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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48화 (148/162)

148화

데이디어의 말에 흠칫했으나, 차라리 먼저 알아차리고 물어봐 주는 편이 나았다.

그녀는 ‘용건만 깔끔히’가 생활화된 사람이었다.

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가 버리면, 손해 보는 건 나뿐이니.

나는 슬쩍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래 보여요?”

“예, 성물에도 별 관심이 없으신 걸 보니 다른 근심거리가 있으신 듯합니다.”

음.

성물은 마음이 여유로울 때 봤어도, 딱 이 정도 호기심만 느꼈을 것이다.

교단이 오늘내일하는 상황이니 아무래도 그렇지.

이게 기념품 이상의 가치가 있나?

잠깐 불경한 생각을 해 보았다.

“혹 궁정 무도회에서의 일로 다투셨습니까? 윌리엄 래버린스 경 말입니다.”

새까맣게 잊고 있던 이름에 어리둥절해 나는 눈을 깜박였다.

“싸우다니요? 제가요? 누구랑?”

“화이트데저트 공작전하와……. 아닙니까?”

“싸울 일 자체가 없었는데요.”

“전하께서 질투하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발코니로 자리를 옮기신 줄 알았는데, 제 착각이었나 보군요.”

내가 크루엘로를 발코니로 데려간 건, 그가 래버린스 경에게 보복을 가하고도 그 이름을 곱씹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루엘로가 복수할 거라고 생각한 근거도 질투가 아니었다.

“대놓고 험담을 들었잖아요. 워낙 뒤끝이 기니까 신경 쓰여서 말해 둔 것뿐이에요.”

“하기야 그럴 수도 있겠군요.”

“애당초 질투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내가 래버린스 경이랑 뭘 어쨌다고.”

“고백을 받지 않으셨습니까?”

“에이, 그거야 그냥 헛소리고요. 누가 그런 말을 진지하게 들어요?”

상식적인 발언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데이디어는 의외로 수긍하지 않았다.

그녀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백작님께서는 질투해 보신 적이 없습니까?”

“없는데요.”

“죄송합니다. 공작전하와 서로 사랑하시는 사이라고 오해했습니다.”

“사랑은 해요. 그런데 그런 의미의 사랑이 아닐 뿐이에요. 우정? 가족애? 그런 것도 사랑이잖아요.”

어쩌다 이런 이야기로 흘러와 버린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꽤나 진지하게 답을 이어 갔다.

“그렇습니까.”

“솔직히 사랑의 종류를 왜 나누는지 그 차이를 잘 모르겠어요. 구태여 끌어안고 입을 맞추지…… 않아도…….”

잠깐만.

한창 잘난 듯 떠들어 대던 입이 달라붙었다.

내 최근의 고민이 접착제 역할을 했다.

밤마다 키스하는 꿈을 꾸는 주제에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

그래도 깨어 있는 내가 크루엘로를 어쩌고 싶은 건 아니잖아?

원해서 꾸는 꿈도 아니거니와 애당초 크루엘로가 입만 맞추지 않았어도 상상도 못 해 봤을 일이다.

그러나 억울함을 토로한다고 해결될 일이었으면, 지금 데이디어와 마주 앉아 이런 고민을 하지도 않았겠지.

“안색이 안 좋아지셨습니다.”

“착각일 거예요.”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어쭙잖은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물었다.

“데이디어, 사랑이 뭐예요?”

“예?”

아직 들고 있는 자존심이 있는가 보다.

나는 용기 내어, 좀 더 구체적인 질문을 꺼냈다.

“줄리안이랑 키스하는 꿈 꿔 봤어요?”

“예?”

데이디어의 ‘예?’ 소리가 두 옥타브 올라갔다.

너무 노골적이었나 후회가 일었지만, 나는 후퇴하지 않았다.

남은 건 전진뿐!

“그러니까 줄리안이랑 연인으로 마음이 통한 사이잖아요. 그러니까 혹 야한 꿈을─.”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예, 줄리안과는 친구일 뿐입니다.”

어라.

혹시 부끄러워서 발뺌하려는 건가 싶어, 나는 눈가를 찡그리고 물었다.

“친구 사이인데 지은 죄를 모른 척해 준다고요?”

“백작님께서는 공작전하의 죄를 고발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러면, ‘진달래를 데리고 있다.’는 쪽지에 눈에 불을 켜고 쫓아온 건 뭔데요?”

“백작님께서 주문을 겹겹이 두르고 호수로 들어가신 건 뭡니까?”

나는 충격적인 깨달음을 얻었다.

남들 눈엔 나와 크루엘로도 그렇게 보이겠구나!

그리고 그건 데이디어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오해를 받는다는 게 이토록 당황스러운 기분이군요. 실례했습니다, 백작님.”

“줄리안의 생각은 데이디어와 다를 수도 있어요. 각오해 둬요.”

“공작전하께서는 백작님을 그런 의미로 좋아하십니까?”

“……네.”

“그래도 제가 아예 헛다리를 짚은 건 아니었군요.”

“그러니 줄리안에게 면회 갈 일 있으시면 한 번쯤 확인해 보세요. 눈치 좋으시잖아요.”

“알겠습니다, 그럴 리가 없지만요.”

이런 방면에서는 곰이구나.

데이디어가 부정하는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가, 지레 찔려서 흠칫했다.

다른 사람들도 나를 이렇게 봤던 건 아니겠지?

아니지, 나는 크루엘로가 나를 좋아하는 ‘척’할 거라고 들었으니까 눈치채지 못한 게 당연하다.

그 ‘척’이 진짜가 되어 버린 게 문제였지만.

“그러면 이만 가 보겠습니다.”

데이디어는 복잡미묘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고민을 다 털어놓지 않았으나 그녀를 붙잡지는 않았다.

