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크루엘로의 목소리에는 인내심으로 감정을 억누르는 티가 났다.
급격히 달라진 분위기가 당황스럽다.
눈을 깜박이는 때, 난간에서 몸을 뗀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왜 나를 피해?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어?”
“무슨 소리야. 그랬으면 네 저택에서 신세 지지도 않았겠지.”
“그러면 뭔데.”
조금 고개를 들어 보니, 뒤틀린 입매가 눈에 들어왔다.
화났구나.
그럴 만했지.
나라도 크루엘로가 내 눈을 안 마주치고 살금살금 피하면 화가 났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서도 그 입술이 더 잘 보였다는 것이다.
정말로 문란해지는 저주에 걸린 건가.
나는 차라리 울고 싶어졌다.
페불라시여, 아직 세상에 남아 계신다면 제 번뇌를 지워 주소서.
안 된다면 최소한 그 거지 같은 꿈이라도 틀어막아 주소서, 제발.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보네티 입적 건 때문도 아니면. 그러면 내 존재 자체가 네게 문제가 된 거야?”
“크루엘로!”
단번에 내 뇌를 씻어 내는 듯한 빈정거림이었다.
소리치며 나는 고개를 들었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나는 크루엘로가 내 생각보다 이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침에 느꼈던 살기가 착각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를 향한 게 아니라는 건 명백했으나, 그럼에도 그는 들끓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덩달아 휩쓸렸다간 좋을 게 없다.
나는 애써 침착하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너는 조금도 문제 될 게 없어. 그냥 개인적인 문제야. 네가 아니라 내가 잘못된 거라고.”
“너한텐 아직도 비밀이 있구나. 다 털어 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내 사정을, 비밀이라고 포장하는 건 아무래도 과하다.
그러나 크루엘로는 진지했고 오해를 풀기 위해선 없는 비밀도 털어놔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너랑 매일 키스하는 꿈을 꾸거든. 아마 오늘 밤에도 꿀걸? 하도 많이 꿔서 이제 짐작도 할 수 있게 됐어. 보나마나 무도회장이나 발코니에서 네가 키스하는 꿈을 꾸겠지. 상상하니까 죄지은 기분이 들어서 네 얼굴을 똑바로 보기가 좀 그래.’
세상에 이런 걸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
그것도 이렇게 진지한 상황에서 털어놓을 만한 배짱이 존재하기는 하는 거야?
나는 결국 말을 돌렸다.
“살아가는 덴 비밀이 필요한 거야.”
그러나 적당히 내뱉으면서도, 더는 이 일을 내버려 둘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오늘 저택으로 돌아가면 편지를 쓰자.
얼굴이 터질 것처럼 창피하겠지만, 편지를 남긴 다음 어디로든 도망치면 시간이 전부 해결해줄 것이다.
내 말에 실망했는지 크루엘로는 한동안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았다.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나는 입을 열었다.
“있잖아, 크루엘로. 오늘─.”
“내일 중, 페불라 백작저의 정비를 마친다며.”
내 저택인데 왜 네가 더 잘 알아?
의아했으나 곧 그 말의 본의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화이트데저트에서 나가라는 말인가?
그야 내 집이 생기는데 남의 집에서 뭉개고 있는 것도 이상했지만…….
나는 어리벙벙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먼저 축하해 주고 싶었는데 당분간은 일이 있어서 그러긴 힘들겠네. 자리를 좀 비울 거야.”
“어……. 그래.”
“네가 말한 개인적인 사정 말이야, 내가 돌아올 때까진 정리되면 좋겠네.”
그는 내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리고 웃었다.
그럼에도 두 눈에 서린 어둑한 감정은 지워지지 않았다.
“부탁할게, 라스티.”
***
크루엘로의 말대로 그 이튿날, 황제에게 하사받은 대저택이 정비를 마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연락을 들은 직후, 나는 마차에 올랐다.
크루엘로는 무도회장에서의 말을 마지막으로 그대로 사라졌기에 나를 배웅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조오금 서운했다, 아주 조금.
