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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40화 (140/162)

에필로그. 140화

나는 결국 신관들이 올 때까지 버티지 못하고 잠들었다.

버티려고 애를 쓴 탓에 잠기운이 옅었으나, 그들이 미뉴엣을 데려가는 소리를 듣고는 몸에서 쭉 힘을 뺐다.

다른 사람도 아닌 신관이니 믿어도 되겠지. 가보트가 기뻐하겠네.

안도가 나를 깊은 꿈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렇게 한참을 잤다.

다시 눈을 떴을 땐, 화이트데저트 공작저의 천장이 나를 맞았다.

시야가 흐릿하고 귓가에 타닥타닥, 익숙한 소리가 울린다.

덥고 몽롱한 공기에 취해 눈을 끔벅이다가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크루엘로.”

“응.”

“타 죽을 것 같으니 벽난로 꺼.”

전에도 이런 대화를 나눴던 것 같은데 사람 참 변하지 않는군.

봄도 다 지나가는 마당에 이게 무슨 고문이람.

나는 멍해진 눈을 비비려 손을 들었으나,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잘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들고 눈을 내리깔자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이불이 보였다.

그저 덮어 둔 정도가 아니라 내 몸을 꽁꽁 묶고 있다.

보네티 백작저에서 그새 배웠어?

이래서 어린애 앞에선 찬물도 마시면 안 된다.

“혹시 내가 잊어버렸을까 봐 추억 여행 시켜 주는 거야?”

“고생했잖아. 쉬라고.”

“진짜로 날 가둬 두려는 건 아니지?”

“그래서 라스티, 성력 쓸 수 있어?”

크루엘로의 물음에 나는 혹시나 싶어 성력을 끌어 올려 봤다.

상서로운 기운이 무사히 흐른다.

아직 살아 계셨군요, 페불라시여.

성력을 쓰는 김에 사슬로 결박을 풀어내려 했으나 힘이 너무 들어간 탓에 이불은 그대로 걸레짝이 되었다.

“음.”

그냥 밀어내려고 했을 뿐인데.

나는 일단 꾸물거리며 상반신을 일으키고 헤드에 몸을 기댔다.

그러고야 크루엘로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그는 옆쪽에 놓인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늘 그렇듯 턱을 괸 채였고 두 눈은 찢어진 이불로 향해 있었다.

괜히 찔려서 나는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불은 네 탓도…….”

잠깐만, 저거 뭐야.

나는 휙 소리가 나도록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쇠창살이 빼곡히 채워진 게 감옥이라고 해도 믿겠다.

혹시나 해서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문고리에 뱀처럼 휘감긴 쇠사슬을 볼 수 있었다.

“하.”

어이가 없어 이마를 짚으려는데, 손목 쪽에서 철컹 소리가 나더니 손에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내 왼손에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안쪽에 푹신한 천이 덧대어져 있긴 한데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한쪽에만 걸려 있지?

수갑에 달린 쇠사슬은 침대 밖으로 이어져 있는 듯했다.

기둥에 매달아 둔 건가 싶어 왼손의 사슬을 당긴 순간, 크루엘로의 팔이 당겨져 올라왔다.

나는 크루엘로를 바라봤다.

“해명해 봐.”

그가 천연덕스럽게 눈을 깜박였다.

“갈 데 없잖아, 라스티.”

“없지.”

“딱히 할 일도 없을 테고.”

“이제 없지.”

“그러면 여기 있어도 되지 않아?”

“결론은?”

“장난이었어.”

크루엘로가 손을 까딱이자 수갑과 쇠창살과 쇠사슬이 모조리 사라졌다.

그 뒤, 그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상쾌하게 웃었다.

“아무렴, 네 능력을 아는데 내가 진심으로 그런 무용한 짓을 했을 리가.”

“나한테 아직 성력을 쓸 수 있냐고 물어봤던 것 같은데.”

“뭐…….”

그는 성의도 없이 답을 얼버무렸다.

