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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45화 (145/162)

145화

알고 있었구나!

나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하기야 크루엘로가 못 알아차리는 게 더 이상하지.

같은 저택에서 머무르며 삼시 세끼를 함께 먹는데, 아무리 내 행동이 은근했다고 해 봐야!

“대놓고 날 피해 다니던데, 라스티.”

“……그랬어?”

참.

시인하면 안 되지.

나는 다시 뻔뻔스럽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내가? 널? 피했다고?”

내 입으로 나오는 말을 듣고, 다시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싶어졌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날 본다면 하루에 세 시간만 재우면서 화술 교육을 시킬 게 분명하다.

황제한테 공로금을 받으면 다시 수업을 받아야겠다.

마침 수도에 있는 페불라 백작저도 곧 정비를 마친다니, 틀어박혀서 아무도 모르게 내 혀를 고쳐 놔야지.

“라스티.”

바로 옆에서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못 들은 척했다.

귀가 너무 뜨거웠다.

“오해하나 본데 네가 다시 보네티가 되고 싶다면 말릴 생각은 없어. 비록 내가 그 남매와 사사로운 감정이 좋지 않다고는 해도.”

“……그것 때문에 피한 거 아냐.”

미뉴엣에겐 미안했으나 솔직히 그 말을 들었던 것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애도 내 사정을 안다면 분명 이해해 줄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달린 문제였으니까.

그러나 크루엘로는 내 부정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냥 난, 이해할 수가 없는 거야. 네가 어째서…….”

“어째서?”

“…….”

그는 말을 끝맺지 않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루엘로?”

“생각해 보니까 시간이 없네. 준비해야지, 라스티.”

“무슨 준비?”

“잊어버렸어? 오늘 궁정 무도회가 열린다고 했잖아. 반역을 진압했으니 은연중 경고할 겸, 새로 백작이 된 너를 환영할 겸 해서.”

금시초문인데.

하지만 돌이켜 보니, 한창 정신이 없을 때 그중 몇 마디를 주워들은 것 같기도 했다.

“네 데뷔탕트 볼이 되겠네.”

“이젠 지겨워.”

그놈의 데뷔탕트 볼을 도대체 몇 번이나 치르는 건지 모르겠다.

그 화려한 행태가 신기했던 것도 한두 번이지.

또 온몸에 대검 무게를 펴 바를 생각을 하니까 벌써부터……. 잠깐만.

“그러면 네가 내 카발리에 역이야?”

“다른 사람을 섭외해 놓은 게 아니라면.”

“미뉴엣이 시오라 보네티의 사망 신고를 할 거라던데.”

“시체도 돌려주지 않았는데 재주가 좋네.”

“시체 너한테 있었어?”

“하하.”

“그거 내 선조 몸이야. 곱게 반납해야 해!”

“성대한 장례를 치러 줄게.”

“아무튼 내 말은, 네 열 번째 약혼녀가 죽었다는 소문이 수도 전역에 퍼져 있을걸.”

“평판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게 이럴 땐 장점이 되네.”

“내 평판은?”

“괜찮아, 라스티.”

그는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미친놈한테 가여운 여자 하나가 잘못 걸렸다고 생각할 테니까.”

“앗. 그거 진짜 그럴싸하다.”

“밖에선 다시 존댓말을 쓸게. 쓸데없이 말을 편하게 했다가 애먼 오해가 생기는 건 싫으니까.”

오해라면 어떤……?

크루엘로에게 캐물을까 하다가 나는 얕은 호기심을 삼켰다.

***

궁정 무도회가 열렸다.

늘 그렇듯, 무도회장을 가장 먼저 채운 건 하이에나 무리였다.

권력자한테 얼씬거리기를 좋아하는, 가문에서 내어놓은 망나니들.

하나둘 자리를 채우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은 가십거리를 떠들어 댔다.

최근, 충격적인 소식이 수도를 휩쓸었다.

다름 아닌 반역이었다.

