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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46화 (146/162)
  • 146화

    어라. 몬스터 독이 잘 어울리는 이 얼굴은…….

    “저, 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윌리엄 래버린스라고 합니다.”

    그래, 래버린스 경!

    독이 든 와인을 닦아 주느라 테이블보로 얼굴을 문댔더니, 내게 홀랑 반해 버린 그 기사였다.

    도리 운드의 티파티 때도 만났었지.

    여전히 숫기가 없어 보였고 얼굴이 새빨갰다.

    나는 선선히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래버린스 경.”

    “제, 가, 그러니까 말입니다, 제가 레이디, 아니 백작님께……. 그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하세요.”

    “알아주셨군요!”

    말을 과하게 더듬길래 물꼬를 터 줬더니, 안 그래도 붉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

    이쯤 되면 인간 토마토…….

    “호, 혹시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엥?

    삽시간에 무도회장 전체가 조용해진 건, 적어도 내 착각은 아닌 듯했다.

    그렇게 쩌렁쩌렁하게 외칠 건 뭐람.

    시선이 다 몰려 있었다.

    하기야 나라도 흥미진진하게 쳐다봤을 대사였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당사자인 지금으로서도 제법 재밌었다.

    요즘 부끄럼이 많아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그렇지만 바보가 되고 싶지는 않았기에, 일단은 확인차 물었다.

    “혹시 저를 창피하게 만드는 게 목적이신가요?”

    “……아닙니다.”

    자기도 그렇게 큰 소리를 내뱉을 줄은 몰랐는지, 래버린스 경은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수그렸다.

    가까이에서 술 냄새가 난다.

    어지간히도 마셨나 본데 술주정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재미없어졌다.

    “죄, 죄송합니다. 차근히 설명드려야 했는데…….”

    “일단은 대답하자면, 처음 보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만 좋아요.”

    “제가 좋다는 말씀입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들어 보겠다는 건데요.”

    “아……. 그러면 저쪽으로 좀.”

    창피 때문에 조금 술이 깨었는지, 뒤늦게 이성을 되찾은 기사가 나를 한구석으로 인도했다.

    걸음을 옮길수록 취기가 다시 도는지 그의 얼굴이 도로 비장해졌지만.

    재미있을 것 같아 따라가면서도 뒤통수가 뚫릴 것 같았다.

    안 봐도 알겠어, 이 시선은 분명 크루엘로다.

    왠지 애인 앞에서 바람을 피우는 기분인데, 나는 잠깐 즐기려는 것뿐이다.

    ……이 말이 더 이상하게 들리네?

    만취한 기사는 발코니를 찾으려 했지만, 비어 있는 곳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구석진 곳에 적당히 서서 입을 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 따라붙은 마당에 자리를 옮긴 게 의미가 있었을진 모르겠다.

    “본의 아니게 화이트데저트 공작전하와 말씀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혹, 전하께 좋아한다는 고백을 들으셨습니까?”

    “음.”

    “속지 마십시오!”

    이 사람, 감당되나?

    그런 의미를 담아 눈을 깜박였다.

    “직전까지만 해도 공작전하께 약혼녀가 한 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레이디 시오라 말입니다.”

    그거 나야.

    “달링, 허니, 온갖 달콤한 말로 그분을 꾀어냈지요. 수도 전체에 소문이 날 정도로 그 애정 공세가 지극했지만, 그조차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오…….”

    “그게 정말 사랑이었다면 어떻게 그분이 사라지자마자 백작님께 마음을 고백한단 말입니까!”

    동일인이니까?

    “사실 그것도 처음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무려 열 번의 약혼을 거쳐 오셨지만, 개중에서도 좀 더 집착하는 상대가 있었습니다.”

    “이를테면요?”

    “금발입니다.”

    “오호.”

    “첫 번째 약혼녀 때부터 금발에 대한 집착이 유구하셨죠. 오죽하면 상대가 죽고 나서는 모든 사람을 그분으로 보는 광증을 앓기도 하셨을까요.”

