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마리오네트-131화 (131/162)
  • 131화

    도착지는 어떤 호숫가였다.

    어느 남작령이랬나, 수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다.

    거대한 물웅덩이를 보니 절로 안 좋은 추억이 떠올랐다.

    “물속에 아지트를 처박아 둔 것도 에덴의 생각이겠지.”

    겨우 기어 올라왔는데 이번엔 호수로 들어가야 한다니.

    물이 싫어질 것 같아.

    “정말, 같이 가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미로 마법이 걸려 있다면서요. 혼자서 다녀오는 게 대처하기 편할 것 같으니까 마차나 지켜 줘요.”

    데이디어는 다소 찜찜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뛰어들기에 앞서 주문을 외웠다.

    “수정modification.”

    얼굴에 덧씌워 놨던 피부 가죽이 지워지고, 온몸을 감싸는 투명한 막이 생겼다.

    이러면 옷이 젖지도 않고 수중에서도 숨을 쉴 수가 있다.

    아무렴, 물에서 허우적거린 전적이 있는데, 대비도 없이 들어가는 멍청이는 아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는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풍덩! 커다란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호수에 들어가자마자 맑았던 물이 뿌옇게 흐려지며 방향 감각이 사라진다.

    이게 데이디어가 말했던, 미로 마법인가.

    안쪽에서부터 복잡하게 얽힌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나는 헤엄을 멈추고 성력을 끌어 올렸다.

    ─3주문. 정화purification.

    마치 미로 마법이 내게서 도망치는 것처럼 시야가 깨끗해졌다.

    그러나 마나는 금세 가던 길을 돌아와 다시 나를 방해하려 들었다.

    마법진을 파괴하지 않는 한, 계속 이 짓거리를 벌일 게 분명했다.

    어지간한 마나양으로는 감당도 안 되겠네.

    물론 내겐 해당 사항이 없었다.

    “정화purification.”

    나는 초 단위로 정화를 쓰며 아래로 내려갔다.

    호수는 제법 컸으나 지형이 단순해 길을 찾기 쉬웠다.

    머잖아 목적지가 눈에 들어왔다.

    청록빛 물을 배경 삼아 선 새하얀 신전은 퍽 운치 있어 보였다.

    그 외관이라는 게 내가 늘 보던 건물과 몹시도 흡사했다는 게 문제였지만.

    푸가 신전을 여기에 재현해 놨네.

    덕분에 그 신전을 몸소 깨부수고 온 나로서는, 유령이라도 살아 돌아온 것 같았다.

    껄끄러운 마음을 누르고 나는 안으로 들어섰다.

    신전에 마법적인 처리를 해 두었는지, 틈이 있었음에도 건물 안으론 물이 차오르지 않았다.

    “푸하!”

    딱히 숨을 참고 있던 건 아니지만, 분위기상 내뱉어 봤다.

    내부 구조는 내가 알던 곳과 더더욱 비슷했다.

    “괜히 찝찝하네.”

    기껏 바깥으로 나간 보람도 없이 원래대로 돌아온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나는 팔을 쓸면서 걸음을 옮겼다.

    구조도 그대로였기에 헤맬 일은 없었다.

    내부에서 느껴지는 단 하나의 기척을 향해 움직였다.

    상대는 아마도 크루엘로, 아니라면 에덴이겠지.

    위치는 안쪽의 제단.

    푸가 신전을 기준으로 한다면 페불라의 신상이 서 있던 장소다.

    나는 발소리를 죽이지 않고 그리로 향했다.

    공간을 잇는 아치형의 통로를 지난 순간, 나는 데이디어가 이번에도 정답을 맞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

    새하얀 신상이 있어야 할 자리, 그곳엔 장신의 사내가 묶여 있었다.

    의식이 없는지 고개는 떨어진 채였고 흐린 하늘빛 머리칼이 쏟아지듯 흘러내렸다.

    얼굴은 거의 보이질 않는 데다가 가벼운 셔츠 차림.

    그럼에도 검은 사슬에 결박된 그 모습은 주변과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성화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그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굳은 것이 아니었다.

    “진짜…… 크루엘로다.”

    심장이 박동한다.