황태자를 시해하려던 알베이 후작이 역모죄로 잡혀간 것이 불과 작년의 일.

이번엔 은근히 후작을 부추기던 그 중추, 리코드 대공과 그의 세력이 통째로 옥에 갇혔다.

그들은 군사를 이끌고 움직이려던 밤에 잡혔으며, 그 반역을 고발한 것이 출신도 모를 여자아이였다.

의문점이 잔뜩 섞인 놀라운 소식에 혀가 즐거운 건 당연했다.

“조심스럽지만 아무래도 반역을 제보한 건 화이트데저트 공작전하 같습니다.”

벌써부터 얼큰하게 취해 얼굴이 붉어진 사내가 떠들어 댔다.

위험한 주제라는 건 알았는지 무도회장의 한구석에 틀어박혀 작게 속삭였으나, 다른 이들의 시선은 이미 곱지 않았다.

“그렇잖습니까. 라스티라니,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평민 나부랭이가 반역 사실을 어떻게 알았으며, 또 어떻게 고발했단 말입니까.”

라스티가 고대 신의 사자라는 건 극소수만 아는 정보였기에 당연히 그들은 그녀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이야기는 그들 좋을 대로 흘러갔다.

“왜 아니겠어요. 그 ‘페불라 백작’이 화이트데저트 공작저에 머무르는 것만 봐도 뻔하죠.”

“애당초 반역을 일으키려던 것도 그분 아닙니까? 은근히 소문이 돌았잖아요.”

“공작전하께서 군부 인사들을 만나고 다녔다는 말이요.”

“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쏙 빠져나가다니, 허 참.”

“페불라 백작은 역시 공작의 정부겠지요?”

“말해 뭐 합니까. 레이디 시오라를 죽인 것도 새로 생긴 정부 때문이라는 소문이 수도에 자자한데.”

“하여튼, 아닌 척하면서도 색을─.”

그때 시종장이 두 사람을 호명했다.

그들이 안줏거리로 삼던 화이트데저트 공작과 페불라 백작이었다.

무리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다물고 자세를 정갈히 했다.

마치 그런 주제는 꺼낸 적도 없는 사람들 같았다.

그러나 무도회장에 들어선 공작은 그들을 향해 의미심장한 시선을 던졌다.

힉! 무리 중 한 사람이 제 입을 틀어막았다.

“눈, 눈을 마주친 것 같은데!”

“……착각이겠죠, 무도회장에 들어오기도 전이었는데 어떻게 들었겠어요.”

‘착각은 무슨.’

무리의 근처에 서 있던 윌리엄 래버린스─몬스터 독 파티 때 시오라에게 반했던 기사─는 대놓고 혀를 찼다.

저 미치광이 공작이 그토록 만만했다면 귀족들이 그렇게도 입조심을 했겠는가.

괜히 제국 제일의 마법사가 아니다.

오늘이 지나면 저 무리를 다시 볼 일도 없게 될 것이다.

알면서도 그는 그들에게 아무런 조언도 건네지 않았다.

그러나 이 한심한 무리가 떠들어 댄 말이 다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다름 아닌, 시오라 보네티에 대한 일은 윌리엄과 의견이 같았으니까.

‘틀림없이 공작이 죽였을 거야.’

여태까지의 화려한 전적만 봐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비틀거리며 근처를 지나던 하인에게서 또 한 잔의 와인을 건네받았다.

궁정 무도회니 자제하려고 했지만, 남몰래 짝사랑하던 이의 죽음을 잊기 위해선 술이 필요했다.

해소할 수 없는 분노를 취기로라도 억누르는 수밖에.

그리고 그때, 화이트데저트 공작의 뒤로 한 여자가 따라 들어왔다.

시종장이 함께 호명한 이름이 ‘페불라 백작’이었으니 아마도 그녀가 소문의 주인공일 터.

호기심에 얼굴을 확인한 순간.

“아.”

윌리엄은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에 빠졌다.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니.