줄리안이 자기를 좋아하는 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무슨 얘길 더 하겠는가.

페불라께서 그릇된 사람을 보내셨다.

그녀는 응접실 문을 나서려다가 문득 몸을 틀었다.

“그런 꿈을 꾸는 게 그리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제가 꾼 적은 없지만요.”

“내 이야기 아닌데요.”

“알고 있습니다. 분명 친구분의 이야기겠지요.”

“…….”

진짜, 안 내키는 방면으로만 눈치가 빨라.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데이디어를 노려봤다.

그녀가 설핏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아카데미에 다닐 적, 가보트가 종종 연애 소설을 읽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엥, 가보트가요?”

“예, 소설을 좋아해서 가리지 않고 읽는다고 했습니다.”

데이디어는 도움이 될지 말지도 긴가민가한 정보를 던져두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럼, 진짜로 가 보겠습니다.”

***

그리고 나는, 그 도움이 될지 말지도 긴가민가한 정보라도 필요한 사람이었다.

보네티 백작저의 응접실.

은발의 청년은 내 맞은편에 앉아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이 눈을 깜박였다.

“한동안 연락도 없더니 갑자기 찾아와서는 뭐?”

“가보트한테 사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지.”

“누가 다시 말해 달라고 했냐.”

떨떠름하게 중얼거린 가보트는 차 한 모금을 머금었다.

“갑자기 뭐에 꽂힌 거야?”

“아니, 그냥. 윌리엄 래버린스가 나한테 고백했었잖아.”

“아, 이번에 방출된 놈?”

“방출?”

“하여간, 공작도 진짜 징그러운 인간이야. 어쩌면 그렇게 하나하나 놓치는 거 없이 다 짓밟아 놓는 건지.”

“크루엘로가 무슨 짓 했어?”

“몰랐냐? 윌리엄 래버린스 말이야, 뇌물 받고 종자 받은 게 들통나서 기사단에서 쫓겨났잖아.”

동시에, 나는 크루엘로가 자리를 비우기 직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제일 먼저 축하해 주고 싶었는데 당분간은 일이 있어서 그러긴 힘들겠네. 자리를 좀 비울 거야.”

그 당분간 할 일이라는 게 설마 애먼 사람 괴롭히기는 아니겠지?

남의 비리를 캐는 게 취미요, 협박하는 게 특기인 친구라 몹시 가슴이 떨렸다.

나는 조마조마한 채 물었다.

“없는 죄를 만들어 낸 건…… 아니지?”

“그런 쪽으론 깔끔하다더라. 그래서 더 재수 없지만.”

나는 가보트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됐어.

누명을 씌운 게 아니라면야 무조건 죄지은 놈이 잘못한 거다.

“넌 한숨이 나오냐? 너한테 좋아한다, 소리를 하자마자 그 꼴이 났는데 징그럽지도 않아?”

“엥? 누명이 아니면 사회 고발인데 그게 왜?”

“앞으로 다른 남자랑 연애 한 번 못 할 텐데 ‘그게 왜’?”

“난 딱히 그런 쪽으로는 관심 없어.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해, 불행이라고 해야 해.”

가보트가 미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는 무미건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가 문득 데이디어가 한 말을 떠올리고 물었다.

“가보트. 너도 그게, 크루엘로가 질투 때문에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해?”

“뭐? 그게 아니면 뭐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워낙 뒤끝이 기니까─.”

“잠깐만, 라스티.”

가보트는 내 말을 자르더니 가느스름하게 눈가를 좁혔다.

“너 설마 나한테 연애 상담하러 온 건 아니지?”

그 말에 나는 괜히 뜨끔했다.

연애 상담은 아니지만, 그 계보가 약간 비슷하긴 했으니까.

그러나 가보트에게 꿈 이야기를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내가 미쳤다고 그 창피한 걸 입에 담아 약점을 만들겠는가.

나는 다급하되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비슷해, 내 상담은 아니지만.”

“뭔 소리야.”

“실은 어제 백작저에 데이디어 경이 찾아왔었어. 네가 아카데미 다닐 때 연애 소설을 많이 읽었다고 하던데.”

“뭐?”

당황했는지 가보트의 두 눈이 커졌다.

“걔는 말을 왜 그렇게 하냐. 그냥 안 가리고 본 건데 허 참. 너한테 그런 말까지 해?”

“그냥 나온 말은 아니고 실은, 너한테 뭘 좀 대신 물어봐 달라고 했거든.”

나는 찻물과 함께 마른침을 자연스럽게 삼켰다.

전에 그에게 고민 상담을 한 적이 있어서 안다.

가보트에게도 최소한의 눈치는 있어서, ‘이건 내가 아는 사람 이야긴데.’라는 화두에는 속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아는 사람’의 이름을 특정해 버리면 가보트의 눈치쯤은 파훼할 수 있었다.

데이디어에게는 조오금 미안한 일이었지만, 어차피 모를 텐데 뭐.

가보트 성격에 그녀에게 찾아가서 ‘너 그런 꿈을 꾼다며!’라고 놀릴 리가 있나.

이건 모두에게 이로운 방식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내 말을 믿는 기색이었다.

“데이디어 경이 요즘 밤마다 줄리안을 상대로 야한 꿈을 꾼다는 거야.”

“……걘 너한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렇게까지 친했냐?”

“아니, 뭐, 엄청난 건 아니고 키스 정도야.”

나도 모르게 변명 같은 말이 덧붙었다.

가보트의 눈매가 살짝 누그러졌다.

“왜 그러는 걸까, 고민하던데 가보트 너는 왜 그렇다고 생각해?”

“남자로 좋아하나 보지.”

그가 심드렁한 투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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