    온몸이 들끓는 것처럼 피가 지나는 자리마다 그 흔적이 또렷이 느껴졌다.

    어째서 이런 기분이 드는지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바깥에서 흘러간 시간은 겨우 두 달 남짓, 그조차 나는 체감할 수 없었으니 내 기준으로는 단 며칠 만의 재회였다.

    몸을 바꿀 때마다 크루엘로는 몹시 달라졌으나 이번은 그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벅차오르는 걸까.

    나는 머뭇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결박을 풀어 줘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손이 멋대로 움직여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뜨겁지는 않으나 죽은 사람처럼 차갑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온기.

    크루엘로가 살아 있다는 확신에 나는 느리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순간, 감겨 있던 눈꺼풀이 올라간다.

    진홍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

    새하얀 빛이 꺼졌을 때, 시오라는 마치 끈 떨어진 인형 같았다.

    그 몸이 죽기 전부터 끌어안고 있었음에도 크루엘로는 그녀의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을 생생히 느꼈다.

    시오라의 손이 툭 떨어졌을 때 그의 심장도 함께 떨어지는 듯했다.

    아직은 따뜻했다.

    그러나 크루엘로는 인간의 체온이란 게 얼마만큼 낮아질 수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돌아온다고 했는데.”

    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죽는 게 아니라고, 이번에는 사라지지 않는 몸으로 오겠다고.

    분명히 그런 약속을 들었는데도 듣지 못한 척, 마음은 또다시 사랑하던 이의 죽음을 맞았다.

    시오라 보네티가 죽었다.

    솔직히 말해, 익숙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무뎌지지 않는 걸까.

    그는 몇 번이고 해 온 고민을 다시금 떠올렸다.

    발밑이 아득했다.

    눈물이 툭툭 떨어져 내렸으나 크루엘로는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또다시 소중한 이의 시체를 끌어안은 기분이란.

    크루엘로는 죽고 싶었다.

    얕은 희망에 현혹되어 발버둥 치기에 그는 너무도 지쳐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배신하지 않을게, 반드시 돌아올게.”

    “기다려야지.”

    기다려야지, 그래.

    온다고 했으니까.

    거짓일지언정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으니까.

    기약이 있으니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단 한 번만.

    그러면 네가 올까.

    크루엘로는 시오라의 시신을 가득 끌어안고 그 어깨에 뺨을 비볐다.

    누가 봐도 애처로운 몸짓이었다.

    사내는 게이트를 열었다.

    기절한 미뉴엣과 사랑하는 이를 데리고 그 너머로 사라졌다.

    크루엘로가 향한 곳은 검은 뱀 교단에서 은신처로 쓰던 수중 신전이었다.

    드나들기 너무 힘들다는 이유로 폐기되었으나 신전에는 교단으로 드나들 때 필요한 출입패가 보관되어 있었다.

    한창 검은 뱀 교단을 조사하던 때 크루엘로는 그것을 훔쳐 두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그 장소를 쓸 일이 생길 줄은 몰랐지만.

    오래도록 관리되지 않은 탓에 건물 상태는 영 좋지 않았다.

    먼지가 뿌옇게 이는 곳을 가로지르며 그는 기계적으로 대책을 생각했다.

    ‘에덴을 어떻게 해야 할까.’

    죽이면 안 된다.

    미뉴엣을 죽이지 말아 달란 부탁에 속이 뒤틀려 비꼬았지만, 크루엘로도 그녀를 죽이는 게 의미 없다는 데는 동의했다.

    그렇다고 눈을 뜨게 해서도 안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골치 아픈 적이 될 테니까.

    ‘그대로 하면 되겠네.’

    크루엘로는 신전의 가운데에 마법진을 그렸다.

    부활의 진을 익히기 위해 공부해 둔 터라 그는 테타니오에 근접한 수준까지 능숙하게 진을 다룰 수 있었다.

    그 위에 거대한 얼음 기둥을 세우고 안에 에덴을 가두었다.

    진에 마나가 공급되는 한 얼음은 녹지 않을 것이고 그는 계속 잠들어 있을 것이다.

    크루엘로가 할 일은 마법진을 지키며 라스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시간이 많아졌다.

    그러니 생각도 많아졌다.

