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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42화 (142/162)

142화

머뭇거리듯 조심스러운 크루엘로의 손길이 새삼스러워 내심 웃음을 참았으나 곧, 나도 웃을 수 없게 되었다.

평소답지 않은 태도 때문인지 괜히 가슴 안쪽이 간지러웠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 뿌리칠 수도 없고.

이게 다 크루엘로 때문이야.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산책로를 걷는 것처럼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라스티, 크루엘로가 나를 불렀다.

“가을이 되면 수확제 보러 갈래?”

“오, 그래. 이번엔 불꽃놀이 봐야지.”

“네 진짜 생일은 언제야?”

“바깥 기준으론 몰라. 음, 우리 신전 달력으로는 7월 2일이었어.”

“내년 1월에 같이 무덤에 가 주면 좋겠는데.”

“무덤이라니 누구 무덤?”

“에이미.”

맥락 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툭툭 대답하다가 나는 순간적으로 걸음을 멈출 뻔했다.

혹시 농담하는 건가 쳐다봐도, 그의 얼굴은 진지했다.

내 시선을 느낀 순간 크루엘로가 가벼이 웃었다.

“에이미의 기일이 될 때마다 매해 갔었어. 정확히는 그날밖에 못 갔지. 그래도 염치가 있어서.”

“크루엘로.”

“알아. 휘슬로 가던 날, 네가 해 줬던 말. 다 기억해.”

내가 에이미라는 사실을 드러낼 수 없던 날 중 하나였다.

신을 모시는 성직자라 알 수 있다고, 추측으로 포장한 본심을 내뱉어야 했던 날.

내가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고 돌려서 고백했던 그날.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에이미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어. 그래서 기일만 되면 무덤 앞에서 퍼부어 댔지.”

“…….”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하나도 들리지 않았겠구나. 너는 죽은 영혼조차 아니었으니.”

내 영혼 조각은 줄곧 크루엘로와 함께 있었으나 바깥으로 나온 건 부활의 진이 가동한 때였다.

그러니까 조각이 전해 준 크루엘로의 기억도 그것뿐이었다.

그가 무덤 앞에서 한 말은 한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미안해.”

“사과할 일이 아니야. 오히려 감사한 일이지. 그때 창피한 말을 참 많이 했거든.”

“창피한 말이라면 궁금한데.”

“그러니까 한 번만 무덤에 같이 가 줘, 라스티.”

그러면 다 떨쳐 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이어진 말에 나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말을 안 했던 것 같은데.”

“뭐야, 불안하게.”

“전부가 같은 사람인 걸 알았을 때 마냥 배신감만 들었던 건 아니야.”

“…….”

“물론 속았다는 생각은 들었지. 그래도 그것보다는, 안도한 게 더 먼저였어. 소중한 사람이 죽었다는 고통보다, 죽은 줄 알았던 배신감이 덜한 건 당연하니까.”

아.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 라스티.”

나는 참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까지 푹 수그리자 그게 꽤 이상해 보였나 보다.

라스티?

되묻는 목소리에 다시금 울컥하여, 나는 크루엘로와 맞잡지 않은 손을 들어 그의 입을 턱 틀어막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더 말하면 울 것 같으니까.”

“……안 운다더니.”

“언제 적, 킁, 이야기래. 걸어 다니는 비구름이 된 지 한참이거든.”

크루엘로의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떳떳하다.

왜. 뭐!

한창 솔직해지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이런 때 눈물이 자주 나오는 건 좋으면 좋았지, 나쁜 징조는 아니었다.

조금, 아주 조오금 창피하긴 하지만, 그거야 비웃는 사람이 잘못한 일이니까 난 아무렇지 않아.

……정말로.

돌연, 크루엘로의 웃음이 부자연스럽게 끊어졌다.

뭐지?

돌변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나는 고개를 들었다.

먼발치에 익숙한 마차가 서 있었다.

나도 종종 타고 다녔던, 보네티의 마차다.

그리고 그 앞에서부터 두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은발과 똑 닮은 얼굴을 한 미형의 남매.

