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크루엘로의 말에 울컥해 목이 잠겼다.
대답하려다가 치밀어 오른 감정을 삼켜 내기를 여러 번.
그 끝에 나는 가까스로 답을 밀어낼 수 있었다.
“아무 데도 안 가.”
떠날 생각이었다면 신전을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갈 데도 없어. 나, 내 손으로 신전을 무너뜨리고 나왔거든.”
안심한 걸까, 내 몸을 붙든 크루엘로의 팔에서 천천히 힘이 풀렸다.
나는 그가 나를 놓아줄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적지 않은 시간 끝에, 우리는 다시 마주 볼 수 있었다.
음, 역시 진지한 분위기에는 통 적응이 되지 않는다.
나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런데 날 어떻게 알아본 거야? 의심받을 줄 알았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해.”
“몰랐잖아.”
크루엘로가 나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면, 진작 들켰을 것이다.
내가 다른 몸으로 그 앞에 나타난 게 한두 번이던가?
심기가 상했는지 크루엘로가 눈가를 찡그렸다.
아차, 너무 정곡을 찔렀나.
“네가 알아볼 거란 걸 내가 몰랐다고, 내가. 하하.”
“……겹쳐 보는 일이야 숱했지. 전에 앓았던 광증에 죄 덮어씌우는 바람에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아.”
“네가 비가일 때 말했던 것 같은데.”
“으으음. 그렇구나. 그래서 어때?”
생각 외로 공기가 무거워서 화급히 주제를 돌리려다 보니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다.
무슨 감상을 요구하는 거람.
“그러니까…… 내 몸 말이야, 보다시피 금발은 아니거든? 음, 그래도 나는 전보다 낫다고 생각해서.”
말을 이어 갈수록 해괴해졌다.
크루엘로는 눈을 가늘게 뜨다가 돌연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아름─.”
텁, 내 손은 빛보다 빠르게 움직여 크루엘로의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서 제일 느끼한 말이 나올 뻔했다.
나는 정색하고 말했다.
“우리, 벌여 놓은 일부터 수습하자.”
“분부대로.”
손바닥 아래에서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생생히 느껴졌다.
온몸의 솜털이 죄 곤두서는 듯했다.
나는 일단 태연한 척, 손을 회수하고 말을 돌렸다.
“황궁에 크루엘로 화이트데저트가 걸어 다니더라.”
“에덴 화이트데저트일걸.”
“어쩐지. 보자마자 확 불쾌하더니.”
미뉴엣의 몸을 빼앗아 놓고 크루엘로로 분장이라니 그 무슨 악취미람.
“남의 육체를 가로챈 이상, 자살하지 못하는 것 같았어. 살해당하지 않는 한 계속 그 몸에 있을 거야.”
“그러고 보니 자료에서도 다 병사했었지.”
“살해당하도록 유도하면 다른 몸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쉬웠으면 병든 몸을 죽을 때까지 쓰지도 않았을 거란 말이지, 크루엘로?”
“말대로.”
하기야 눈먼 칼에 목을 들이밀고 자살이 아니라고 주장해 봐야, 개도 안 믿을 것이다.
잠깐.
그러면 내 손에 단검을 쥐여 주고 끌어당겼던 건 그냥 도발이었나?
속아 넘어간 게 불쾌해 나는 눈가를 찡그렸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곁눈질로 크루엘로를 쳐다봤다.
어쨌거나 그렇단 말은.
“……미뉴엣을 안 죽였다는 거지?”
“죽이지 말라며.”
“너도 네 판단대로 행동할 테니까 결과가 어떻든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판단이랄 건 없었어.”
“뭐?”
“그냥, 화가 났을 뿐이야. 너는 정말 죽을 때까지도 내 말을 안 들어줬고 그 와중에도 남의 목숨이나 챙기고 있었으니까.”
“그야 진짜로 죽는 게 아니니까…….”
반사적으로 내뱉은 변명에 그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음.
나는 말을 고쳐 말했다.
“나도 이제 여분의 몸이 없으니 악착같이 살 거란 뜻이야.”
“부디.”
크루엘로가 한숨을 쉬는 듯한 투로 내뱉었다.
그러더니 돌연 꼬리가 다 접히도록 눈을 휘어 웃었다.
사람의 웃음이 어떻게 저렇게 요사스러울까, 좀 의문스러웠다.
