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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38화 (138/162)

138화

에덴은 괴로워 몸부림치며 저항했다.

그러나 수백 년을 살아온 괴물에게도, 남의 몸에서 버티며 다른 영혼들을 상대할 재주는 없었다.

더군다나 라스티에 의해 동격이 되어 버린 영혼이었기에 더더욱.

혼이 부서지고 뜯겨 나간다.

에덴은 격이 떨어져 가는 걸 느꼈다. 두려워했다.

페불라의 첫 번째 종, 위대한 이의 곁에서 그의 자리가 추락하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

이럴 순 없어.

안 돼.

안……!

기어이 몸의 주인이 에덴을 밀어냈다.

그는 제 목을 옥죄는 듯하던 덥고 갑갑한 기운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쾌락으로 받아들인 건 한순간뿐.

수백 년간 남의 육신에서 기생하던 이의 영혼은 만 갈래로 찢겨 나갔다.

***

성자의 영혼은, 그 위명에 걸맞지 않게 더러웠다.

너덜너덜해진 걸레 쪼가리를 수백 번 꿰매 쓴 것처럼 초라한 행색.

그마저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망가져 참으로 형편없는 최후를 맞았다.

“오…….”

예상을 뛰어넘는 결과였다.

자의로 제물이 되었다 해서 그 정도로 원한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이들도 에덴에게 속아 넘어갔던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에덴이 빠져나간 몸은 잠깐 비척거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기울었다.

그 육신이 쓰러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미뉴엣.”

퍼뜩 정신이 든다.

나는 다급히 달려가 미뉴엣의 몸을 붙들었다.

에덴이 빠져나갔으니 됐어.

미뉴엣이 되살아날 수 있다!

희망적인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그도 잠시.

그녀의 몸 위로 진초록빛 연기가 뿌옇게 피어오른다.

그건 미뉴엣의 영혼이었다.

“뭐.”

정말로?

기껏 에덴을 몰아냈는데, 이 애의 몸은 아직 온전한데 이게 끝이라고?

이해할 수 없었다.

육체도 영혼도 무사한데 어째서 미뉴엣이 죽어야 한단 말인가.

이 애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손을 뻗었으나 당연하게도 잡히는 건 없다.

내가 더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저 지켜보는 것 외에는.

가슴 안쪽에 오물이 쌓이는 것 같다.

나는 절망의 악취를 맡았다. 그때.

“라스티.”

“……크루엘로. 미뉴엣이─.”

“나를 믿어?”

어쩌면 가볍기 짝이 없는 물음이었다.

나는 멈칫하고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답했다.

“믿어.”

크루엘로가 뭘 하려는지 몰라도 그를 믿는다.

그가 나를 위해 애써 주리라 믿는다.

그리고 그는 내 믿음에 보답했다.

크루엘로가 품에서 꺼낸 병은 내가 비가의 조각으로 본 것과 같았다.

안에 들었던 액체가 바닥에 떨어지고 어떠한 의지를 가진 것처럼 움직였다.

거대한 원에 역오망성, 빈 공간에 고대 룬어가 빼곡히 차오른다.

부활의 진.

나는 곧장 그 정체를 알아차렸으나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성공할 수나 있을까?

더군다나 미뉴엣은 아직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이를 대상으로 진을 가동해 봐도……. 잠깐만.

「×월 ×일.

생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왔다. 부활의 진을 발동시킨 순간, 영혼 조각은 생자에게 되돌아가 대상의 영혼에 도로 융합되었다.

…….」

“융합…… 이라면.”

미뉴엣의 몸은 살아 있고, 그녀의 영혼은 아직 육신을 다 빠져나가지 않았다.

잔여물을 기반으로 진을 가동한다면, 크루엘로가 노리는 건 부활이 아니라!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크루엘로의 시선이 모리온에게로 향했다.

그 방향을 확인한 순간 한기가 온몸을 훑어내렸다.

