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상식적으로 빌려 쓰는 몸과 원래 나이가 같으리란 보장이 없을 텐데도, 남매는 예상치도 못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보트는 그렇다 쳐도 미뉴엣은…….
에덴에게 몸을 빼앗겼던 후유증일지도 모르니 말을 아끼겠다.
“그러면 몇 살인데. 열아홉? 열여덟?”
“너 설마 나보다 어리냐?”
“정확히는 몰라. 우리 신전에서는 바깥이랑 다른 달력을 썼거든.”
제국이 건국되기도 전에 신전을 바다에 처박았으니, 당연히 제국력과는 안 맞는다.
더군다나 나는 시간 선도 마구 넘어 다녔다.
크루엘로가 어릴 때, 덜 자랐을 때, 성인이 됐을 때.
그래도 정신연령을 기준으로 하면 대략적인 계산 정도는 가능했다.
내가 성인, 그러니까 열여덟 살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운명〉이 들어왔다.
에이미의 몸에서 2년, 비가의 몸에서 또 2년, 그리고 시오라의 몸에서 반년을 살았으니 그 시간을 더해 보면…….
“스물둘? 셋?”
“…….”
“입양되면 내가 이 집 첫째야.”
미뉴엣이 빤히 나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도 곧 스물둘이야.”
“어! 미뉴엣 생일이야?”
“어어, 그랬지. 아마 5월 14일이었나.”
“그러면 선물을─.”
“그리고 내가 네 동생인 것 같지는 않아.”
“엥?”
“내가 네 동생인 것 같지는 않아, 라스티.”
너무 진지하게 구니까 외려 장난인지 진심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나야 뭐, 어차피 성인인 마당에 한두 살 깎여 나간대도 나쁠 건 없으니까.
“그러면 스물한 살로 할래.”
말하면서도 이게 무슨 어린아이 소꿉장난인가 싶긴 했지만, 평생 신전에 갇혀 살았던 특전인 셈 치기로 했다.
“깎을 거면 더 깎아, 열여덟도 나쁘지 않거든?”
“뭐야, 가보트. 내 오라비가 되고 싶어?”
“……아니, 갑자기 스물한 살이 좋아 보인다.”
가보트가 떨떠름한 얼굴로 정정했다.
그 얼굴을 보니 나이를 더 깎고 싶었지만, 나도 최소한의 양심쯤은 챙기기로 했다.
이것도 내가 다시 보네티가 되기로 했을 때의 일이겠지만.
기분이 묘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보네티에 애착을 느꼈다.
서로의 이득 때문에 입적된 데다가 이따금 내뱉는 가족 소리도 시답잖은 농담에 불과했지만,
그런 가족 놀이에도 이따금 속이 울렁거렸다.
제대로 된 가족을 갖지 못한 걸 이렇게라도 보상받고 싶었던 걸까.
그러나 그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 보인 적은 거의 없었다.
나조차 내 감정을 잘 모르기도 했고, 상대가 부담스러워한다면 그게 상처가 될 것 같아서.
그렇기에 이들의 마음이 나와 비슷하다는 걸 안 지금, 나는 기뻤다.
그러나 조금 쓸쓸하기도 했다.
시오라 보네티의 삶이 전부 지워지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그게 내 진짜 몸이 아니라고 한들, 내가 시오라로 살아온 세월이 사라진 건 아닌데도 여태 쌓아온 시간이 무덤에 파묻히는 것 같았다.
말로 내뱉기엔, 나조차도 쓸데없이 감성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아, 그러고 보니.
“미뉴엣, 지금 시오라 보네티는 실종 상태로 알려져 있다고 들었는데.”
“그래. 곧 사망 신고를 할 생각이었어. 시체를 찾지는 못했어도.”
미뉴엣은 진중한 투로 말했고 어쩐지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나만 기분이 이상했던 건 아니었구나.
두 사람의 진지한 태도가 조금 위로가 되었다.
“난 바쁘니까 이만 가 볼게. 서류는 천천히 읽어 봐.”
미뉴엣은 내게 서류를 건네고 돌아섰다.
입적에 필요한 동의서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류를 살피려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백작부인이 저택에 있다고 했지?
