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고대 교단이 왜 무너졌는지 모르겠네.”
이전에 크루엘로와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어떻게 다 잊혀 가는 신의 신도가 막대한 권능을 발휘할 수 있느냐고.
그때의 나는 그렇게 말했다.
결국은 똑같다고.
현 신관의 성력이 뒤떨어져 보이는 만큼, 신관의 수가 늘어난 거라고.
믿음의 총량은 늘 같고 고대와 지금의 차이는 질을 선택했는지 양을 선택했는지의 문제였다.
1,000의 자원을 10명씩 나누면 한 사람당 100을 가져가고, 100명씩 나누면 한 사람당 10을 가져간다.
그건 직책별로도 마찬가지다.
에덴은 페불라가 지금보다 부흥했을 시절, 성자로 임명되어 더 많은 권한을 넘겨받은 듯하나 주어진 성력의 양은 같다.
그러면 그의 몫을 덜어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에덴만큼이나 중요한 사람들이 많아지면 된다.
그리고 내게는 마침, 그럴 권한이 있었다.
“네가 삼킨 신도들을 모조리 성녀에 임하는 거?”
“뭐?”
“신도 에이미를 성녀로 임한다.”
연극 대본처럼 또박또박 내뱉은 말에 에덴의 웃음이 뚝 그쳤다.
“너, 뭘…….”
페불라가 나누어 줄 수 있는 성력의 총량이 같다면, 그걸 더 많은 사람이 나눌수록 누리는 특권이 적어진다.
물론 내 능력이 사라지는 것도 감수해야겠지만, 당장은 페불라의 권능을 넘겨받은 상태라 내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중은 어떡하냐고?
어차피 그분께서 소멸하시면 나는 빈털터리가 될 텐데 무슨 상관이람.
더군다나 에덴이 집어삼킨 제물을 전부 성녀로 임명하면, 그 이상의 장점도 있었다.
“그만, 쿠윽!”
에덴은 창백한 낯으로 몸을 웅크렸다.
그래, 반응이 오나 보지?
아나콘다의 배 속에 실뱀 몇 마리를 넣어 둔다고 한들, 그 배가 터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실뱀이 아니라 저와 덩치가 같은 뱀이 들어 있다면,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면?
에덴의 영혼은 그들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결국엔 토해 내게 되겠지.
“당장, 그만둬! 네가 뭘 망치고 있는지 알아?”
“글쎄, 네 주인공 놀이?”
별로 관심도 없었다.
에덴이 남의 사정에, 심지어 페불라의 바람에도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그는 무언가를 버티는 사람처럼 두 눈을 부릅뜨고 나를 노려봤다.
“이제 와서 네가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간 누리던 것들을 다 내려놓고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아?”
“응, 괜찮아. 너랑 달리 나한테는 먹여 살려 줄 사람이 있거든.”
더하여 바깥에 쌓아 둔 돈도 있었다.
육성으로는 다른 말을 하면서도 나는, 에덴이 삼킨 제물들을 성녀로 만드는 작업을 이어 갔다.
에이미, 비가, 시오라부터 묘비에서 봤던 이름을 전부.
그 성과는 점점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에덴의 몸에서 색색의 연기가 피어난다.
그 색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강렬해졌다.
나는 끝으로 선언했다.
“신도, 바이올렛을 성녀로 임한다.”
이렇게, 모두가 주인공이 되었다.
사실 육성으로 내뱉을 필요는 없는데, 에덴을 도발하기에 이만한 것도 없어 보여서.
과연 효과는 좋았다.
에덴은 기어이 목에 핏대가 서도록 소리쳤다.
“웃기지 마, 그만하지 못해? 네가, 페불라의 신도라는 게 어떻게!”
“어휴, 페불라의 신도라는 게 이렇게 미련이 넘쳐서야…….”
“이럴, 이럴 순! 아……. 광휘brilliance.”
어라.
쓸 수 있는 성력을 다 밀어 넣었는지 눈이 멀 것처럼 새하얀 빛이 쏟아졌다.
겨우 눈꺼풀을 누르듯 감았다가 눈을 떴을 때, 그 자리에 에덴은 없었다.
아니, 보이지 않았을 뿐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저쪽.”
크루엘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는 그를 뒤쫓았다.
***
에덴은 필사적으로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벌써 성력이 흩어지는 감각이 생생히 느껴졌다.
그가 애써 품고 있던 영혼도 터져 나올 듯이 부글거렸다.
안 돼.
성력을 더 잃어버리면, 그 영혼들을 다 붙잡아 놓을 수가 없다.
