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그래, 라스티.”
미뉴엣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크루엘로는 없는 사람인 양, 내게로만 고정된 시선에 어쩐지 긴장하게 된다.
나는 지금 시오라가 아니었으니까.
본래의 내 몸으로 돌아왔기에 내게 주어지는 평가들을, 이제는 내 것이 아니라고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옆에 있는 크루엘로의 옷자락이라도 움켜잡았다.
웃음소리를 들었지만 뿌리치지 않는 게 고마울 따름이다.
“눈, 초록색이네.”
“……청록색이야.”
“보라색은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물끄러미 보다가 뜬금없이 눈 색을 이야기하는 미뉴엣이나 그 와중에 따지고 드는 나나.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왔다.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날 어떻게 알아봤어?”
“낭만적인 대답을 기대한다면 미안하지만, 내 몸에 무단침입한 놈 때문이야. 기억이 공유됐거든.”
“……설명하느라 입 아플 일은 없겠네.”
“외려 내가 설명해 줄 수도 있을걸. 황제가 애호하는 속옷 디자이너까지 알게 됐으니까.”
앗, 그거 정말 안 궁금해.
나는 떨떠름한 기색을 표정에 그대로 드러냈다.
미뉴엣은 조금 웃는 듯하다가 피곤한지 몇 번 눈을 깜박였다.
곧 도로 잠들 것처럼 속눈썹에 졸음기가 매달렸고 그녀의 목소리도 잠긴 채였다.
“라스티. 그래서 너, 푸가라는 신전에서 왔다고.”
“으응.”
“……돌아갈 거야?”
“못 돌아가. 응, 여기서 살아야지.”
“가족도 없고 친지도 없고 갈 곳도 없고, 약혼자 같은 건 더더군다나 없고.”
“어?”
“잘됐네. 그러면 이번엔 굳이 저놈이랑 결혼…….”
그 순간, 미뉴엣의 눈꺼풀은 급작스럽게 문을 닫았다.
계속 피곤한 기색이었으니 그 자체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내가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랬을 거란 이야기다.
“뭐 했어, 크루엘로?”
“환자는 자게 해 줘야지.”
이쯤 뻔뻔스러우면 이것도 재능 같아.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크루엘로를 바라봤다.
“너, 나랑 결혼하고 싶어?”
“나는 괜찮은데 넌 괜찮겠어?”
“뭐?”
“여기가 프러포즈하기에 마땅한 장소는 아닌 것 같은데.”
“알았어, 잠깐만.”
그래, 허니, 달링, 버터 발린 말을 잘도 할 때부터 알아봤다.
한두 번 당한 게 아니기에 나는 말려들지 않았다.
크게 심호흡을 세 번쯤 하며 가슴을 쓸어내리자 크루엘로가 물었다.
“……뭐 해?”
“거절할 준비.”
“…….”
“눈, 눈! 너, 눈 좀 그렇게 뜨지 마. 가보트가 네 눈 보고 뭐라고 했는지 알아?”
“뭐라고 했든.”
“완전히 돌아 버린 눈깔이래!”
“그래.”
그는 조금도 타격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난 공격 방향을 바꾸어, 다소 과장된 몸짓을 취했다.
“크루엘로, 네가 날 너무 좋아해서 무섭다, 무서워.”
“그래?”
“이러다 성력을 잃자마자 감금당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그리고 침묵이 이어진다.
저기?
크루엘로?
크루엘로는 아무런 말도 없이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곧 예쁘게 눈을 휘었다.
그 웃음이 사람을 홀릴 만큼 요사스럽다는 것과 별개로, 마음에 불길함이 싹텄다.
“그 미소 뭐야.”
“그래, 신이 사라지면 성력을 잃는 건 당연하겠네.”
“너 진짜 범죄에 흥미 있어?”
“단순한 사실을 나열했을 뿐인데.”
그는 곧, 아무 일도 없던 듯 천연덕스럽게 웃음을 거두었다.