    크루엘로는 멍하니 얼음 기둥을 바라보는 채로 때로는 희망을, 때로는 절망을 곱씹었다.

    머릿속에 거미가 줄을 치는 것처럼 상념은 복잡하고 의식은 흐려진다.

    그는 마치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살았다.

    입에 뭘 넣지도 않고 잠도 제대로 자지 않으며 기다렸다.

    그렇게 가까스로 풋잠에 들며 버티던 어느 새벽.

    콰득!

    별안간 날아든 사슬이 그의 목을 조여 들었다.

    ***

    콜록, 기침과 함께 크루엘로가 눈을 떴다.

    어느새 사지는 결박당해 있었다.

    그의 눈앞에 보인 건 얼음 기둥에 갇혀 있어야 할 여자였다.

    긴 은발, 여유로운 듯하나 화가 잔뜩 난 얼굴.

    ‘아직도 에덴이군.’

    크루엘로는 기계적으로 판단하며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갑작스럽게 공격당했으나 이 상황에 별로 화가 나지도 않았다.

    감정에 통째로 색이 빠져나간 것처럼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는 다만 책임감으로 물었다.

    “……어떻게 깨어난 거지?”

    “별로 귀여운 반응은 아니네.”

    에덴이 비죽 웃었다.

    “원래 이 몸의 주인이 포기를 모르더라고. 내가 잠든 새 몸을 되찾고 싶었는지 버둥거리던데. 덕분에 나도 의식이 깨었어.”

    그는 크루엘로의 물음에 순순히 답해 주었다.

    어쩌면 크루엘로의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 좋은 일을 하려고 저항해 준 건 아니겠지만 덕분에 살았지. 고마운 일이야.”

    “미뉴엣 보네티…….”

    아직 살아 있다는 말이 진짜였던가.

    “그런데 왜 혼자야? 내 동생은 어디 갔어.”

    “…….”

    “버림받았어?”

    그 말이 너무도 정확하게 들려서 크루엘로는 무심코 실소했다.

    “하기야 그 아이도 무리했었지. 이번 몸도 못쓰게 됐겠구나. 그러면 나도 곤란하네.”

    “…….”

    “나타난 텀을 보면 시차는 4년 정도였나. 꼼짝없이 그 시간을 날리긴 싫은데 말이야.”

    마치 혼자 있는 사람처럼 중얼거리던 에덴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크루엘로의 앞에 쭈그려 앉아 턱을 괴었다.

    “너는 제대로 악당의 역할을 해 줄 생각은 없을 테고. 내가 선역도 악역도 할 수는 없는 거고.”

    올려다보는 녹빛 눈동자엔 유리구슬처럼 온기가 없었다.

    “모리온을 억지로 삼키게 해 볼까. 그러면 자아가 좀 파괴적으로 바뀔 것 같은데.”

    마치 물건을 품평하듯 에덴은 크루엘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곧, 빙그레 미소 지었다.

    “뭐. 좀 여유 있게 가 보자, 아직 모리온이 필요한 때는 아니니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수정modification.”

    무슨 말을 들어도 별로 반응하지 않던 크루엘로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에덴의 외관이 변하고 있었다.

    키가 훌쩍 자라고 길었던 은발이 짧은 하늘빛 머리칼로 변했다.

    초록빛 눈동자는 붉어졌고 섬세하고 선이 가는 이목구비가 남성적인 색으로 물들었다.

    그리하여 에덴의 껍데기는 완전히 크루엘로처럼 변했다.

    잠자코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크루엘로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껍데기를 가져가네?”

    “지금은 이거면 충분하거든.”

    “구태여 미뉴엣 보네티의 몸을 계속 쓸 이유도 없어 보이는데.”

    미뉴엣의 몸을 차지한 게 시오라 때문이었다면 이제는 다른 몸으로 갈아타는 게 효율적이지 않은가.

    시오라더러 저를 죽이라고 그렇게 독촉했으면서 왜.

    그러다가 문득 크루엘로는 시오라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아.

    그는 무감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페불라는 자연스러운 걸 좋아한다 했지. 그러면 자살은 안 되나 봐?”

    “…….”

    “그 껍데기 수명이 다할 때까지 써야 하는구나, 에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