수도 한복판에 있는 대저택은 상당히 컸다.
화이트데저트 공작저만큼은 아니라도 보네티 백작저 정도는 되어 보이는 크기다.
아직 확인해 보지는 않았으나 저 안도 가득 차 있다고 들었다.
황제의 하사품이니 그냥 건네기엔 체면이 안 산다는 거겠지.
심지어는 백 명에 가까운 사용인들도 이미 고용된 채였다.
맨몸으로 마차에서 내린 순간, 그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허리를 구부렸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첫날이라고 모두 나왔나 본데,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물론 나는 대단한 사람이 맞긴 했지만.
가장 선두에 있던 정장 차림의 여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백작님. 집사장인 버베나입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녀의 안내를 받으며 나는 안으로 들어섰다.
역시나 저택은 그 외관만큼 내부도 화려했다.
서랍에 금장식을 하고 보석을 박는 이유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이게 다 돈이라고 생각하면 성직자다운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전부 내 거다.
버베나의 안내대로 저택을 구경하고, 사람들을 소개받으니 금세 해가 저물었다.
진짜 내 몸으로 왔기에 다행이지 시오라였다면 세 번은 기절했을 것이다.
나는 서재 의자에 앉았다.
쉬고 싶었으나 급하게 해결할 문제가 있었기에 조금 더 고생하기로 했다.
“서신을 쓰려고 하는데 준비해 줄래.”
“예, 백작님.”
바야흐로 인내와 고통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말해 두는데 꿈이란 건 말이야, 현실이 아니란 뜻이야. 그러니까 내가 내 꿈에서 너한테 뭘 하든…….」
와작.
「크루엘로, 고백할 게 있어. 이상한 오해를 살까 봐 말을 안 했는데, 이게 다 너 때문이거든. 왜 있잖아, 그날 네가 나한테 키…….」
와작.
「꿈이란 뭘까? 어떤 사람들은 그걸 욕망의 발현이라고 말하던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
와작!
막, 63번째 편지가 구겨졌다.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며, 벽난로에 막 구긴 종이를 던져 넣었다.
말로 내뱉는 것만큼 창피하지야 않겠지만 글로 내 사정을 설명하는 데는 다른 문제가 있었다.
“개수작 부리는 연애편지 같아, 어흑흑.”
나는 책상에 엎어져 울었다.
고상하게 돌려 말하려고 애를 쓸수록 그렇다.
상대방은 관심도 없는데 나 혼자만 들떠서 들이대는, 눈치 없는 인간이 된 것 같다.
연애 감정으로 고백한 사람은 크루엘로인데도 불구하고 그깟 꿈 때문에!
“상식적으로 이게 말이 돼?”
근본적인 의문이 치솟았다.
진짜로 저주에 걸린 것도 아닌데 매일, 심지어는 크루엘로가 자리를 비운 밤에도 그딴 꿈을 꾸는 게 말이 되냐고!
예로부터 성직자의 기이한 꿈에는 신의 손길이 닿아 있다고 했다.
아무리 그래도 내 신이 내게 매일 음란물을 보여 줄 정도로 타락했다고 믿고 싶지는 않았으나, 이쯤 되면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페불라시여, 나와 보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꾸는 꿈에 인위적인 손길이 닿아 있는 것 같은데 말이에요.”
탕탕, 나는 엎어진 채 노크하듯 책상을 두드렸다.
“이거 아무래도 전에 말씀하셨던 거랑 같은 맥락이잖아요.”
“그러면 다른 계시는 뭐였던 거예요?”
[그건 통 이야기의 진전이 없으니 등을 떠민 거였어. 마냥 기다려 주기엔 내 시간이 오래 남지 않았으니까.]
속이 터지니까 등을 떠미시는 게 틀림없다.
설마 이걸 연애 조언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
혹시 몰라, 손끝에 성력을 모아 보기도 했다.
언제나 그랬듯 성결한 빛은 멀쩡하게 터져 나왔다.
이거 봐, 이거!
“아직 소멸 안 하셨잖아요. 인간적으로, 아니 신적으로 해명을 좀 하러 와 보세요. 우리 얼굴도 텄는데!”