나는 검은 뱀 교단을 조사하는 비밀 조사관처럼 그의 얼굴을 의심스럽게 노려보았다.
“일단은 나가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어, 라스티.”
“나가는 건 좋은데 그 이야긴 이제 됐어.”
꿍얼거리며 일어나려다가 무릎에 힘이 풀려서 나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라, 긴장해서 그런가?
민망해 헛기침하며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마치 다리에서 기력을 쭉 뽑아낸 것처럼 허우적거릴 뿐이다.
“이럴, 이럴 리가 없는데?”
나는 놀라 내 머리 색을 확인했다.
검다.
분명 금빛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 몸이 시오라 보네티가 아닌데 어째서 나는 새끼 알파카처럼 허우적거리고 있는 거지.
튼튼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몸이었기에 나는 크루엘로를 쳐다봤다.
내 당황스러움을 표현하려는 의도였는데, 그게 그의 눈에는 도움 요청으로 보였나 보다.
오금과 등허리에 불쑥 손이 들어왔다.
“으앗!”
당황해 허리를 바짝 세웠다가 처음 겪는 일도 아닌 터라 곧 체념했다.
크루엘로도 새삼스럽게 왜 그러냐는 듯이 쳐다봤고.
체면을 포기하고 몸을 축 늘어뜨리자 뒤늦은 피로감이 온몸을 덮쳐눌렀다.
내가 많이 긴장했었구나.
“하하…….”
생각하니 웃기네.
참 나. 내 몸이고 내 마음인데 주인한테 너무 비밀이 많은 거 아니야?
“용서하란 게 아니야. 마음을 늘 중도에 두란 거지. 응? 늘 웃거나, 아니면 유쾌하게 넘어가거나.”
“어허! 이게 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야. 감정에 휩쓸릴수록 더 괴로워진다니까?”
틀렸어요, 선배.
그렇게 산 덕분에 후유증만 산더미같이 쌓였다고요.
죽기 전에 완전히 솔직해질 수나 있을지 몰라.
내가 속으로 투덜거리는 동안, 크루엘로는 걸음을 옮겼다.
팔다리가 늘어져 흔들거리는 게 꽤 기분 좋았다.
요람에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이런 느낌이 아닐까?
나는 만족하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식겁해서 소리쳤다.
“잠깐, 크루엘로! 미뉴엣, 미뉴엣!”
뭘 당당하게 두고 가는 거야, 미쳤어?
없는 힘을 쥐어짜 미뉴엣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자 크루엘로가 혀를 찼다.
진짜 작정하고 버려두려고 했군.
세상에나.
그는 내가 더 잔소리를 퍼붓기 전에 마나를 움직였다.
허공에 둥실 떠오른 미뉴엣의 몸이 우리를 따라왔다.
“정말 손끝 하나 안 대네.”
“서로를 위한 배려야, 라스티.”
<운명>에서는 부부였던 주제에.
그 말을 툭 내뱉으려다가 일단 참았다.
더 임팩트 있는 상황에서 말하기 위해서였다.
두 마리 토끼를 노리겠어.
“그때는 잘만 걷지 않았어?”
“그때라니, 언제?”
“수중 신전에서 다시 만났을 때 말이야.”
“아니, 아까잖아. 뭘 까마득한 옛날처럼 이야기하고 있어.”
어처구니가 없어 지적했으나 크루엘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갈 뿐이다.
“내가 더 소중하다고 해서 넘어가 줬더니, 너한테 속아 넘어간 게 아닌가 싶어.”
“뭐?”
“하기야 네가 날 속인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지. 바로 솔직해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야.”
“크루엘로, 아기야? 다시 로이라고 불러 줘야 해?”
“넌 어린애랑 키스하는구나, 라스티.”
이!
누가 성대에 마개를 씌운 양, 말문이 확 막혔다.
“똑, 똑바로 얘기해! 네가 한 거지, 내가 했어?”
“난 약혼식 때를 이야기한 건데. 그때가 내 첫 키스였거든.”
