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사실 크루엘로가 좀 더 일찍부터 떠올린 추측이었다.
데이디어가 내준 통계 자료를 봤을 때, 그는 발병자 모두가 병이 악화되어 죽었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그리고 에덴이 정말로 다른 몸을 쓸 수 있다고 확신했을 땐, 의문을 느꼈다.
그렇게 자유롭게 몸을 갈아탈 수 있다면,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했을 때 바로바로 갈아치우는 게 효율적이지 않은가.
왜 병에 걸려 죽을 때까지 그 몸에 머무른 거지?
그 순간, 그게 그에게 주어진 페널티임을 알았다.
확신한 건 지금이었지만.
침잠한 에덴의 시선이 크루엘로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그는 곧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정답이야, 크루엘로. 남의 몸을 쓸 때는 그 영혼까지 집어삼켜야 괴리가 적거든. 수명이 다하지 않으면 영혼이 몸을 떠날 수 없는데 어떻게 버티겠어.”
하지만 그건 그렇게 대단한 약점은 아니지.
그는 크루엘로의 머리채를 틀어쥐고는 우악스럽게 꺾어 눈을 마주쳤다.
“큭!”
“남들이 날 죽이게 하는 건 간단하거든. 다른 몸을 준비하는 건 터무니없이 쉽고. 궁금할 텐데 보여 줄까?”
에덴은 두 눈을 번들거리며 다른 쪽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끝에서 피어난 성력이 뱀의 크루엘로의 목덜미를 향해 달려들었다.
두 개의 이빨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고통은 없었다. 피가 흐르는 일도 없었다.
다만 에덴의 성력이 구멍을 타고 들어가 자리를 만들었을 뿐이다.
차후 제 주인이 들어올지도 모르는 공간을.
에덴이 속삭였다.
“이게 탈피야.”
그러더니 그는 맥락도 없이 폭소하기 시작했다.
크루엘로는 반응하지 않았으나 그 웃음은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나는 정말, 그 아이가 나를 죽여 주면 좋겠어. 내가 곧바로 네 몸을 차지하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거든.”
이어 에덴이 내뱉은 말에도 웃음기가 진하게 어려 있었다.
“그러니 기다려 줄게.”
너한테 모리온을 처먹이는 건 아무래도 위험부담이 있기도 하고, 내가 악이 되는 게 그림이 더 예쁘기도 할 테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는 그가 크루엘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마냥 기다리기는 지루해서 말이야. 평판이 좀 더 나빠져도 괜찮겠지?”
“뭘 하려고.”
“전쟁을 일으킬 거야.”
노래하듯 명랑한 목소리로 에덴은 제 계획을 늘어놓았다.
“내란부터 시작해야겠지. 황제의 맹세가 풀려 버렸으니까.”
크루엘로는 인상을 찡그렸다.
에덴의 언행에 불쾌감을 느껴서라기보다는 두통이 일며 들려온 환청 때문이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황제를 갈아치우는 일이었다.
황제는 이미 사내의 종이나 다름없었으나 어쨌거나 그에겐 즉위식이 필요했다.]
‘뭐야, 이건.’
[새로운 황제의 즉위에 각국에서 사신단을 보내왔다. 개중, 플라렌과 모노티어가 전란의 씨앗이 되었다.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이던 플라렌과 유례없는 풍년을 맞이한 인접 국가, 모노티어.
오래도록 사이가 안 좋았던 양국은 오로지 신전의 중재만으로 아슬아슬한 평화를 지켜내고 있었다.]
“좀 귀찮긴 한데 괜찮아. 내가 사슬로 묶어 둔 게 황제뿐인 건 아니거든.”
[사내는 모노티어의 사신으로 분장해 플라렌의 사신을 살해했다.
전쟁이 일어났다.
제국은 그들을 중재하는 척하며 전쟁을 부추겼고, 사내는 제국의 사신단에 포함되어 많은 이들을 흑마법으로 현혹시켜 종으로 삼았다.