마치 운명을 만난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무도회장에서 한둘이 아니었다는 건, 그에게 중요치 않았다.

***

크루엘로의 말대로였다.

모든 모욕은 마치 자석처럼 그에게 달라붙었다.

“……쩌다 공작의 눈에 띄…… 는.”

“레이…… 오라가 죽…… 얼마 안…… 않았어요?”

“그나저나 정말 보면서도 말이 안 되는 미인이네요.”

왜 마지막 말만 선명하냐면, 내가 그 말만 귀담아들었기 때문이다.

보는 눈이 있군.

팬 서비스 차원에서 부드럽게 미소 짓자 숨죽인 환호성이 울렸다.

잘나가는 연극배우가 된 듯한 기분에 괜히 어깨가 으쓱했다.

“몰랐는데 사람들의 관심을 즐기는 편인가 봐요, 달링.”

윽.

그렇게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이 말투를 다시 들으려니 적응 안 된다.

나는 참지 못하고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전부터 궁금했는데요, 크루엘로. 대체 그 느글거리는 말투는 왜 쓰는 거예요? 비가 때까지만 해도 멀쩡하지 않았어요?”

“글쎄, 누군가의 업보가 아닐까 싶네요.”

“그 누군가의 이니셜이 설마 L.F.라고 우길 생각은 아니죠?”

“A.R.이었던가.”

뭐. 에이미 로열샌드?

내가 에이미 때, 나를 ‘달링’이라고 불러 달라고 사주라도 했단 말인가?

입만 열면 거짓말이지.

나는 크루엘로를 흘겼으나 말싸움을 이어 가지는 않았다.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입장했을 때부터 황태자전하의 눈빛이 부담스러운데 혹시 내 이마에 ‘시오라 보네티’라는 글자가 쓰여 있나요?”

“아니요. 나를 보는 거예요.”

“응? 왜요?”

“이번엔 입궁하라고 벽난로가 다 차도록 서신을 보냈는데 답장을 안 했거든요.”

왜 서신이 하필이면 벽난로를 채웠는지는 구태여 묻지 않았다.

그건 베티가 몸소 내게 보여 준 적이 있었으니까.

그 짓을 황태자한테 할 수 있다니, 다른 의미로 놀랍긴 했다.

일부러인지 크루엘로가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아서 내가 대신 설명해 주었다.

“황태자전하께서 이리로 걸어오고 있어요.”

“음.”

“휘말리기 귀찮은데 크루엘로가 저기 가서 이야기할래요?”

“갔다가 여기에 날벌레가 꼬이기라도 하면─.”

“가, 크루엘로.”

정색하며 속삭인 말에 그가 웃었다.

“다녀올게요, 내 사랑.”

“윽.”

크루엘로가 손을 뻗은 걸 보고, 나는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라고 한들 그가 여기서 내게 입을 맞출 리도 없는데 운동 신경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 그만.

그는 멈칫하는가 싶더니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서운해라.”

“아니, 그게…….”

“엉긴 머리칼을 풀어 주려 했을 뿐이에요.”

딱히 피하려던 건 아니었다, 또 그놈의 꿈이 생각났을 뿐이지.

차마 내뱉지 못할 변명을 속으로만 주절거리는데, 크루엘로는 기어이 손을 뻗더니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했다.

왠지 그가 진짜로 서운했던 것 같기에 나는 얌전히 그 손길을 받아 주었다.

그제야 만족한 듯, 그는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자마자 사방에서 내게로 시선이 달라붙었다.

“에휴.”

그러면 그렇지, 먼발치에서 쳐다보기만 할 뿐 생각 외로 내게 관심이 없길래 이상하다 했더니 역시나 크루엘로 방패 덕이었다.

전보다 방어력이 올라간 것 같은데, 그새 그의 소문이 악화되었나 보다.

에덴이 이상한 짓을 벌이고 다닌 것도 한몫했겠지.

좋아, 와라.

나는 각오를 마쳤고, 그러자마자 첫 번째 객이 내게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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