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다른 의미로 심장이 흔들렸다.
가벼운 태도를 버리고 나는 몸을 바로 세웠다.
황제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수도의 대저택, 비단과 보석, 무역권 등 그가 내게 내줄 포상들이 줄줄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나는 ‘페불라’라는 말에서 멈추어 있었다.
페불라…….
그러니까 나더러, 페불라 백작이 되라고 한 거지?
기묘한 기분이 마음을 잠식한다.
나는 모든 일의 내막, 이를테면 내 신의 소원을 알기 전에도 페불라의 부흥을 바라지는 않았다.
내가 보고 체감해 온 교리상, 사라지는 것이 옳았으니까.
자연스럽게 결말을 맞이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교단의 이름이 아니라면…….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페불라가 의미하는 게 뭔지 아십니까, 폐하?”
“단어의 의미는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 아니오.”
교단을 다시 부흥시키는 데는 관심이 없다는 뜻이었다.
정신이 멍해져 나는 몇 번이나 눈을 깜박였다.
페불라가 이어진다.
신이 아닌, 인간의 이름으로.
주인을 바꾸어 이야기가 흘러간다.
남들에겐 그깟 이름 따위가 무어 중요한가 싶겠지만, 내게는 달랐다.
그 단어가 마치 내 신의 유산처럼 느껴져 거머쥐고 싶었다.
욕심이 났다.
나는 끝이란 이름으로 태어났으나 새로운 시작일 수 있었다.
“공께서는 어찌하시겠소?”
내 감정의 이름을 안 이상, 머뭇거릴 이유는 없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답했다.
“주신 영광을 받아들이겠습니다, 폐하.”
***
보네티 백작저는 요즘 꽤나 떠들썩했다.
미뉴엣 보네티가 돌아온 덕분이었다.
파티를 벌였다거나 소란스럽게 환호성을 터뜨린 건 아니었다.
기껏해야 백작의 보좌진들만이 몰래 샴페인을 나누며, 자기들끼리 자축한 정도라고 할까.
“돌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님!”
“으흑흑, 이제 드디어 가보트 백작 대리님에게서 해방될 수 있어요!”
“끔찍한 나날들이여, 안녕!”
하필 가보트가 그 근처를 지나고 있지만 않았더라도 완전범죄가 됐을 것이다.
청년은 똥 씹은 얼굴을 했으나 문을 열고 들어가 초를 치지는 않았다.
본인의 일 처리가 미숙했던 건 누구보다 자신이 제일 잘 알았을뿐더러, 가주 대리에서 해방된 일로 가장 기뻐한 것도 본인이었으니까.
‘백작이란 건 지긋지긋한 자리야.’
물론, 미뉴엣의 귀환이 훨씬 더 즐거운 소식이라는 건 당연했다.
그는 가주의 집무실 앞에 서서 경쾌하게 문을 두드렸다.
“안에 있지, 미뉴엣?”
그러면서도 그녀가 실종됐던 기간 때문인지 미묘한 불안감이 일었지만, 곧 답이 돌아왔다.
약간의 초조함이 녹아 사라졌다.
가보트가 집무실로 들어섰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은발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꽤나 눈길을 사로잡을 광경이었지만, 그녀의 남매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그가 소파에 털썩 앉으며 물었다.
“넌 안 쉬냐? 어떻게 돌아오자마자 일만 하고 있어?”
“어떤 가문의 백작 대리가 서류 처리를 아주 재밌게 해 뒀더라고.”
“윽, 나도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한 거거든?”
“그랬지. 고생했어.”
미뉴엣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몰랐는데 바티, 너한테 내가 모르던 면이 많더라고.”
“무능하다고 조롱하냐?”
“그게 아니야. 네가 용기 내서 공작의 앞을 가로막을 줄은 몰랐거든.”
“뭐?”
“그것도 데이디어 크림슨을 위해서라니. 삼각관계는 아니겠지?”
“무슨 터무니없는……. 뭘 말하는 거야, 대체?”
“얼마 전 황궁에서의 일 말이야.”
가보트는 귀신에라도 홀린 사람처럼 고양이 같은 눈을 깜박였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
“나중에.”
“맨날 나중이래. 내가 늙어 죽으면 무덤에 대고 말하려고.”
가보트는 투덜거리며 미뉴엣 몫으로 나온 찻물을 대신 들이켰다.
어차피 입도 대지 않고 일에만 열중하니 저라도 마셔 주는 게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러며 그는 미뉴엣을 노려보았다.
제 누이는 두 달 동안 감쪽같이 사라졌다가 신관들의 부축을 받으며 돌아왔다.
이상해진 미뉴엣도 아니고 가보트가 알던 원래 그 모습으로.
일단은 기뻐했으나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알 수가 없어 몇 번을 캐물었다.
그럴 때마다 돌아온 답이라는 게.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미뉴엣이 퍽 피곤해 보였기에 일단은 넘어가 주었다.
그러나 일주일쯤 지나니 속이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캐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미뉴엣은 왜 달라졌던 것이며, 그리고 그날 함께 사라졌던 시오라는 어디에 간 건지.
아직은 입 밖에 낼 용기가 없어 참고 있었지만.
“후우.”
서류에 도장을 찍은 미뉴엣이 서류 더미를 한쪽으로 밀어 놓았다.
꼭 일을 그만하려는 것 같네.
아직 해가 중천에 떴는데 그럴 리는 없겠지만……이라고 가보트가 생각한 찰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로?
“왜 그래, 미뉴엣. 어디 아프냐?”
“오늘분 일은 여기까지라서.”
“뭐!”
가보트는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이 일 중독이 벌써? 정말로 아픈가?
제 동생이 무슨 표정을 짓건, 미뉴엣은 홀가분해진 얼굴로 길게 기지개를 켰다.