미뉴엣과 가보트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크루엘로의 손을 강하게 붙들었다.

잠깐이었지만, 에덴과 싸우러 갈 때보다 더 놀랐다.

“보네티네.”

크루엘로의 무감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퍼뜩 내 손을 내려다봤다.

“아, 잠깐만. 우리 지금은 약혼한 사이도 아니라 놓아야 할 것 같은데.”

“계속 잡고 있고 싶어.”

“뭐?”

“힘겹지만 솔직하게 표현하는 거야. 조언해 준 사람이 보상을 주면 좋겠네.”

“너, 진짜 날 좋아하는구나.”

“새삼.”

놀리려고 한 말인데 괜히 내 낯만 뜨거워졌다.

크루엘로는 사실 바람둥이가 아닐까?

그래, 내가 없는 새 약혼자가 아홉 명이나 늘었던 것부터가 이상했다.

그에 대한 정보를 들었던 조직이 크루엘로 소유였으니까 최대한 순화해서 말해 줬을 법도 하다.

그러면…….

맹한 생각으로 시간을 허비하는데, 돌연 찬바람이 부는 것만 같았다.

봄바람이라고도 여름바람이라고도 할 수 없는, 매섭고 칼날 같은 바람.

다시 고개를 드니 어느새 미뉴엣이 코앞까지 다가온 채였다.

정령을 부르지도 않았는데 바람까지 왜 이런담.

지은 죄도 없는데 왠지 폐가 쪼그라드는 것 같아 나는 시선을 살짝 틀었다.

얼빠진 표정으로 미뉴엣을 따라온 가보트를 바라보자 심신이 평온해졌다.

머잖아 두 사람은 우리의 앞에 멈추었다.

크루엘로가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로군, 백작.”

“일주일도 오랜만이라면 그렇네요.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공작전하.”

가능하다면 더 오랜만에 뵀으면 좋았을 것 같지만.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으나, 그런 말이 이어진 것 같다.

그때 미뉴엣의 시선이 내 손으로 향했다.

움찔하며 나는 손을 놓으려 했으나 크루엘로는 오히려 손가락이 맞물리도록 고쳐 잡았다.

한층 등골이 섬뜩해졌으나 한편으로는 회의감이 일었다.

크루엘로는 왜 연애를 과시하는 것처럼 유치하게 구는 거람.

이렇게 해서 그가 뭘 얻을 수 있는지 통 모르겠다.

나는 일단 영문도 모르고 쪼그라진 가보트를 위해서라도, 분위기를 바꾸기로 했다.

“그날 잘 들어갔어, 미뉴엣?”

처음 보는 사람이 미뉴엣에게 친한 척 구는 게 이상했는지 가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얜 진짜 모르나 봐.

데이디어도 알아차렸는데 혼자만 모르다니 서운하다기보단 재밌었다.

“……덕분에.”

미뉴엣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

“작위를 받았다며. 축하해, 라스티.”

그녀는 뒤쪽에 서 있던 시종에게서 꽃다발을 건네받아 내게 건네주었다.

이름 모를 꽃이 품 안을 가득 채웠다.

어쨌거나 향기는 좋았다.

“어떻게 알았어?”

“바람의 정령이 정보 계열 일에는 탁월하거든.”

“아.”

“아직 인계 절차를 밟진 않았겠지만, 이런저런 일로 골치 아플 거야. 작위 계승에 어려움이 있으면 연락 줘. 적어도 어떤 허수아비보다는 내가 더 도움이 될 테니까.”

“고맙……. 응, 그래.”

“말 나온 김에 오늘, 백작저에 놀러 오지 않을래? 네게 제의하고 싶은 것도 있고 갈 곳이 없으면 머물러도 괜찮아.”

“데리러 간다는 게 그런─!”

뭐에 놀랐는지 가보트가 당황하여 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자 쭈그러들어서는 입을 다물었다.

오늘따라 소심해 보인다.

나는 쯧쯧 혀를 차다가 그의 발치에 있는 피아니시모를 발견했다.

