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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43화 (143/162)

143화

지은 죄도 있으니 한 번은 참기로 했다.

나는 가능한 한 친절한 투로 말했다.

“크루엘로, 이건 백지야.”

“그게 왜?”

“아하. 그러니까 백지에 서명하라는 게 네 의도라는 말이지?”

“내가 널 팔아넘기기라도 할까 봐? 서운하네.”

크루엘로가 가식적으로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저걸 도대체 누가 가르친 거지?

그의 주변 인물을 떠올려 봐도 통 짐작 가는 사람이 없다.

잠깐 동안 큐딜을 의심하다가 구역감이 치밀어 머릿속을 비웠다.

나는 그가 내민 종이를 확 낚아챘다.

그러고는 갈가리 찢어 버리려다가 그냥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진짜로 날 팔아넘기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크루엘로에게서 만년필을 빼앗고는 백지 위로 손을 움직였다.

서명은 제법 멋들어졌는데 내가 신전에서 살 때 연습한 성과물이었다.

언젠가 바깥에 나가 천재 소설가가 됐을 때를 대비해 만들어 뒀었지.

정작 소설은 세 줄도 쓰지 못했지만 말이다.

“자.”

서명을 마친 종이를 크루엘로에게 돌려주자, 그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작 그 백지 계약서에는 관심도 없어 보였다.

“부족해? 또 뭐가 필요한데?”

크루엘로는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곧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종이를 갈가리 찢어……. 내 첫 서명!

기념비적인 예술품이 방금 세상을 떠났다.

“이런 데 함부로 서명하면 안 된다는 거 못 배웠어?”

“자기가 줘 놓고.”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지, 원.

투덜거리고 있으니 크루엘로가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겨 왔다.

마차도 이미 도착했는데 굳이 자리를 바꾸는 이유를 모르겠지만, 묘하게 긴장되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한 척 굴었다.

“너는 내가,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 모를 거야.”

그 목소리에는 진한 갈증이 어려 있었다.

그저 심술을 부리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것만은 아니라는 듯이.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고백을 떠올렸으나 그렇다고 해도 이상했다.

막말로 내가 가족이었던 이들과 연애를 할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크루엘로는 왜.

“어…….”

고민하던 때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자, 잠깐만?

진짜?

또?

점점 좁아지는 거리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눈을 질끈 감으려던 찰나.

“다녀와, 라스티.”

입술이 닿았다.

그러니까…… 내 이마에.

***

라스티는 마차에서 내렸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제 이마를 문지르던 걸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생각 같아서는 정말로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너무 멋대로만 하다가 미움받으면 안 되지.”

크루엘로는 가만히 중얼거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용인들의 환영을 받은 라스티가 안으로 들어서고 그 기척이 움직여 응접실에 자리 잡을 때까지 계속.

그러고야 그는 다시 마차를 출발시켰다.

바퀴가 잘 포장된 도로 위를 달린다.

처음에는 느린 듯하다가 점점 빠르게, 그 속도에 맞추어 창밖의 광경도 명료하지 않게 흐려졌다.

사내는 물끄러미 바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붉은 눈동자는 불씨가 꺼진 듯 차가웠고 잿더미 같은 불안함이 그 안에 녹아 있었다.

그의 손끝이 마차의 창을 툭툭 두드려 댔다.

도대체 보네티 남매의 어떤 면이 그 애를 애틋하게 만든 걸까.

생각해 봐도 특별한 일이라곤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먼저 잘해 준 건 라스티였고, 도와준 것도 라스티였다.

그들은 그저 그녀의 호의에 반응해 뒤늦게 정을 붙였을 뿐이다.

“후.”

그러나 무엇보다 짜증스러운 건, 크루엘로 또한, 혹은 보네티 남매 이상으로 라스티에게 받기만 한 처지라는 것이었다.

그가 도운 일이 뭐가 있는가.

원로회 해산? 에덴 처리?

그런 게 정말 라스티 개인을 위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나.

이제야 도움을 줄 방식이 생겼다지만 애석하게도 보네티 남매 또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아직은.

“……저건 안 돼.”

“그러니까 너는, 미뉴엣 보네티가 죽는 것보다 내가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이 더 싫다는 거지?”

아직은 그들보다 저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하나 그게 단순히 저와 함께한 세월이 더 길었기 때문이라면, 시간이 지나며 마음이 어찌 될지는 모르는 게 아닌가.

크루엘로는 무심코 내뱉었다.

“죽여 버리면 좋을 텐데.”

그러면 싫어하겠지.

사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잠깐 라스티가 보일 반응을 생각해 보았다.

아직, 감정의 저울이 제 쪽으로 넘어와 있으니 어쩌면 지금이 적기일지도 모른다.

제가 해친 거란 확신을 주지만 않으면, 적당한 변명거리만 만들어 주면 어떻게든.

“…….”

문득, 크루엘로는 생각을 멈추었다.

목적은 달랐으나 그 사고방식이 꼭 저를 대하던 원로회처럼 느껴진 탓이다.

‘……물들었나.’

복잡해진 속이 뜨겁다.

그는 습관적으로 품을 뒤지다가 궐련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걸 떠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연기를 피워 내는 대신, 그는 등받이에 기댄 채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생각하면 참 우습다.

분명히 제가 바란 건 라스티의 생존, 그 하나뿐이었는데 그게 보장되니 언제 그랬냐는 듯 욕심이 몸집을 키웠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한 제가 보네티 남매를 죽일 생각까지 했다는 걸 알면, 라스티는 어떻게 반응할까.