이제는 스토킹을 넘어 감금까지…….

누굴 탓하랴, 크루엘로를 저토록 비뚤어지게 만든 사람이 다름 아닌 나 자신인데.

성직자에겐 관용의 덕목이 중요하다.

나는 범인인 스스로를 용서해 주기로 했다.

크루엘로가 내게 다가와 자연스럽게 내 이마에 손을 짚었다.

이제는 시오라도 아닌데 버릇이 됐나 보네.

“몸은 어때, 라스티.”

“납치, 감금의 후유증으로 심장이 벌렁거리고 마음이 아프네.”

“건강하다니 다행이야. 황궁에서 소환 명령이 떨어졌거든.”

“화이트데저트 공작한테?”

“아니, ‘라스티’한테.”

그 말에, 나는 눈가를 찡그렸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황제가 나를 안다고?”

“이번 일에 반역이 엮여 있어서 신전 측에서 알린 모양이던데. 아니면 정보부에서 뭘 물었거나.”

“으으, 귀찮아. 공은 내가 다 세웠는데 조사까지 받으러 나가야 한다니, 무시하는 건─.”

“포상을 준대.”

“아무렴, 제국을 살아가는 백성으로서 나랏일에 성심성의껏 나서는 건 당연한 일이지.”

기세 좋게 벌떡 일어났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크루엘로는 놀라지도 않았다.

“사용인을 불러 줄게.”

“응. 아, 맞다, 크루엘로. 나 며칠간 잠들어 있었어?”

“3일.”

“오, 하루야?”

크루엘로가 눈을 가늘게 떴으나 개의치 않았다.

전에 일주일을 3주라고 속여서 말했으니, 3일은 하루겠지.

왜. 뭐.

또 속을 줄 알았어?

나는 통쾌해서 웃었다.

***

그리고 머잖아, 하루가 아니라 일주일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크루엘로의 날짜 관념이란 도대체.

별개로 내 몸에도 어이가 없었다.

저기, 몸아? 내 영혼이 없는 동안 질리도록 자지 않았니?

네가 시오라 보네티도 아닌데 이렇게 허약하게 구는 거 너무 비양심적인 태도 아니야?

그래도 그 징그럽던 에덴을 처리하는 데는 성공했으니, 한 번은 봐주기로 했다.

나는 화이트데저트 공작저의 마차를 빌려 타고 황궁으로 향했다.

물론 크루엘로도 함께였다.

황제가 그를 부르진 않았지만, 공작저로 연락을 넣은 이상 그쯤은 감안하겠지.

“음.”

창밖으로 가까워지는 황궁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황제가 나에 대해 뭘 얼마만큼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포상 이야기를 보면, 내가 공을 세웠다는 건 아는 것 같은데 내 정체에 대해서도 어떨까.

뭐, 알든 모르든 좋은 대접을 받진 못할 것이다.

고대 신도의 마지막 후인이란, 현 신전의 후광이 없는 평민에 불과했으니까.

그럼에도 궁에 들어가기로 한 건, 내가 바깥에서 살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바깥은 돈이 최고랬어.

모아 둔 재산이 제법 있는 데다가 교단의 재산도 되찾았지만, 평생 쓰기엔 부족하지.

그러니 어지간한 홀대쯤은 참아 주겠다.

하나 내 예상과 다르게 입궁하면서 나는 이전에 비할 바 없이 공손한 대접을 받았다.

“……아, 라스티 님이시군요. 들, 들어가시면 됩니다.”

“어, 소지품 검사 안 하나요?”

“제가 어찌 감히…….”

심지어 우리를 안까지 안내한 건 시종장이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옆에 크루엘로가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생각보다 은밀한 용무가 있었나?

머릿속에 갖가지 호기심을 피워 내던 도중, 우리는 대전에 도착했다.

가장 안쪽의 상석에 황제가 홀로 앉아 있었다.

“왔는가.”