    그것도 나야.

    “약혼녀는 아니지만, 심지어 저택의 하녀와 진하게 어울렸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그 하녀도 금발이었는데.”

    혹시 알고 하는 소린가?

    신기하리만치 내 이전 몸들을 쏙쏙 골라내는 언행에 박수를 쳐 주고 싶었다.

    어쨌거나 래버린스 경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그러면 말씀하시려는 게 그런 거죠?”

    “예, 백작님.”

    “공작의 이상형은 금발이다? 저는 흑발이니 포기해라?”

    “……예?”

    “그러고 보니 래버린스 경도 금발이네요.”

    술에 취한 기사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깜박였다.

    놀리려고 꺼낸 말인데 반응이 심심하다.

    너무 취해서 머리가 안 도나 본데, 말이 안 통하니 재미가 없다.

    따분해 고개를 든 순간, 어느새 래버린스 경의 뒤에까지 다가온 사내가 보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더 놀라웠겠지만, 당연히 그는 크루엘로였다.

    황태자는 또 버림받은 건가.

    그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나한테 관심이 있는 사내가 있을 줄은 몰랐네요.’

    래버린스 경한테 건넨 농담을 크루엘로가 받았다.

    나는 픽 웃고 말았다.

    성격만 멀쩡했으면, 남자만으로도 마차 몇 대를 채울 수 있었을 텐데.

    “그, 게 아닙니다.”

    한참 뒤에야 래버린스 경이 입을 열었다.

    드디어 상황을 이해한 건지 기사는 억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요?”

    “제가, 제가 백작님께 첫눈에 반했습니다.”

    “오. 그래서 그게 무슨 상관이죠?”

    “백작님께서 더는 그분에게 농락당하지 않도록 돕고 싶습니다. 그분의 마수에서 백작님을 반드시─!”

    “마수?”

    갑작스럽게 끼어든 목소리에 기사는 사색이 되었다.

    퍽 불쌍한 꼴이었지만, 아니지, 솔직히 별로 불쌍하지도 않았다.

    주워들은 소문으로 남을 판단하고는, 반했답시고 처음 보는 이에게 그 험담을 늘어놓는 사람.

    그다지 가까이하고 싶은 부류는 아니다.

    크루엘로가 빙그레 웃었다.

    “전, 전, 전하?”

    “조금 전 하던 이야기가 궁금한데, 말해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군.”

    “그, 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런데 경, 크라바트에 불을 붙이고 다니면 어떡하나.”

    옷에 소스가 묻었다고 말하는 게 더 진지하겠다.

    그 가벼운 말이 예언이었던 것처럼 래버린스 경의 크라바트가 화르륵 불타올랐다.

    어, 어! 술이 확 깨 버린 기사가 당황하여 펄쩍 뛰어올랐다.

    “있어 보게. 그러다 화상을 입으면 어쩌려고.”

    크루엘로는 몹시도 평화로운 목소리로 말하곤 손가락을 까딱했다.

    근처에 서 있던 하인의 트레이에서 여섯 개의 와인 잔이 둥실 떠올랐다.

    잔들은 일제히 래버린스 경의 위로 날아오르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몸을 뒤집었다.

    촤아아, 색색의 액체가 쏟아져 가슴팍의 불을 껐다.

    성격 진짜 대단해.

    저 애가 어디 가서 당하고 다니지는 않겠다.

    나는 잠시간 어리고 순진했던 로이를 떠올리며 한탄했다.

    혹시 크루엘로도 중간부터 바꿔치기가 된 게 아닐까.

    “이런, 너무 늦었나 봐. 크라바트가 다 불타 버렸군.”

    “저, 저는 괜찮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

    “가만히.”

    크루엘로는 한사코 사양하는 래버린스 경의 말을 무시하고, 본인의 크라바트를 풀었다.