“아니, 그건 내가 입맞춤이란 말을 오해해서, 그리고 네가 피하지 않은 탓도…….”
“변명이 기네.”
“…….”
“책임져야 하지 않아? 성직자면서 양심이 없네.”
미치겠다.
나, 뭐라고 대답해야 해?
누가 나한테 크루엘로 대응 매뉴얼이라도 전해 주면 좋겠다.
내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입을 다물자, 정면을 바라보던 크루엘로가 고개를 수그렸다.
가까이에서 눈이 마주쳤다.
장난기가 어렸을 줄 알았는데 그의 눈빛이 뜻밖에 진지하다.
나는 슬쩍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크루엘로의 모양새 좋은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피부는 살짝 창백한 톤 같은데 왜 저건 붉은 거람.
꼭 작정하고 나를…….
“라스티?”
휙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나는 아무것도 못 봤어. 나는 아무 생각도 안 했어.
속으로 한 희롱은 희롱이 아니다, 아무튼 그렇다.
“조금 전보다 따뜻해진 것 같은데, 라스티.”
“……번번이 이름 부르지 마.”
“하하.”
웃긴.
재수 없어!
나는 두 눈을 꾹 감고 머릿속으로 페불라 8계명을 주르륵 외웠다.
교육 중에는, 하루에 천 번씩 읊었기에 이러고 있으면 세상 만물이 증오스러워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벌렁거리던 심장이 금세 가라앉았다.
부모님이 도움이 될 때도 있었군.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마침 크루엘로가 공간에서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입구까지 그렇게 멀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일부러 천천히 걸어온 걸까.
“아, 신관들 오고 있나 봐.”
“안 느껴지는데.”
“한 10분쯤이면 도착할 거야. 조금만 기다리면 돼하아암.”
도중에 튀어나온 하품이 내 말을 집어삼켰다.
오늘 도대체 몇 가지 일을 처리했는지, 돌아보니 스스로가 가여울 지경이었다.
피곤하다, 피곤해.
무거운 눈을 몇 번이나 깜박여도 피로는 통 가시지 않았다.
어쩌면 미뉴엣에게서 잠기운이 옮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졸리면 자고 있지 그래?”
“괜찮아, 잠깐쯤.”
답하며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동그란 달이 떠 있다.
평소보다 유독 크고 동그래서, 꼭 달과 눈이 마주친 것만 같았다.
바보 같은 생각인가.
“오늘 밤은 되게 밝다. 보름달이라 그런가 봐.”
“소원이라도 빌게?”
“무슨 소리야, 크루엘로. 달의 신 소멸한 지가 언젠데 빌어 봐야 누가 들어준다고.”
“그러면 네가 지금 양손을 모은 건, 달의 신을 추모하기 위해서구나.”
“이제야 나를 좀 아는구나.”
추모하든 소원을 빌든 알 게 뭐람.
이미 사라진 신이 뭐라도 들어줄 리는 없었지만, 사실 사라지지 않은 신에게 소원을 비는 게 더 큰 문제이다.
그건 내 신을 배반하는 행위였으니.
뭐, 민간 신앙 정도는 페불라께서도 눈감아 주시겠지.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꼭 감으니 크루엘로의 시선이 진하게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나는 잠시 동안 기도하다가 곧 눈을 떴다.
그러자마자 그가 물었다.
“뭘 빌었어?”
달의 신의 명복.
그렇게 말하려다가 장난기를 삼켰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내 이야기에서 크루엘로 화이트데저트를 빼놓을 수는 없겠지.
그렇다면 뭐, 그에게도 들을 권리가 있지 않을까.
나는 순순히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가 이야기의 끝이게 해 주세요.”
“끝?”
“보통 그렇거든. 완결이 나면 에필로그든 뭐든 간에 이후엔 평화로운 이야기만 남으니까.”
그러니까 뭐, 여기서 끝난다면.
“해피엔딩이란 말이지.”
그렇지?
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