회했다.

“가보트의 제안을 들은 내가 바보였어.”

어쩌지, 어쩌지.

이쯤 되면 나는 꿈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수준이 아닐까?

태어나 느껴 본 적 없는 범주의 죄책감으로 얼굴에 피가 몰렸다.

나는 머리를 끌어안고 한참을 고민했다.

“……주문을 만들까?”

기억을 지워 버리는 고유 주문을 만들어 버리는 거다.

이를테면 14주문으로 리메이크라든가, 그런 걸 만들어서 내 기억을 지우고 없었던 일로 만들면!

“될 리가 없지.”

나는 눈물을 참으며, 종을 울려 사용인을 불렀다.

숨이 넘어갈 때까지 뜀박질을 하면 어떻게든 결과가 나오겠지.

내 꿈이 죽든, 내가 죽든.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거의 야생마 같은 삶을 살았다.

적어도 한 번쯤은 가보트가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

내 저택에 틀어박힌 지도 어언 일주일.

오늘은 모처럼 만의 외출 날이었다.

황후의 탄일을 기념하여 또 궁정 무도회가 열린단다.

작위를 받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기에 나는 툴툴거리면서도 양심껏 저택 밖으로 나왔다.

사용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고개를 들자, 함께 가기로 약속한 보네티 남매가 보였다.

내가 나온 걸 보고 다가오던 청년이 무심코 입을 벌렸다.

“너, 꼴이 왜 이러냐.”

가보트는 툭 내뱉었다가 아차 싶었는지 제 입을 틀어막았다.

실수했다는 듯이 구는 태도 때문에, 그 말이 더 진심으로 들렸다.

나는 부루퉁하게 되물었다.

“내가 뭐.”

“아파 보이는데 어디 안 좋냐?”

“멀쩡한데 무슨 소리람.”

나는 가보트를 지나쳐 걸으며 미뉴엣에게 인사했다.

그가 내 뒤로 따라붙으며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 공작이 자리를 비웠다던데 설마 그것 때문은 아니겠지?”

“아니, 크루엘로는 없는 편이 나아.”

왜 저렇게 틈만 나면 나와 크루엘로를 엮으려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대답은 순도 100%의 진심이었다.

꿈이 한층 더 지독해진 상황에서 크루엘로가 있어 봐야 나만 괴롭지.

안 그래도 그가 돌아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상상만으로 오금이 저린 판인데 무슨.

“이쪽 마차에 타, 라스티.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사람이 겨우 셋인데 왜 마차를 두 대나 가져왔나 했더니만 이유가 있던 모양이다.

다른 때였으면 호기심을 느끼든 긴장하든 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력도 없다.

나는 털레털레 걸어 미뉴엣의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곧 달리기 시작했다.

“네가 보내 준 선물은 잘 받았어, 라스티.”

“어? 그러고 보니 하고 왔구나!”

미뉴엣의 목에 최상급 에메랄드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보석에 대해 아는 게 없었지만, 아무튼 비싸 보였고 그녀의 길고 우아한 목선과 잘 어울렸다.

선물로 보내기는 했으나 그녀가 착용한 걸 보기는 처음이었다.

미뉴엣은 가보트의 엉성한 일 처리를 수습하느라 몹시도 바빴고, 덕분에 보네티 백작의 생일 파티 같은 건 열리지 않았으니까.

주머니 사정에 제법 여유가 있어 아끼지 않았더니 과연 돈 값을 한다.

뿌듯해서 어깨가 솟구쳤다.

“사실, 선물은 이미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받았다니 뭐를? 설마 백작부인 이야기를 하려는 건─.”

“네가 돌아와 준 것 자체가 선물이지.”

어라.

미뉴엣이 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말에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내 눈앞에 있는 게 미뉴엣이 아니라 크루엘로인가?

혹시나 해 미뉴엣을 빤히 들여다보자,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라스티.”

“……놀린 거지?”

“그래서 공작한테 마음이 생긴 건가.”

“뜬금없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대체.”

“네가 말했던 그 재밌는 꿈 말이야. 유감스럽게도 나는 가보트만큼 둔하지는 않아서.”

순간적으로 말문이 틀어 막혔다.

미뉴엣이라면 그 꿈을 꾼 게 나라는 걸 알아차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발뺌할까 했으나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나는 고개만 돌렸다.

칫.

체력이 빠져서 그런지, 상대가 미뉴엣이라 그런지 생각만큼 부끄럽지는 않았다.

“보아하니 저번의 책은 도움이 안 된 것 같네.”

“최악의 조언이었어. 상태가 더 나빠지기만 했단 말이야.”

“공작을 좋아해?”

“미─뉴─엣.”

“네 그 ‘말 못 할 사정’이란 건 끝났잖아. 공작이랑 더 어울릴 필요도 없을 텐데 자꾸 엮이니까 아무래도 수상한 생각이 드네.”

“꿈을 내가 조절해서 꿀 수 있다면 네 말이 맞을 거야, 언니.”

“꿈이 아니면. 아니, 꿈 때문에라도 공작과 더는 상종하지 않아야겠다고 결론 내린 건 아니잖아.”

당연한 거 아냐?

그런 이유로 크루엘로를 멀리하면, 틀림없이 세계에서 제일 수치스러운 절교로 기록될 것이다.

그런 합리적인 이유로 입을 다물자, 미뉴엣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았다.

“네가 입적에 동의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공작 때문이야?”

“아닌데, 잘못 짚었는데, 크루엘로는 괜찮다고 했는데.”

“그러면 전혀 관련이 없다고?”

“…….”

음, 관련이 아예 없진 않나?

조금은, 있나?

안 그래도 상태가 별로인데 다투는 꼴을 굳이 보고 싶지 않기도 하고…….

미뉴엣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팔짱을 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네가 그 남자랑 더 엮이지 않으면 좋겠어.”

“미뉴─.”

“일단 들어.”

“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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