자신은 격을 잃어버릴 것이고 수백 년간 쌓아 온 대계는 물거품이 될 것이다.
이대로 끝날 수 없다.
페불라께서 그렇게 잊히게 둘 수 없어.
설사 라스티라는 신도를 내린 게 그분의 저의라 한들, 에덴은 그 뜻을 납득할 수 없었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어.’
하지만 어떻게.
고민 끝에 섬광처럼 번뜩 깨달음이 일었다.
그는 달음박질을 멈추고 내뱉었다.
“수정modification”
그의 다급한 심경대로 모리온으로 가는 문은 곧장 열렸다.
에덴은 서둘러 그 안으로 들어섰다.
물론, 미뉴엣 보네티의 몸으로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다만 죽을 수는 있지.’
미뉴엣의 영혼을 품고 있는 게 문제가 된다면, 그깟 영혼쯤 뱉어 버리면 그만이다.
모리온의 힘을 취하려는 그의 욕망은 진실하기에, 그것이 자살로 치부될 리도 없다.
아니, 설사 교리를 어긴 것으로 여겨져 지위를 잃더라도 돌이킬 수 없었다.
어차피 지금, 그는 평신도로 격하당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처했으니까.
이 몸이 죽으면 다음 순번은 크루엘로 화이트데저트.
그의 육체를 빼앗고 모리온을 집어삼키는 데까지만 버티면, 성자의 지위를 잃더라도 상관없다.
페불라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그는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내던질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다.
흑수정을 닮은 에너지는 세상의 빛을 다 빨아들일 듯이 검었다.
그 힘이 마치 저를 유혹하는 듯하여 에덴은 몽롱한 눈길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는 모리온에 닿을 수 없었다.
텅.
마치 모리온과 에덴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처럼, 그의 손이 가로막혔다.
“뭐야.”
에덴은 당황하여 손바닥이 새빨개지도록, 힘껏 그 벽을 내려쳤다.
벽이 울리는 소리는 요란했다.
그러나 아무리 두드려도 깨지지 않았다.
왜.
어째서.
그게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으나 에덴은 애써 침착하게 머리를 굴렸다.
“수정modification.”
안 그래도 성력이 흩어져 가는 마당에 고위 주문을 쓰려니, 부담감을 견디지 못한 육신이 피를 토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정신력을 발휘해 주문을 이었고 완성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어째서…….”
모리온에 다다르는 문이 열리지 않는다.
투명한 벽이 그의 성력을 다 집어삼킨 듯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에덴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던 그때.
“그거 안 열릴걸.”
그건 그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고 생각한 목소리였다.
에덴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당연하게도 그곳엔 라스티와 크루엘로가 서 있었다.
“열쇠 마법으로만 여기에 들어올 수 있다고 사기를 친 게 괘씸해서 나도 방비를 좀 해 뒀지.”
“뭐……?”
“넌 그거 못 열어. 나보다 성력이 강하다면 모를까.”
그 말을 듣고서야, 에덴은 벽에서 짙고 두터운 성력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의 상태로는, 아니 온전한 몸을 가지고도 도저히 뚫을 수 없게 압도적이다.
그리고 그건 크루엘로의 몸을 차지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리온에, 닿을 수 없다.
그러면 뭘, 어떻게 해야…….
아.
아아.
에덴의 두 눈에 짙은 절망이 어렸다.
그의 눈이, 손이, 온몸이 제 감정을 견디지 못하고 벌벌 떨렸다.
“이대로 끝이라고? 전부 사라진다고……?”
그는 소리가 나도록 거세게 무릎을 꿇고 엎드려 빌었다.
라스티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으나 에덴은 일말의 수치심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저 어린아이에게서 약간의 연민을 얻어 낼 수만 있다면, 이까짓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시, 다시 생각해! 네가 생각만 바꾸면 페불라께서 영원한 영광을 거머쥘 수 있어. 이 세상 모두가 페불라를 믿는 거야, 그 길까지 겨우 한 걸음이 남았을 뿐인데!”
“……사람들의 믿음을 인위적으로 조종할 수 있다는 망상을 버려.”
“어차피 신을 찾는 인간들은 다 똑같은데 왜!”
에덴이 울분에 차 소리쳤다.
“언제 어디에나 악은 있다. 인간은 구원받기 위해서 신을 찾는 거야! 그러니 어떤 신이라도 상관없어! 그런데 왜!”
왜 페불라는, 저를 구해 준 운명만은 안 된다는 말인가.