그제야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욕망에 휩싸였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크루엘로를 붙잡았다.

손이, 떨렸다.

“……저건 안 돼.”

“미뉴엣 보네티를 되찾고 싶어 했잖아. 내 착각이었나?”

“넌, 미뉴엣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잖아.”

“그 대가에는 제법 흥미가 있어서.”

“뭐?”

“내가 보네티 백작을 살려 주면 네겐 빚이 되려나.”

그는 담담한 걸 넘어 유쾌해 보이기까지 했다.

실로 오래간만에 나는 크루엘로에게서 이질감을 느꼈다.

내 표정이 이상해졌을 텐데도,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어차피 모리온은 네 신이 사라지면 함께 없어질 힘이라며. 괜찮지 않겠어?”

그 목소리는 마치 사람을 나쁜 길로 인도하는 뱀의 속삭임과도 같았다.

그래, 에덴이 죽었으니까.

페불라가 소멸하고 아예 흩어질 힘이라면 잠깐 빌려 쓴들 괜찮을지도 모른다.

논리를 갖춘 설득에 마음이 촛불처럼 흔들린다.

“더군다나 내 몸을 통로로 모리온을 썼을 때도 아무런 문제 없었잖아.”

“…….”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야, 라스티. 한 번만 끄덕이면 모든 게 좋아질 거야.”

하지만.

나는 힘겹게 내뱉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해?”

어쩌면 크루엘로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나는, 근거 없는 허상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더 이상 크루엘로가 모리온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고 확신했다.

에덴이 죽었으나, 그의 바람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남았다.

크루엘로가 모리온에 손을 댄 순간, 근원의 욕망은 어김없이 그를 집어삼킬 것이다.

무사할 가능성은 구태여 그려 볼 필요도 없었다.

내 직감은 여러 번 내 위기를 가로막고 나를 옳은 길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 안에, 나는 페불라의 뜻이 담겨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포기해, 크루엘로. 네가 모리온에 닿을 일은 없을 거야.”

이게 옳은 결정이다.

결론을 내렸음에도 목소리가 떨렸으나 마음은 확고했다.

크루엘로는 입을 열려다 말고 팔짱을 꼈다.

고심하듯 제 입가를 매만지며 느릿한 투로 물었다.

“그러니까 너는, 미뉴엣 보네티가 죽는 것보다 내가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이 더 싫다는 거지?”

“그건…….”

그 말이 통렬한 비난처럼 가슴에 꽂혔다.

변명하고 싶었다.

모리온이 그를 집어삼키면 더 끔찍한 재앙이 생길 거라고.

부정한 힘을 이용해 미뉴엣을 붙잡은들, 그녀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혀끝으로 밀어낼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왜냐면 내게도 그 말이 더 진심처럼 느껴졌으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소중한 이들을 저울에 달고 비교하는 내 모습이 너무도 낯설었다.

환멸감이 치밀었으나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나는…….

“혼란스러워할 거 없어, 라스티. 넌 이미 내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다고 말했잖아.”

“……크루엘로.”

“겨우 몇 달을 알았을 뿐인 친구와 같지 않은 게 당연해.”

그 목소리는 나를 달래려는 듯 부드러웠으나, 나는 크루엘로의 얼굴에서 완연한 만족감을 읽었다.

그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애당초 그게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속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눈 시간은 아주 짧았으니까.

나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러면 제안 하나 할까.”

“……네가 뭐라고 말하든 내 생각은 안 변해.”

“그게 아니야. 그냥…….”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가벼이 말했다.

“다음부터는 기록을 더 제대로 읽어 보는 게 좋겠어.”

“기록이라니?”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든 순간, 크루엘로가 마법진을 향해 몸을 수그렸다.

품에 손을 넣으며 입을 열었다.

“베아티투도를 이용하여 조각의 힘을 보충하기로 했다. 이론상, 현재 통제할 수 있는 양의 세 배가 필요하다.”

