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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30화 (130/162)

130화

내 속을 알 리 없는 가보트는 그제야 눈치챘다는 듯, 크루엘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사내는 어느새 걸음을 멈춘 상태였다.

“아직 안 가셨습니까, 전하? 조사는 진작 끝났는데요.”

“……뭐.”

그는 김이 샜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인사도 없이 돌아섰다.

아무래도 데이디어한테 노리던 게 있었나 본데.

우리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크루엘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기척이 아예 사라졌을 때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하아…….”

“후.”

이건 좀 웃겼다.

종전의 삐딱한 기세는 허세였는지, 가보트가 힘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조심해, 데이디어. 저 새끼 실종됐다 돌아오고 나니 한층 더 단단히 미쳤어.”

“무슨 소리지?”

“조금 전에 궁인을 여럿 벴어. 죽은 사람은 없는데 딱 네 수행인 또래의 여자였거든.”

벴다고?

되묻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

입술을 꾹 누르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시오라가 아니다.

내게 가보트와의 친분은 없다.

나는 데이디어의 수행인이다.

고로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뭘 확인하겠다나, 지루해 죽겠다나. 미친 소리를 지껄이던데 이번이 처음도 아닌가 봐. 좀 조심하라고.”

“조언 고맙다. 용기를 내서 끼어들어 준 것도.”

“그쯤이야, 뭐. 지금 날 건드릴 생각은 없는 것 같았으니 괜찮아. 그리고 이건, 아까 내 파트너를 통해서 확인한 건데.”

그는 소리를 낮추어 말하려다가 문득 나를 보고 멈칫했다.

이어 데이디어에게로 향하는 시선에는 명백한 뜻이 담겨 있었다.

새어 나가면 안 되는 이야기니 믿을 수 없는 사람이면 비키게 하라고.

무언의 몸짓에 울컥하여 가보트의 정강이를 한 대 차 주고 싶었지만, 나는 어른답게 참았다.

데이디어가 내 인내심에 도움이 되었다.

“믿을 만한 사람이다. 말해도 괜찮아.”

“……공작이 군부 쪽 인사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 같아. 개중에 리코드 대공도 끼어 있는 모양이던데.”

리코드 대공이라면 황제의 사촌 동생이었지, 아마.

잘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황족과 군부 쪽 인사라는 말이 엮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졌다.

〈운명〉의 초반부에서 황제는 죽고 보위는 다음 대로 넘어간다.

반란 때문에 일어난 사건은 아니었으나 내가 황제의 사슬을 풀어 준 탓에 계획을 수정한 거라면, 납득할 수 있다.

물론 책에서 일을 벌인 주체는 에덴이 아니라 크루엘로였지만, 〈운명〉도 인간이 쓴 책이다.

겉으로 보이는 이야기만 담았을 테니 놓친 부분이 있었다고 하면…….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신전에서도 예의 주시 중인지 최근에 신도들의 방문을 막아버렸던데 뭔가 일이 터질 판이야. 너도 주의하라고.”

“고맙다, 가보트.”

“큼! 그러면 나 간다.”

“잠깐. 누이에 대한 소식은 없나?”

멋쩍어하던 가보트의 얼굴에서 표정이 빠져나갔다.

그에게선 한 번도 보지 못한 분위기였다.

하기야, 미뉴엣과 사이가 정말 가까웠으니 걱정하는 것도 당연하지.

부친을 잃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 더더욱 그럴 것이다.

부채감에 속이 쓰려 고개를 수그린 순간, 그의 답이 들렸다.

“없어, 어느 쪽도.”

어느 쪽……?

아.

그랬지.

시오라도 가보트의 누이였었지.

습관처럼 가족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는데도, 이런 말을 들으니 누가 눈물샘을 누른 것 같다.

콧잔등이 시큰거려 통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때, 가보트의 발치에 매달린 작고 동그란 새가 눈에 들어왔다.

볍씨도 같이 있었구나.

왜 하필이면 내가 눈물이 날 것 같을 때 그의 발등에 올라 타 있는 거람.

“그렇군. 민감한 이야기를 물어 미안하다.”

“됐어. 네 쪽에 소식 들어오면 그거나 알려 줘.”

피아니시모는 내게 호기심을 느꼈는지 이리저리 고개를 기웃거리면서 내게로 슬쩍 다가왔다.

나는 픽 웃으며 인사하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놀랐는지 뱁새가 삑! 크게 울며 가보트의 몸을 타고 올라갔다.

몸이 조그매서 그런지 간덩이도 콩알만 한가 봐.

“뭐야, 왜 이래, 피아니시모!”

그는 놀라서 뱁새를 쓰다듬으면서도 나를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나는 데이디어를 본받아 얼굴에서 표정을 싹 거두었다.