어쩌면 그들과 자신 사이의 감정의 추가 기울어지는 건, 생각보다 빠를 수도 있었다.

제 속이 사랑스럽지 않다는 건 크루엘로 스스로가 제일 잘 알았으니까.

그는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침잠한 시선을 아래로 던졌다.

찢겨 나간 종잇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크루엘로의 손짓에 종잇조각들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퍼즐처럼 모여들었다.

억지로나마 온전한 형태를 갖춘 백지의 하단엔, 누군가의 이름자가 있다.

그는 손끝으로 사랑스러운 서명을 매만졌다.

그러다 보니 잔뜩 날이 섰던 마음도 천천히 누그러졌다.

“참아야지.”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의 감정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라스티가 그런 기분을 느끼는 건 별로 유쾌할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라스티의 서명에 입을 맞추고 눈을 감았다.

치밀어 오른 초조함이 가라앉을 때까지 느리게 숨을 달랬다.

마차가 저택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계속.

***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가보트는 마치 앵무새가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내가 여태 있던 일을 모조리 털어놓았더니 저렇게 고장 나 버렸다.

미뉴엣에게 에덴의 기억이 전부 있어서, 이야기를 하나도 덜어내지 않은 게 문제였을까.

쏟아낸 정보를 다 소화하지 못하고 그는 계속 버벅거렸다.

그리고 가까스로 입을 벌렸다.

“……데이디어의 수행인이 너였다고?”

“오. 첫 번째 질문이 그럴 줄은 몰랐어.”

“어쩐지 피아니시모가 이상하더라니.”

‘그거 보라니까!’

그렇게 말하듯 뱁새는 의기양양하게 날개를 퍼덕거렸다.

가보트는 원망 섞인 눈으로 제 정령을 흘겨보다가 슬그머니 내 눈치를 살폈다.

조금 안심했다.

‘널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모르겠네.’라든가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 네 사정 같은 건 궁금하지도 않았어.’ 같은 말을 꺼낼 것 같진 않았으니까.

……생각만 했는데도 마음 아프네.

당분간 기억에서 크루엘로 화이트데저트 어록을 꺼내 보지는 말아야겠다.

크루엘로와는 확연히 다른 반응에 나는 슬쩍 안도하고는 곧바로 태세를 바꾸었다.

먼저, 표정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푹 수그리고 다음으로는 목소리에서 기운을 쫙 뺐다.

“그렇구나, 가보트. 네가 날 알아보고 도와준 줄 알았는데 전혀 몰랐던 거였구나.”

“자자잠깐만, 시오라? 아니, 뭐랬지. 라, 라스티?”

“상처받았어, 흑. 흑. 흑.”

“너 우는 거 아니지? 우는 척하는 거지? 아 씨, 고개 들어 봐봐, 따지려는 게 아니라!”

“나한테 가족이라고 말해서 믿었는데 그래, 이젠 생판 남이라는 거지.”

“그런 게─.”

“그거 말인데 라스티.”

“헉!”

갑작스럽게 미뉴엣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가보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거의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으나 나는 놀라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내 몸이다.

미뉴엣이 말하기 전부터도 그녀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는 말씀.

의자에 덜렁덜렁 매달린 동생은 쳐다보지도 않고, 미뉴엣이 내게 말했다.

“부부 중 한쪽만 살아 있더라도, 호적을 옮기는 게 가능하다고 하네.”

“응?”

“마침 내가 실종된 이후로 걱정되셨는지 어머니께서 수도에 올라오셨어. 별관 쪽에 머무르고 계시거든.”

“어어?”

“네 선택이니 강요하지는 않겠지만, 한번 생각해 보라고.”

“그러니까…… 나를 다시 입양하겠다는 말이야?”

‘왜?’라고 덧붙이려던 순간, 미뉴엣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눈치껏 입을 다물었으나 머릿속엔 여전히 물음표가 떠올라 있었다.

미뉴엣이 날 친근하게 생각한다는 거야, 이제 당연히 안다.

그러나 예상했던 말은 ‘이제부터 친구로 지내자.’였지, ‘다시 가족이 되자.’는 아니었다.

내가 보네티의 일원이 됐던 건 서로의 이득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니까.

그런데 다시 입양을 제의하는 건……. 잠깐만, 설마!

“혹시 크루엘로가 아직도 보네티와의 혼담에 집착하고 있어?”

“……말해 두는데, 네가 다시 보네티가 된다면 공작과 약혼하게 될 일 같은 건 전혀, 조금도, 눈곱만큼도 없을 거야.”

“말 잘했다, 미뉴엣! 아주 속이 다 시원하네.”

잘못 짚었군.

하기야 아무리 크루엘로가 제정신이 아니라도 아직까지 그 짓거리를 하는 건 말이 안 된다.

내가 입적이 안 되면 미뉴엣과 약혼할 판인데, 〈운명〉도 아니고 현실에서 그 애가?

그랬다면 알맹이가 바뀐 게 아닌지 의심했을 것이다.

가보트가 물었다.

“잠깐만. 그러면 쟤가 기록상 시오라의 동생으로 들어가는 거야?”

상념에 빠졌다가 나는 급격히 현실로 되돌아왔다.

슬그머니 손을 들어 올렸다.

“미뉴엣 선생님, 가보트의 착각을 정정해도 될까요?”

“뭔 소리야.”

“나 스무 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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