미뉴엣이 응접실을 떠나기 전에 나는 그녀를 불렀다.
“있잖아, 아직 결정한 건 아닌데 백작부인을 한번 만나 봬도 될까?”
“어머니께선 이미 승낙하셨어.”
거참, 저번에도 그렇고 딸자식이 하나 더 생기는 데 굉장히 관대하신 분이다.
무관심인지 포용력인지 모를 그 배짱이 놀라웠지만, 그것 때문에 만나려는 건 아니었다.
“성력이 사라지기 전에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백작부인은 타고나길 병약했고, 현 신전의 신성 주문으로는 선천적인 상태를 고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음, 빚을 하나 지워 두는 거지.
어쩌면 이게 효도가 될 수도 있을 거고.
전에는, 백작부인을 고쳐 주는 걸로 협상해 볼까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인생사 모르는 거다.
“……안내해 줘, 가보트.”
“어.”
다행히 백작부인은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성력을 들키지 않고 그녀를 치료할 수 있었다.
눈을 뜨니 몸이 건강해져 있는 건 어떤 느낌일까.
괜스레 깜짝 선물이라도 준비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백작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미묘한 책임감도 다 씻을 수 있을 것 같다.
일을 마무리한 뒤 나는 약속대로, 다시 화이트데저트 공작저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
창밖으로 보이는 보네티 백작저.
마차가 정문에 도착했는데도 내리지 않는 손님 때문에 사용인들이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나는 눈을 끔벅이며 맞은편에 앉은 이를 바라보았다.
크루엘로.
흐린 하늘에 붓을 찍어 칠한 듯한 머리칼의 사내가 나를 바라본다.
그 외관이 빛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어째선지 오늘따라 유독 더 반짝거렸다.
이런 외모를 가지고 평판이 나쁘다니 그것도 참 대단한 재주야.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했으나 절로 벌어진 입은 다른 말을 뱉었다.
“먼저 돌아가도 된다니까.”
어라, 이 말 전에 했던 것 같은데 언제였더라.
그는 처연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원래는 눈썹을 일그러뜨리지 않았던가?
의아했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꾸며 낸 표정은 크루엘로와 정말 잘 어울렸다.
“그렇게 나를 보내고 싶어?”
느리게 눈을 깜박이자, 어느샌가 크루엘로는 옆자리로 옮겨 와 있었다.
그는 설탕을 녹여 낸 듯이 단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지 말라고 했잖아.”
“어?”
“안 간다고 약속했으면서.”
다른 말이 나와야 할 것 같은데?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어긋남이 계속된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차에 크루엘로가 다가왔다.
그의 손이 내 뺨을 쥐고 부드럽게 틀었다.
얼굴이 가까워진다.
어차피 이마에 입을 맞추는 정도겠지.
나는 이미 답지를 들여다본 것처럼 그가 향할 곳이 어딘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다지 긴장하지도 않은 채 눈만 멀뚱거렸다.
그러나 크루엘로는 예상을 깨고 내 숨결을 집어삼켰다.
입술이 눌리는 감각, 따뜻한 온기, 그리고.
“속았어?”
맞닿은 채 속삭이는 말에 온몸을 타고 전류가 흐른다.
나는 퍼뜩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헉!”
벌떡 일어났다가 머리를 박았다.
아야야, 부딪친 곳을 매만지며 고개를 들자 마차 천장이 보였다.
뭐야, 뭐지?
몹시도 당황스러웠으나 일단 혼몽한 정신을 잘 가다듬고 기억을 정리해 보았다.
나는…… 보네티 백작저에서 나와 마차에 올랐다.
긴장이 풀리니까 졸렸고, 그래서 잤다.
그러니까.
“꿈이었구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차 의자에 스르륵 주저앉았다.
난데없이 왜 그런 꿈을 꾸고 난리람.
이걸 악몽이라고 해야 해, 뭐라고 해야 해.
살아생전 처음 꿔 본 꿈 때문에 괜히 얼굴이 홧홧했다.
이게 다 크루엘로 때문이다.
수중 신전에서 이상한 짓을 한 게 너무 기억에 남다 보니……. 에잇, 생각하지 말아야지.