저거……. 엘리니아가 썼던 부활 실험 기록이었던가?

난데없이 왜 기록을 읊조리나 했다가 나는 뒤늦게 그 말을 되짚어 보았다.

통제할 수 있는 양의 세 배가 필요하다는 게, 잠깐만.

그러고 보니까 부활의 진을 가동하는 데 모리온이 꼭 필요한 게 아니지 않았나?

내가 얼이 빠져 눈을 깜박이는 동안, 그가 꺼내든 건 주머니였다.

거기엔 내가 몸소 만든 유사 베아티투도가 들어 있었다.

크루엘로는 천연덕스럽게 가루를 빼어 적당량을 진에 부었다.

“정량이 3g이었으니까 넉넉잡아 10g 정도면 되려나.”

“……야.”

“더 안전한 수단이 있는데 굳이 모리온을 쓰기도 좀 그렇잖아.”

“크루엘로!”

그래!

엘리니아는 정량 이상의 베아티투도를 통제할 수 없어 악마의 강림을 기다렸을 뿐, 꼭 모리온을 써야 하는 건 아니었다.

그걸 잊어버리고 있었다니!

크루엘로가 저질렀던 일 때문에 완전히 속았다.

하지만 나로서도 억울한 일이었다.

크루엘로가 모리온을 쳐다봤잖아, 모리온을 써야 하는 것처럼 말했잖아.

이토록 진지한 상황에서 그렇게 나오면 휘말려 드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이런 때 나를 놀린다고 생각하는 게 말이나 돼?

어처구니가 없어 화를 내고 싶었으나, 짜증보다 안도가 컸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마음 안쪽에 쌓였던 죄책감의 상당량이 녹아내렸다.

그리고 새로이 기대가 부풀었다.

그 희망대로 진은 찬란한 빛깔로 빛나기 시작했다.

“된다!”

미뉴엣의 몸을 빠져나가던 초록빛 연기가 멈추었다가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건 내가 봤던 것 중 가장 멋진 역행이었다.

……잠깐만, 또 생각났는데 좀 전에 역행을 썼으면 되는 거 아닐까?

내 성력으로 진에 에너지를 공급한다거나…….

“어…….”

혹시…… 나…… 바보인 건……?

충격적인 깨달음에 멍하니 입을 벌렸을 때, 미뉴엣의 눈꺼풀이 움찔 떨렸다.

나는 다급히 말도 안 되는 생각─내가 바보일 리가 없지.─을 지워 냈다.

“미뉴엣!”

크루엘로를 밀치고 그 앞에 꿇어앉았다.

그의 황당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했다.

조금 전엔 네 편 들어 줬으니까 이젠 미뉴엣 편이야.

그녀는 파르르 눈을 떨다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초점이 잡히지 않았음에도 초록빛 눈동자는 맑고 또렷했다.

에덴이 들어 있을 때와 완전히 다른 눈빛에 울컥 감정이 솟구쳤다.

“괜찮아, 정신이 들어?”

“너…….”

그녀는 흐릿한 시야를 바로잡으려는 듯이 눈가를 찡그렸다.

그 순간 나는 세 번째로 뒤늦은 깨달음에 뒤통수를 맞았다.

아 씨, 나 지금 시오라가 아니었지?

뭐라고 설명할까 고민하다가 일단은 줄리안에게 한 말을 반복하기로 했다.

정체를 고백하는 일이야, 나중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해도 늦지 않으니까.

“어, 나는, 아니, 저는 그러니까 시오라의 아주 소중한 사람인데요.”

“본명 뭐야.”

“응? 아니, 네?”

“진짜 이름, 뭐냐고.”

미뉴엣이 저를 구해 준 사람에게 초면에 반말을 내뱉을 성격은 아니다.

그러니까 말을 편하게 한다는 건, 그리고 내게 이름을 물어본다는 건 역시.

목이 막혀서 나는 마른침을 한 번 넘겼다.

“……라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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