    기사의 목에 제 크라바트를 둘러 주는 모습은 일견 다정해 보였다.

    아니, 그 손등에 힘줄이 설 만큼 강하게 조이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목이 조금 눌리도록 크라바트를 당기고는 그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앞으론 좀, 조심하는 게 좋겠어. 아직 젊지 않나.”

    “예, 예. 죄, 죄송합니다, 공작전하.”

    “가 봐.”

    크루엘로가 놓아주자마자, 윌리엄 래버린스는 꽁지에 불이 붙은 듯 달아났다.

    실제로 불이 붙었던 건 가슴팍이지만.

    그 뒷모습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크루엘로가 제 셔츠 깃을 매만졌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투로 중얼거리기도 했다.

    “요즘 얌전히 살았나.”

    “아닐걸요, ‘얌전하다’의 사전적 정의가 바뀐 게 아니라면.”

    “하하, 그렇게 정색하기예요?”

    그는 웃으며 고개를 살짝 틀었다.

    그 각도 때문인지 크루엘로의 두 눈이 유독 음영 져 보였다.

    “방금, 윌리엄 래버린스였죠?”

    “이름을 왜 확인해요?”

    “음. 그냥……?”

    비상, 비상!

    나는 심상치 않은 기색을 감지했고, 그건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쪽을 흘금거리던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어쩐지 얌전하게 봐주시더라니.’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건은 터지기 전에 예방하는 것이 최선이다.

    난 크루엘로를 질질 끌고 가까운 발코니로 들어갔다.

    안에 사람이 있었지만, 크루엘로를 가리킨 순간 순순히 자리를 비워 주었다.

    안쪽에 그를 세워 두고 나는 촥, 커튼을 쳤다.

    그러고 나서 몸을 돌리자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는 사내가 보였다.

    “안 돼. 알지?”

    “음.”

    “죽을죄를 지은 건 아니잖아.”

    “그럴 생각 없었는데. 도대체 나를 어떻게 본 거야, 라스티?”

    앗. 할 말 없는 질문.

    나는 입을 다물었고, 크루엘로는 난간에 삐딱하게 기대어 섰다.

    “나는 충분히 매너를 지켰어. 옷에 붙은 불도 꺼 줬고.”

    “그 불을 네가 냈지만.”

    “불량한 복장 때문에 혹 가슴팍이 벌어질까, 내 크라바트를 빌려주기도 했고.”

    “목 조른 거 티 났어, 크루엘로.”

    “물론 내 성의가 조금 과했을 수는 있지. 다정하게 구는 일에 익숙지 않다 보니 미숙했을 뿐이야.”

    “손등에 힘줄 돋은 거 봤는데.”

    “아.”

    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보낸 크루엘로는 크라바트를 잃어버린 제 셔츠를 내려다보고는 문득 생각난 듯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네가 푹 파인 셔츠를 좋아했던가?”

    “내가 언!”

    ‘언제’라고 말하기 직전, 검은 뱀 교단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쪽은 별로 노출이 어울릴 것 같은 타입이 아니니 다른 걸 구해야겠어요.”

    “아닐걸. 몸에 자신 있어요.”

    “그럼 푹 파인 셔츠나 입든가!”

    기억력이 너무 뛰어난 것도 문제야.

    하지만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냥…… 단련된 육체라는 게 조금, 아주 조금 아름답다고 생각했을 뿐!

    더군다나 지금에 와서는.

    “취향이 바뀌었어. 목 끝까지 여며서 조금도 피부가 비치지 않는 복장이 좋아.”

    “음.”

    안 그래도 그렇고 그런 꿈을 꾸는 마당에, 크루엘로의 가슴팍이라도 봤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그런 꿈을 꿨다간 자진해서 감옥에 들어가야 할 판이다.

    생각하니 또다시 그와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워져서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틀었다.

    “……요즘 왜 그래?”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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