돌아오지 않는 반응이 서럽다.
신의 권능을 넘겨받으면 뭐 하냐고.
내 꿈 하나 뜻대로 할 수가 없는데!
“그게 아니면, 같이 고민할 사람이라도 보내주시든가!”
그렇게 말한 직후, 누군가의 기척이 서재로 가까워졌다.
나는 합, 입을 다물고 반듯이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이 저택의 주인으로서 체면이 있지, 첫날부터 미치광이 취급을 받고 싶지는 않다.
자세를 가다듬은 직후 노크 소리가 들렸고 나는 우아하게 답했다.
“들어와.”
버베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데이디어 크림슨 경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안으로 모실까요?”
기껏 표정을 가꾼 보람도 없이 절로 얼굴이 찌그러졌다.
아, 페불라시여.
상담할 사람으로 보내 준 게 기껏해야 데이디어예요?
그런 이야기에 익숙할 것 같지는 않은데!
차라리, 차라리……. 음.
내 주변 인물을 생각해 보니 이런 문제를 상담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데이디어 정도면 괜찮지, 줄리안과 세기의 사랑을 하고 있으니까.
나는 경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접실이 어디더라?”
“축하드립니다, 백작님.”
데이디어가 내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품 안에 가득 차는 붉은 꽃, 음, 낭만적이다. 낭만이란 좋은 거지.
나는 만족하며 축하 선물을 받아 들었다.
“그냥 이름으로 불러요. 이제 와서 새삼.”
“작위도 없는 기사가 어찌.”
“엥, 없어요? 크림슨 공작가에 남아도는 작위가 한둘이 아닐 텐데.”
“지금은 계승할 생각이 없습니다. 후계 다툼에 끼어들기도 귀찮으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데이디어는 퍽 후련한 얼굴로 웃었다.
“드디어 줄리안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오.
“그걸 웃으면서 말씀하시네요.”
“내색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계속 신경 쓰였습니다. 자수하기로 결정해 놓고 차일피일 미루는 게 어쩐지 변명 같아서 말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만족하시지는 못하겠지만, 미네르바 후작가의 체면상 재판은 약식으로 진행됐고, 3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개인 재산은 모조리 황실에 몰수되었고 후계위도 박탈당했습니다.”
“음.”
“감옥에서 나오고도 향후 5년간은 다시 후계로 임명될 수 없을 겁니다.”
“어차피 외동이잖아요. 방계에 특출한 야심가가 있지 않는 한.”
“그건, 그렇습니다만.”
검은 뱀 교단 안에서만 깔짝거린 고위 귀족의 후계자.
그 신분 때문에라도 처벌이 약할 건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재판에서 내려진 형벌이라면, 굳이 간섭할 생각도 없었다.
바깥에서는 바깥의 법도를 따라야 한다.
그건 오래전부터 내가 정해 둔 룰이었다.
“그러면 그것 때문에 온 거예요?”
“축하를 드릴 겸, 소식을 알려 드릴 겸, 그리고 한 가지 물건을 전해 드릴 겸 왔습니다.”
물건?
그러며 데이디어가 건넨 건 양팔에 가득 찰 만큼 커다란 상자였다.
상자를 열어 보자 나온 건 금속 저울과 단검이었다.
그리고 그 물건들에선, 내가 아주 잘 아는 기운이 느껴졌다.
“페불라 신의 성물입니다.”
“……어.”
“소몬 후작에게 고대 교단의 성물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더군요. 교단을 조사하면서 발견했다고 들었습니다. 폐하께서 주인을 찾아 주라고 하시더군요.”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었다.
솔직히 우리 교단의 성물에 크게 관심은 없었으나, 막상 보니 기분이 또 이상했다.
나는 느리게 저울을 쓰다듬다가 아차 싶어 고개를 들었다.
“일단은 가져다주셔서 고마워요, 데이디어.”
“주인을 찾아갔을 뿐입니다.”
그런데.
“고민이 있어 보이시는 얼굴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