이어 크루엘로는 내 양어깨를 끌어안을 듯이 팔을 걸쳤다.
한결 가까워진 얼굴에 조금 전의 잔상이 겹쳐서 움찔했다.
“그래서 말인데 라스티, 아까부터 왜 이렇게 눈치를 봐?”
“뭐? 내가? 눈치를? 본다고?”
……말이 왜 이딴 식으로 나온담.
“내가 죄지은 것도 아닌! 아니, 조금 짓긴 했지만. 아, 아무튼 그것도 다 신의 말을 따랐던! 거부할 줄 알고 무리하게 말씀하셨던 거라고 했지만, 내가…… 눈치는…….”
“라스티.”
“부르지 마, 안 그래도 엄청나게 창피해졌어.”
“인사도 어색하고 입을 맞춰도 화내지 않고 어떠냐고 감상을 물어보질 않나, 분풀이로 남의 목숨을 가볍게 생각했다는 말에도 그러려니 넘어가고.”
“크루엘로, 하나하나 나열하면서 사람 몰아가는 습관 고쳐 주지 않을래?”
“아니면. 나한테 화나서 그런가?”
“화는 네가 났잖아.”
크루엘로는 금시초문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뻔뻔스럽다.
“내가?”
“네가!”
“그렇더라도 그게 눈치 볼 일이야? 눈치는 내가 봐야지,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잖아.”
“와, 그게 다시 볼 땐 친구로 대하겠다는 입에서 나온 말이 맞아?”
“그건 시오라한테 한 말이었는데 이상하네.”
“고백도 시오라한테 했을 텐데?”
“그렇게 말한다면 라스티. 내가─.”
“양다리. 두 개의 심장. 바람둥이.”
크루엘로가 할 말을 미루어 짐작하여 공격하자, 그는 잠시 말을 잃었다.
이겼다.
그러나 승리감을 누릴 수 있던 건 잠시뿐이었다.
그는 금세 여유를 되찾고 소리 내어 웃었다.
“솔직히 그땐, 어차피 죽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했는데 사실은 마음을 접는 방법 같은 건 몰라.”
“……그.”
“그런 데는 재능이 없더라고.”
이런 주제에선 이길 수가 없다.
뭐라고 말해야 하는 거야?
크루엘로가 세상에서 제일 소중하다고 고백한 건 나 또한 마찬가지인데, 왜 이렇게 처지는 입장이 됐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을 연애 감정이라고 특정할 수 없어서?
겨우 그 이유만으로 이렇게 패배자의 포지션을 감수해야 하는 거야?
억울했다.
하지만 그 기분이 내 입을 비집어 열지는 못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땅만 노려보는데 다행히 그는 팔을 거두고 화제를 돌려 주었다.
“아쉽지만 이젠 그간의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네.”
크루엘로는 내가 부재중일 때의 일을 말해 주었다.
에덴을 어떻게 묶어 두려 했는지, 그가 어떻게 깨어났는지, 이후 그의 계획까지도.
〈운명〉에서 읽었던 것과 아예 같은 내용인지라 새로운 건 없었지만, 에덴이 그렇게까지 상세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은 점에선 어이가 없었다.
정말로 말할 상대가 없었나 봐.
하긴 성격이 그 모양이니까 아무도 상대를 안 해 주지.
그리고 크루엘로의 이야기에는 희소식도 섞여 있었다.
“미뉴엣이 몸을 되찾으려 했구나.”
실패해서 에덴을 도와주는 꼴이 됐다고 한들, 미뉴엣은 아직 온전히 남아 생존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참 그 애다웠다.
미뉴엣이 포기하지 않았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며 미래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모든 일을 정리하고, 악당을 도와주는 꼴이 되었다며 미뉴엣을 놀리는 기분이 얼마나 짜릿할까.
좋아, 의욕이 난다!
“그럼 일단 여기서 나가자.”
나는 힘차게 몸을 돌렸고 그러자마자 팔목을 붙잡혔다.
“뭐야, 크루엘로. 여기서 할 일이 남았어?”
“한 가지 확신이 필요해.”
“어떤?”
“네가 전과 똑같다면 보내 줄 수 없어.”
크루엘로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그렇기에 그의 진심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같은 상황이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는 아직 내가 페불라의 권능을 넘겨받았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으니까.
어떻게 말할까.
고민하다가 나는 마침 시급한 임무 하나를 찾아냈다.
“크루엘로, 모리온으로 가는 열쇠 있지?”