전란은 대륙을 뒤덮어 갔다.]
그건 꼭, 에덴이 앞으로 할 일을 환청으로 말해 주는 듯했다.
드디어 제가 완전히 미쳐 버린 것일까.
아니면 어떤 신이, 이를 테면 페불라가 제 귀에 경고를 읊고 있는 걸까.
의아해하던 크루엘로의 머릿속에 시오라가 내뱉은 말이 떠올랐다.
“어느 날, 내가 지내던 곳에 예언서가 떨어졌어.”
“모리온을 집어삼킨 이가 세계를 멸망시키리란 이야기였거든.”
‘설마 이게…….’
크루엘로는 당혹스러웠으나 겉으로는 제 이상을 드러내지 않았다.
“수십 년 전의 반란도 역시 네가 한 거로군.”
“새삼스럽게.”
크루엘로의 머리에서 손을 떼며 에덴이 길게 기지개를 켰다.
“인간이란 게 참 나약하지? 가진 걸 보전하려면 남의 발바닥쯤은 손쉽게 핥는단 말이야. 나중에 뭘 내어 주어야 할지도 모른 채 말이야.”
[신전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만일 사내가 평범한 인사였다면 신전의 중재로 전쟁은 정리됐을 것이다.
세상에 신전의 지지 없이 지탱할 수 있는 나라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모리온을 집어삼킨 사내는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았다.
그는 은밀히 신전을 찾아가 그들을 도륙했다.
전쟁을 멈출 최후의 저지선마저 무너져 내렸다.]
크루엘로는, 이어서 들린 환청을 소화하듯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니 내가 상황을 만들어 두는 동안 넌 얌전히 기다리면 돼. 어떤 결말이 날지, 너도 궁금하지?”
라스티가 제시간에 돌아온다면 크루엘로는 몸을 빼앗길 것이다.
그러나 라스티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는 강제로 모리온을 삼키게 될 것이다.
어느 쪽이든 크루엘로에게는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으나 그는 남의 일을 대하듯, 조금의 불안감도 드러내지 않았다.
에덴이 아쉬운 얼굴로 웃었다.
“넌 정말 네 일은 아무래도 좋은가 보구나. 망가뜨린 게 나니까 어쩔 수 없나.”
거기까지 말하고 에덴은 몸을 돌렸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 사라져 가는 기척.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다.
그렇게, 신전에는 사슬로 온몸이 결박당한 크루엘로만 남게 되었다.
에덴의 말대로 제 안위에는 별 관심이 없는 그는, 조금 전에 얻은 정보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하나 알고도 행동할 수 없다면, 그건 모르는 일과 다를 게 없었다.
그는 또다시 희망과 절망에 번갈아 저며 들었다.
시간이 지나며 크루엘로의 눈꺼풀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한 시간을 채우지 못했던 쪽잠은 몇 시간이 되고 하루를 넘어서며 심지어는 며칠간 잠들어 있기만 할 때도 있었다.
하는 일이 없이 그렇게 자기만 하는데도 크루엘로는 점점 더 피로감을 느꼈다.
“이번에는 배신하지 않을게, 반드시 돌아올게.”
‘기다려야지. 기다려야…… 하는데.’
하지만 언제까지.
에덴의 말대로라면 라스티가 돌아올 때까진 4년이 걸릴 텐데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
4년이 아니라도.
단 하루라도 더 기다릴 수 있을까.
크루엘로의 눈꺼풀은 점점 죽음에 가까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의 뺨에 온기가 닿은 건.
가까스로 떠올린 눈에 청록빛 눈동자가 비친 건.
***
크루엘로와 눈을 마주친 순간,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와, 잠깐만.
분위기에 취해서 일단 저질렀는데 나 엄청나게 수상한 상황이지, 지금?
크루엘로의 입장에서는 생판 남이 자기가 묶여 있는데 쳐들어와서 뺨을 쓰다듬고 있는 꼴이다.