그 넓은 공간에 사람이 하나뿐이었으나 장내는 꽉 찬 것 같다.

지배자의 위엄이라는 게 실재하는 건지, 저번의 그 무능한 사내와는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사람이라는 게 쉽게 변할 리는 없겠지만.

우리는 적당히 예의를 차려 인사했다.

황제가 황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릇 황제란 누구에게도 고개를 수그려서는 안 되는 자리지만, 높은 데서 내려다보기엔 나 또한 한낱 신의 종일 뿐이겠지.”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이지?

조금 경계하며 눈가를 찡그리는 동안 상석에서 내려와 내 앞에 섰다.

그러고는 제국에서 가장 높은 이가 경건히 허리를 숙였다.

“제국을 내란의 화마에서, 나아가 악의 손에서 거두어 주신 데 깊이 감사드리오.”

“……어.”

“라스티 공, 그렇게 칭해도 되겠소?”

“예, 뭐. 그러세요, 폐하.”

예법이 이렇게 헐렁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황제는 저번과 달리 불쾌한 기색 하나 내비치지 않았다.

그의 정중한 태도가 내 예상과 너무도 어긋나 놀라웠으나, 그런 대접을 받으며 확실해진 게 있었다.

이쯤 되면 거의 모든 내막을 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그렇다면 황실 정보부의 솜씨일 리는 없었다.

“저기,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폐하?”

“말씀하시오.”

“제 이야기는 도대체 어떻게 아셨습니까?”

“신전 측의 도움이 있었소.”

크루엘로의 말대로였다.

현 신전의 교리에, 남의 말을 전하지 말란 말은 없던가.

하기야, 거짓말을 하지 말란 교리도 없었지.

반역 건 때문에 이해는 했지만, 마냥 유쾌하지도 않아서 입매가 조금 어그러졌다.

그런 나를 보고 황제가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이 자리에 그대를 청한 건, 한 나라의 주인으로서, 더하여 한 명의 인간으로서 경의와 감사를 표하고자 함이오.”

“음, 어떻게요?”

“라스티 공, 그대에게 작위와 영지, 그리고 공로금을 하사하고자 하오.”

작위? 영지? 진짜?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환해진 것 같아, 나는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음, 뭐.

신전 측에서 좀 과하게 떠들어댄 것 같긴 한데, 생각해 보니 나쁜 일은 아니다.

내 공이 알려져야 포상도 제대로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정말로, 작위를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영지라는 건 그러니까 불로소득이 생긴다는 말이잖아?

물론 대단한 작위를 줄 리는 없고, 끽해야 자작위겠지만, 그게 어디람.

로열샌드 경 정도는 발아래에 둘 수 있을 텐데.

“그런데 그렇게 마음대로 작위를 주셔도 되는 거예요? 대외적으로 제 정체를 드러낼 생각은 없는데요.”

페불라의 소멸이 예정된 이상, 내 성력은 언젠가 사라진다.

사람들을 희망으로 괴롭힐 생각은 없었으니 처음부터 드러내지 않는 게 옳은 일이었다.

“그래도 아는 사람은 다 알 테니, 작위를 내리는 게 제국에 이득이 될 거야. 고대 신의 마지막 사자가 제국의 귀족이라니 얼마나 탐스럽겠어?”

황제를 바로 앞에 두고도, 크루엘로는 눈치도 보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죽거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황제는 심기가 상한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 말이지.

“일단 들어보고 결정해도 될까요?”

이미 머릿속엔 승낙이라는 두 글자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지만, 이러는 편이 멋있다.

황제가 말했다.

“신의 사자, 라스티에게 전 소몬 후작의 영지였던 페르고를 하사하고자 하오.”

헉, 후작령!

혹시 크기만 큰 황무지인가 싶어 크루엘로를 쳐다보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짜란 뜻이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하던 때.

“더하여 그대에게 세습이 가능한 백작위를 내리고 가문에 페불라라는 이름을 부여하려고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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