나한테 줬던 것도 어차피 시오라의 주머니에 있었을 테니.
크루엘로가 나를 가둬 뒀던 곳만큼이나 새하얀 공간, 모리온은 그 가운데에 있었다.
온 세상을 빛과 어둠으로 양분한 것처럼 그 대비가 극명한 장소였다.
비가의 영혼 조각이 내게 이곳의 모습을 전해 주었지만, 직접 보는 것과는 달랐다.
“이게 모리온이구나.”
무슨 수로 수백 년이나 마나를 뭉쳐 두었나 했더니 그 응집력의 근원은 신앙이었다.
사람의 믿음은 그 자체로 에너지가 된다고 했던가.
나는 엘린의 말을 되새겼다.
“존재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건 믿음이란다. 그리고 모리온에는 그 힘을 모아 온 교인들의 믿음이 깃들어 함께 쌓여 왔지.”
믿음, 달리 말하면 바람 혹은 소원이겠지.
결국 모리온은,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고대의 믿음을 이용해 만든 유사 신이었다.
각종 저열하고 노골적인 욕망이 달라붙어 있었으나, 가장 커다란 축이 존재의 방향을 결정했다.
에덴의 욕망, 페불라의 부흥을 위해 악마를 만들려는 의지 말이다.
모리온은 제 아비의 뜻을 따라 지금도 크루엘로를 향해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었다.
“…….”
내심, 의아하긴 했었다.
크루엘로는 모리온을 담기 위해 준비된 그릇이고, 이미 두 번이나 그 힘에 손을 댔다.
그럼에도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을까.
답은 여기에 있었다.
모리온의 근간이 곧 에덴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에덴이 내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 모리온에 고삐가 풀릴 것이다.
그는 크루엘로를 집어삼켜 세계의 멸망을 이끌고 페불라를 선전하며 최후의 순간, 그 신도인 내게 제 목을 내어줄 것이다.
이 힘은 에덴의 사념을 따라 인내하고 있을 뿐이다.
구역질 나는 욕망에 얼굴이 일그러졌으나, 그러한 모리온의 정체성은 외려 도움이 되었다.
크루엘로가 무사한 것도 그랬거니와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존재하는 힘이라면.
“애쓸 필요도 없어. 페불라께서 사라지신다면, 이 에너지는 자연히 흩어질 거야.”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된 순간, 사라지는 게 당연했으니까.
그 외의 부수적인 바람 또한 있었으나, 신경 쓸 가치도 없는 쓰레기였다.
에덴의 소원이 어긋난 순간, 이 힘은 절로 사라질 것이다.
한편으로는 허망했으나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악당을 남겨 두고 끝맺는 이야기는 없으니까.
크루엘로가 눈가를 찡그리며 물었다.
“사라진다니?”
“진작 잊힌 신이 여태 연명한 건 에덴의 어그러진 욕망 때문이었다는 거지. 다른 고대 신처럼 소멸할 때가 된 거야.”
“그러면 넌 어떻게 되는데, 라스티.”
“말했잖아, 신전을 부수고 나왔다고.”
내 확답에 크루엘로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는 제 입가를 매만지며 무언가 생각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단 말이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멋지게 모리온을 없애 버려서 크루엘로에게 내 힘을 증명하고 싶었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하는 수 없다.
페불라의 권능을 넘겨받았다는 건 말로 고백하고, 일단은 여기를 나가야겠다.
열쇠는 다 크루엘로한테 있으니 혹시 모를 일도 생기지 않겠지.
“음.”
어쩐지 이렇게 말하니까, ‘혹시 모를 일’이 생기려는 복선처럼 느껴지는데.
수많은 책을 읽어 온 경험이 괜히 스스로의 생각에 딴지를 걸었다.
직감을 무시했다간 큰코다치지.
“왜 그래, 라스티?”
“잠깐만.”
찝찝한 마음에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에덴의 말을 떠올렸다.
“모리온을 만들기 시작한 때 말이야, 잘못해서 신전의 눈에 띄면 곤란하니까 다섯 개의 열쇠가 모여야 힘으로 가는 문이 열리도록 했지.”
그 말을 철석같이 믿어 왔다.
논리적으로도 합당한 말이었고 원로들이 온갖 기괴한 신체 부위에 열쇠를 숨기는 것도 제법 진심으로 보였으니까.
하지만 검증해 보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