“오늘은 페불라 백작을 데리러 가야 하거든.”
“페불라 백작? 뭐야, 이상한 이름인데.”
그런 가문이 있던가?
페불라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기는 한데.
가보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민하다가, 그 이름을 고대 신학 도서에서 봤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이름이 든 책을 함께 찾아 달라고 부탁한 건 시오라였다.
‘젠장.’
재차 그 이름을 떠올리자 모래알을 씹은 것 같았다.
어디서 뭘 하길래 소식조차 없는지. 설마 진짜로 죽은 건 아니겠지?
가보트는 다시, 그 답을 알 법한 이를 쳐다보며 찻잔을 기울였다.
그 속도 모르고 미뉴엣이 입을 열었다.
“바티,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갑자기 분위기를 잡아?”
“네 여자 취향 말이야.”
“푸흐읍!”
“예쁘다고 한눈에 반하는 타입은 아니지?”
가보트가 찻물을 뿜어내든 말든, 미뉴엣은 꿋꿋이 물었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 신경질적으로 제 입가를 닦으며 소리쳤다.
“뭔, 무슨 농담을 그렇게 진지하게 해!”
“네가 화려한 유형을 선호하는 건 알지만 조금 걱정스럽네.”
“야, 미뉴엣!”
“제발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는 말아 줬으면 좋겠어. 나는 그런 쪽의 이슈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뭐야, 대체……. 잠깐만. 지금 나 약혼하라고 밑밥 까는 거지? 한다고 했잖아, 네가 찍는 사람이랑 결혼한다니까?”
“원로회를 새로 만들고 싶어서 기를 쓰는구나, 바티.”
미뉴엣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걸 바라던 게 아니었나?
가보트는 울컥해서 소리치려다가 미뉴엣이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말을 삼켰다.
누이가 사라졌던 동안, 험악했던 제 언행을 반성한 게 한두 번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분명히, 그냥 넘어가 줄 수 없는 문제도 있었다.
이렇게 한가로이 잡담을 나눌 정도면 정신적으로도 제법 회복이 된 거겠지?
더는 안 봐 준다.
그는 표정을 굳히고, 입에 담기 껄끄러웠던 주제를 기어이 꺼내 들었다.
“네가 아무리 ‘나중에’라고 해도 이건 들어야겠다, 미뉴엣.”
“뭔데.”
“시오라, 어떻게 된 거냐?”
그녀는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물끄러미 가보트를 바라보았다.
“그날, 같이 있었잖아. 하다못해 공작이 데려다 감춰 놓은 거라고 해도 넌 알 거 아니야.”
“…….”
“내가 백작 대리를 맡을 때, 정보 조직에 조사를 맡겨 두긴 했는데 아무것도 나온 단서가 없어. 아니지, 최근 일주일간은 네가 일을 봤으니까─.”
“그거, 내가 그만두게 했어.”
“뭐?”
가보트는 무심코 반문했다가 뒤늦게 그 말을 이해했다.
조사를 그만뒀다고?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청년의 손에서 찻잔이 떨어졌다.
“미뉴엣! 너─!”
“시오라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바티.”
그는 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그러나 미뉴엣의 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데리러 가야지.”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분명 웃고 있었다.
***
우리는 대전을 나와 마차를 세워 둔 곳을 향해 걸어갔다.
내 안에서 황제는 좋은 사람이 됐다.
그게 아주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걸 그 또한 알아야 할 텐데.
크루엘로한테 헛소리를 했던 건 아직 괘씸했지만, 당사자가 태연하다 보니 내가 열을 내기도 머쓱했다.
물론 다음에도 같은 잘못을 저지르면 그때는 태어난 걸 후회하게 해 주겠지만.
나는 퍽 악당 같은 결심을 했다.
한동안 말이 없던 크루엘로는 그즈음에 입을 열었다.
“여기에도, 네 자리가 생겨 가네.”
“그러게.”
“수도에 저택도 생겼고.”
뒤이은 말에, 나는 그게 긍정적인 의미로 한 말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크루엘로의 얼굴은 무감한 듯했으나 두 눈에선 기묘한 감정이 일렁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웃었다.
“내가 돕지 않아도 훨훨 날아가겠어.”
“크루엘로.”
“응, 라스티.”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상대방도 알 수 있다고 말했었잖아.”
어떤 것 같다. 저렇지 않을까? 이런 기분인 것 같은데, 기타 등등.
어린 시절의 로이는 제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내가 의학 전문가는 아니니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을 받아줄 사람이 없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나야, 선배 신도들이라도 있었지만, 그에게는 정말 아무도 없었으니까.
열심히 고쳐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후를 떠올리면, 그러한 성향이 돌려 말하는 식으로 바뀐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는 당황한 듯 눈을 깜박이다가 곧 얼굴에서 인위적인 미소를 거두었다.
“그러네. 에이미가 가르쳐 줬지. 별로 비꼬려던 건 아니었어.”
그 무표정한 얼굴이 시무룩해 보이면 내가 미친 걸까, 크루엘로가 미친 걸까.
에휴.
나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다행히 근방에 사람은 없었다. 그러면.
“자.”
나는 크루엘로에게 손을 펴 내밀었다.
옛날 생각이 난 김에 한 행동이었다.
뭐, 에이미로 지낼 적에는 손을 잡아 준다기보단 안아 주는 일이 더 많았지만.
이건 육아책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한 거였다.
아이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줘야 한다나 뭐라나.
하지만 다 큰 남녀가 남의 집 한복판에서 끌어안고 있기도 머쓱했으니까 이 정도로 타협해야지.
“뭐 해?”
애 취급이 황당했는지 그는 실소했으나 곧 내 손을 붙잡았다.
잡을 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