요즘은 가보트의 발등이 마음에 들었나, 왜 번번이 저기 있는 거람.

동그란 뱁새는 가보트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오늘도 나를 보며 고개를 이리저리로 기웃거리고 있었다.

쟤도 정령치곤 참 둔하다.

그렇게 생각하던 때, 돌연 볍씨가 부리를 떡하니 벌리고는 소리쳤다.

뺘아악!

“뭐야, 피아니시모?”

흥분한 볍씨가 사람들의 시선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작고 동그란 정령은 가보트의 발등에서 내려와서는 콩콩거리며 돌아다녔다.

이따금 날개를 펴 나를 가리켰고 알아들을 수도 없게 뺙뺙 소리를 내질렀다.

정황상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겠는데, 그러면 가보트도 알아들었으려나.

고개를 든 순간 나는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 ─전─동생을 볼 수 있었다.

“좀 알아듣게 말해 봐, 피아니시모.”

“푸흡.”

“저렇게 둔한 것도 재주로군.”

“…….”

크루엘로의 조롱에도 미뉴엣은 반박하지 못했다.

뺙!

피아니시모는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 털을 두드리고는 이내 내 몸을 타고 올랐다.

등반한다고 말해도 될 지경이다.

털 뭉치같이 생긴 게 사람의 몸을 잘도 기어오른다.

기어이 내 얼굴에 달라붙은 뱁새는 반갑다는 듯이 내 콧등에 부리를 비볐다.

그쯤에서는 이 애가 나를 알아봤다고 아예 확신할 수 있었다.

웃으며 목덜미를 살살 긁어 주자 볍씨가 즐거운 듯이 울었다.

“그래서 뭐라는 건데!”

가보트만 속이 터져서 소리쳤다.

쟤는 정령의 계약자라는 애가 왜 저렇게 말을 못 알아듣는담.

피아니시모는 들어 보라는 듯이 날개를 짝 펼치고 평소보다 느릿하게 울었다.

꼭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가정교사 같은 태도였다.

삐이약.

“그러니까…….”

삐이이이이약.

“그, 페불라 백작, 아니 페불라 백작님이…….”

삐약삑!

“시오라다?”

저걸 어떻게 알아들었대.

전달한 쪽이나 알아들은 쪽이나 대단해서, 나는 짝짝 박수를 쳐 주었다.

그러면서도 비밀이 드러나는 현장이 참 없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 보네티 남매에게 정체를 고백할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람.

이야기의 신이 빠져서 그런지, 맥락 없는 희극이 됐다.

아직 페불라께서 소멸하신 것도 아닌데 이것 참.

“피아니시모, 뭐 그딴 농담을…….”

세상에, 그마저도 안 믿는 거야?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벌린 순간, 가보트가 휙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다만 눈을 깜박였다.

거기에 무슨 단서가 있었는지 가보트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어, 진짜.

***

가여운 내 ─전─동생은 드디어 진실을 알았다.

누가 피아니시모의 계약자가 아니랄까 봐, 그는 꼭 고장 난 뱁새처럼 굴었다.

결국 보네티 백작저에 방문하기로 하고 각자 마차에 나누어 탈 때까지도 그는 제대로 된 말을 한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가보트 바보.

그리하여 화이트데저트의 마차 안, 바깥으로는 벌써 그리운 백작저가 보이고 있었다.

맞은편에 있는 사람만 아니었다면 좀 더 제대로 기뻐했을 텐데.

“먼저 돌아가도 된다니까.”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며 말하자 크루엘로가 눈썹을 비딱하게 기울였다.

“그렇게 나를 보내고 싶어?”

“그렇다기보단…….”

“네가 정 원한다면 방법이 있어.”

그렇게 말한 크루엘로는 의자의 바닥에서 낱장의 서류 하나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여기에 서명 한 번만 해 주면 기꺼이 돌아가려는데 어때, 라스티?”

아니, 정정하겠다.

그건 서류가 아니라 백지였다.

한동안 안 들으니 미친놈 소리가 그리워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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