어째서 저를 악마라 낙인 찍고 감금해 굶겨 죽이려던 레카논이 모두의 빛이 되어 간단 말인가.
에덴은 수백 년 전과 지금을 혼동하며 괴로워했다.
그건 품고 있는 영혼이 흔들린 탓만은 아니었다.
그의 시간은 언제나 그때에, 본래의 몸이 죽은 그 시간에 박제되어 멈춰 있었다.
“인간의 믿음이 한데 모이면 그분은 더 찬란해질 거다. 그건 결국 인류를 위한 일이 될 거야.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 영광을 나누어 받은 신도가 그 길을 막는단 말이야. 대체 왜!”
“페불라께서 그걸 바라지 않으시니까.”
뭐.
미치광이처럼 요란하던 기세에 찬물을 부은 듯 에덴은 갑자기 멈추었다.
그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건 이따금 무의식의 영역에서 피어오르곤 했던, 그럼에도 의식적으로 묻어 두곤 했던 어떠한 진실.
“아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세상에 죽기를 바라는 인간이 없듯이 잊히기 바라는 신은 없다.
저런 배신자의 말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요, 사스러운, 거짓말을 하는구나.”
“페불라께서는─.”
“닥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에도 머릿속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생각을 지워 낼 수가 없었다.
에덴은 양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애원했다. 간청했다.
“페불라시여, 당신의 종을 굽어살피소서. 페불라시여, 페불라시여!”
제 머리를 괴롭히는 악마 같은 생각을 거두어 가소서.
저 어린 신도의 뜻을 바꾸어 주소서.
제가 당신을 위해 수백 년간 애써 온 노력을 외면하지 말아 주소서.
부디, 부디…….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건 아주 절망적이었으나 사실은 에덴에게 아주 익숙한 일이기도 했다.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계시를 듣지 못했으니까.
“우으윽!”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에덴은 바닥에 엎어졌다.
동요는 좀체 가라앉지 않고 사지가 벌벌 떨렸다.
벌게진 두 눈에선 쉴 새 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그는 몸을 웅크렸다.
아니야, 방법이 있을 거야, 생각해, 생각해 내라, 글러트니.
페불라께서 시련을 내리시는 거야.
저깟 어린아이 하나 때문에 대계가 망가질 리 없다.
한낱 정에 이끌려 거사를 볼 줄도 모르는 저런…….
‘아.’
정.
맞아, 그랬지.
방법은 있었다.
“인, 질을 잡으면…….”
에덴은 제 생각을 말로 내뱉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토록 미뉴엣 보네티가 소중하다면, 그 목숨을 이용해 원하는 걸 얻어 내면 된다.
신앙심도 부족한 성녀들의 임명을 해지하게 한다거나 하다못해 저 방벽을 치우게 한다거나.
그는 품을 뒤적거렸다.
예비로 챙겨 왔던 단검은 사라진 지 오래였으나, 새하얗게 물든 머리로는 그런 간단한 것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손에 잡히지 않는 날붙이에 짜증을 내면서도 끊임없이 같은 행동을 반복하기만 할 뿐이다.
그리고 그 순간.
‘꺼져.’
텔레파시도 전음도 아닌, 마치 스스로가 떠올린 생각처럼 그의 머릿속에 메시지가 들려왔다.
무슨…….
에덴이 눈을 깜박이던 때, 소리는 다시 한번.
‘내 몸에서 당장 꺼져!’
누군가에게 세게 밀쳐진 듯이, 에덴은 내동댕이쳐진 기분을 느꼈다.
시야가 진초록빛으로 물들었다.
그건 그가 전에도 느껴 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크루엘로의 얼음에 갇혀 있을 때, 몸을 되찾으려던 미뉴엣 보네티의 발버둥으로 겨우 의식을 되찾던 그때에 말이다.
“우웨엑!”
그는 다시 한번 각혈했다.
미뉴엣 보네티다.
조금 전까지 에덴은 이 몸에 아무런 가치도 두지 않았으나 상황이 바뀌었다.
일을 수습하기 위해선 인질이 필요해.
몸은 돌려줄 수 없어!
에덴은 버티려 했다.
하지만 기어이는 그의 온몸에서 형형색색의 영혼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안, 돼.”
그는 마치 그 영혼들을 붙잡을 수 있는 것처럼 손을 뻗었다.
에덴의 숭고한 뜻을 알아준 걸까, 허공으로 떠오르던 영혼들이 거짓말처럼 그에게로 되돌아왔다.
그의 눈에 희망이 피어오르려던 찰나.
“커헉!”
그들은 에덴의 혼을 뜯어먹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