나는 휘휘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내 앞에서 어정쩡하게 굳어 있는 마부를 발견하고 말았다.
나를 깨우려고 했는지 그는 허공에 손을 들어 올린 채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마부는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입을 열었다.
“도, 착했습니다, 백작님.”
“……못 본 걸로 해 줘.”
“예? 뭘 못 본 걸로 해 달라고 하시는지.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센스가 좋군.
나는 만족하며 금화 한 닢을 건네주었다.
이로써 없던 일이 되었으니 아무런 문제도 없다.
***
“혹시 내가 문젠가?”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곳은 화이트데저트 공작저의 어느 침실.
며칠간 내가 묵고 있는 곳이었다.
장소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겠지만, 나는 막 잠에서 깨어난 참이었다.
즉, 의식을 잃은 채로 아무런 논리도 맥락도 없는 꿈속을 헤매고 왔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꿈속에서 나는…….
“왜 계속 꾸는 건데!”
생각을 억지로 흩어내며, 나는 마구 베개를 두드렸다.
그래, 또 꿨다. 계속 꾸고 있다.
상황과 장소만 바꾸어 가며 크루엘로와 입을 맞추는 꿈을 매일매일!
이게 말이 되나?
혹시 악몽의 신 같은 게 달라붙은 건 아닐까?
내가 전에 베아티투도를 썼다고 그 영혼들이 보복으로 날 타락시키려는 건 아닐까?
자기 직전 내 몸에 축복을 걸고 따뜻한 차를 마시고 인류애로 가득한 이야기를 읽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축복을 걸다 키스하고 차를 마시다 키스하고 책을 읽다 키스하게 될 뿐이다.
결국, 이렇게 문란해지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불량 성직자라고 한들, 직업 윤리상 감당할 수 없는 저주였다.
나는 베개를 터뜨릴 듯이 안았다가 그대로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잠시 뒤, 내가 안은 베개가 위로 당겨졌다.
덩달아 딸려 올라가며 나는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날 내버려 둬.”
“뭐 하는지만 알고.”
크루엘로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솔직해지자면 요 며칠간 계속 그랬다.
처음에는 꿈을 꾸더라도 잠깐 민망할 뿐 금방 잊어버릴 수 있었으나 사람들이 괜히 반복 학습을 하는 게 아니다.
꿈은 뼛속 깊이 각인되었다.
이제는 그 얼굴만 봐도 내게 입을 맞출 것 같아서, 나는 은근히 크루엘로를 피해 다녔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는 내 이상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진지하게 왜 그러냐고 캐물었다면…….
내 입으로 그 꿈을 이야기하느니 내 신전으로 돌아가고 말지.
물론 신전은 진작 부숴 버렸으니 바닷속으로 가야겠지만, 수치심으로 죽느니 그편이 나았다.
“좋아, 그러면 이대로 말할게.”
그는 마땅치 않은 목소리로 내뱉고는 베개를 놔주었다.
그러고는 내 옆에 앉았는지 침대 옆자리가 움푹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오늘 꿈속의 장소가 하필 침대였기 때문에 나는 대놓고 움찔했다.
페불라시여!
“미뉴엣 보네티가 입적 제의를 했다며.”
“딸꾹.”
“다시 보네티가 되고 싶어?”
어라.
크루엘로의 말투는 여상했으나 그 목소리는 달랐다.
어두운 감정이 진득하게 들러붙어서는 흡사 살기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나는 당황해 고개를 들었으나 의외로, 그의 얼굴은 깔끔했다.
착각……한 건가?
멀뚱히 눈을 깜박이는 동안 말이 이어졌다.
“그러려던 건 아닌데, 실은 네 입적 동의서를 봤어. 하단에 라스티라고 서명된.”
“아직 서명 안 했는데?”
“‘아직’이란 말이지. 뭐, 봤다는 건 거짓말이었어.”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봤다.
“의미도 없이 거짓말 남발하지 말아 줄래.”
“의미야 있지. 나는 계속 고민이었거든.”
크루엘로는 우아하게 다리를 꼬며 빙그레 웃었다.
“혹시 네가 그것 때문에 날 피해 다니는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