이 무슨 에덴 같은 짓이람?
나는 황급히 손부터 거두었다.
무어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머릿속이 백지였다.
가까스로 입을 열고 아무 말이나 혀끝으로 밀어 넣었다.
“……어, 안녕?”
세상에 이런 얼간이도 다시없겠군.
적어도 에덴으로 의심받지는 않겠다.
“그러니까 나는 말이야, 어…….”
뭐라고 말해야 하지?
연극처럼 대본이라도 써 둘 걸 그랬다.
허둥거리던 때 크루엘로가 손을 움직였다.
그가 뭘 하려고 했는지는 몰라도 사슬에 묶여 있는 탓에 그는 뜻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울려 퍼지는 쇳소리를 듣고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참, 아직 묶여 있는 상태였지.
“아, 사슬부터 풀어 줄게!”
할 일을 찾아 다행이다.
나는 서둘러 성력을 끌어 올렸다.
크루엘로를 묶어 둔 사슬은 그저 사지를 결박하고 마법을 쓰지 못하게 막아 둔 형태로 보였다.
원래 주문에 마나를 틀어막는 기능은 없으니 기존 주문을 수정한 모양인데 물리적으로 풀어내기만 하면 그뿐이라 해지는 쉬웠다.
그러면서 내심, 크루엘로가 성력을 보고 내 정체를 알아보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무슨 생각인지 내가 결박을 풀어내는 동안에도 내내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설마 사슬을 다 풀면 나를 공격하는 건 아니겠지?
불안해졌지만, 그렇다고 이 애를 마냥 묶어 둘 수도 없었다.
음, 솔직한 심정으로는 치고받고 싸우면서 이 민망함을 정리하는 것도 좋을 것 같지만, 그건 너무 나만 생각한 거겠지.
“다 됐……. 읍?”
그러나 크루엘로의 결박을 다 풀어낸 순간 생긴 일은,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범주의 사건이 아니었다.
그러기를 기다려 왔던 사람처럼 그는 자연스럽게 내 뒷머리를 감싸 당기고 고개를 숙였다.
마르고 갈라진, 그러나 따뜻한 살덩이가 입술에 닿았다.
당황해 입을 벌리자 그 틈으로 타인의 숨결이 섞여 들어왔다.
지금…… 무슨…… 일이?
나는 내게 벌어진, 아니 벌어지고 있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박였다.
문제는 난데없이 입을 맞춘 크루엘로 또한 눈을 감지 않은 채라는 것이다.
그 붉은 눈동자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목덜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잠, 이게 뭐, 크루!”
입술이 엇갈릴 때마다 나는 최대한 그를 만류하려 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크루엘로는 한 손으로는 내 허리를 끌어안고 다른 손으로는 내 뒤통수를 감싸 도망칠 수 없게 하고 계속해서 입을 맞추었다.
그건 그저 맞닿아 있는 것과는 명백히 다른 행위였다.
입술을 비비고 깨물고 내 숨결을 그의 것인 양 가로채 간다.
이따금 입을 떼어 가까스로 숨을 고를 수 있었으나 점점 머리에 열기가 올랐다.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이 꺾일 것 같은 때에 그가 얼굴을 떼어 냈다.
그러나 여전히 크루엘로의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였기에 떼어 냈다는 말도 무색했다.
가까이에서 그가 속삭였다.
“늦었어, 라스티.”
그는 한 번 더 내게 입을 맞추고 나를 품에 가두었다.
그대로 부스러진다고 해도 믿을 만큼 나를 힘껏 끌어안고 억눌렀던 마음을 털어놓았다.
“죽을 것 같았어. 진짜로 죽는 줄 알았어.”
“……응.”
잔뜩 마르고 갈라진 목소리.
언뜻 무감하게 들리는 그 안에는 오래도록 억눌러온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아아.
크루엘로가 애원했다.
“이젠, 가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