실제로 내가 뭘 한 건 없다.

흥, 인사만 했는데 네 새가 겁보인 걸 어쩌라고!

결국, 내게서 혐의점을 찾아내지 못한 가보트는 다시 한번 데이디어에게 인사를 건네고 몸을 돌렸다.

그의 품에서 오들오들 떨던 피아니시모는 가보트의 어깨 위로 올라와 나를 훔쳐보았다.

고개를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는 모양새가 귀엽긴 했다.

나는 사람과 새가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결심을 굳혔다.

“……좋아.”

일이 다 끝나면 말하자.

혼자 울컥하고 눈치 보고 감동하며 지지리 궁상을 떠는 모습은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다.

보네티 남매에게 내가 시오라가 아니라는 암시도 은연중에 줬으니 복선도 충분하다.

이 마당에 다시 가족이 될 순 없겠지만 친구라도 되어야겠다.

말한다!

고백한다!

털어놓는다!

그리고 오늘 느낀 서운함 값까지도 다 받아 내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의욕이 불타올랐다.

나는 씩씩한 걸음으로 휙 몸을 돌렸다가 미묘한 표정의 데이디어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혼자가 아니었지.

“공작을 만나려던 게 아니었나?”

“아, 내가 만나려고 했던 건 진짜라서.”

“좀 전에 본 사람이 가짜라는 말로 들리는데.”

“맞아.”

방금 그 사람은 진짜 크루엘로가 아니다.

한눈에 알았다.

외관, 목소리, 표정이 똑같긴 했지만, 그렇게 따지면 에덴이 들어간 미뉴엣도 본체와 같았다.

미뉴엣도 알맹이가 바뀐 걸 바로 알아봤는데 크루엘로를 헷갈릴 리가 있나.

함께한 세월이 없었더라도 알아봤을 것이다.

페불라의 권능을 넘겨받은 이후, 감이 더 좋아졌으니까.

크루엘로가 나올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 가짜가 나온 거겠지.

그러면 진짜는 어떻게 됐을까.

괜스레 불안해지는 마음을 나는 애써 억눌렀다.

에덴에게도 크루엘로의 가치는 명백하니 죽였을 리 없어.

살아만 있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어떻게 확신하는 거지?”

“직감?”

곧바로 무시당할 줄 알았는데 데이디어는 뜻밖에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러면 직감으로 진짜 공작이 있는 곳도 알아낼 수 있나?”

아니, 외려 무시당한 건가.

나는 떨떠름하게 정정했다.

“그쯤 되면 계시고. 뭐라고 할까……. O, X를 구분하는 정도?”

“객관식은?”

“데이디어, 무슨 시험 답지라도 필요해?”

“틀린 말은 아니군.”

“뭘 알고 싶은 건데?”

“일단 마차로 가지.”

마차로 돌아온 데이디어는 의자 밑에서 낱장의 서류를 꺼냈다.

저번 일 때문인가, 왠지 그 손에 자료가 들려 있으면 한층 믿음직스러워지는데.

나는 그걸 건네받아 내용물을 살폈다.

스무 개 남짓의 장소가 리스트로 정리되어 있었다.

얼핏 보기엔 꼭 재산 목록 같다.

“검은 뱀 측에서 쓴 적 있는 아지트 목록이다. 지금에 와서는 수도의 한두 개만 이용 중인 것 같았다만, 어쨌거나 그쪽의 재산이지.”

그 말을 듣고 보니 눈에 익은 장소가 몇 군데 적혀 있었다.

“내가 들어가 볼 수 있는 장소는 전부 확인했지만, 단서는 없었어. 하지만 세 군데는 확인할 수조차 없었지.”

“왜?”

“타국에 있는 게 하나, 땅이 매몰되어 건물째로 무너져 내린 장소가 또 하나, 그리고 물속에 있어 위치를 특정할 수 없는 곳이 마지막 하나.”

“내 말은, 왜 그걸 확인했냐는 뜻이야.”

나는 고개를 수그린 채로 눈동자만 굴려 데이디어를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쳤다.

“보네티의 사용인 하나가 증언하더군. 실종되기 전 백작의 분위기가 이상했다고. 공작을 초대하고 시오라를 끌어들인 것도 백작의 지시였다고 말이야.”

“실은, 백작님께서 좀 이상해요.”

베티는 입이 무거운데.

내 생각을 꿰뚫어 본 것처럼 설명이 이어졌다.

“가보트가 내게 협력하라고 지시해 준 덕에 들을 수 있었다. 내게 먼저 도움을 청한 것도 그 친구였으니.”

어쩐지, 아까 정보를 교환하던 모습이 제법 익숙해 보이더라.

“분위기라는 건 근거로 삼기엔 참 빈약한 항목이다. 주변인은 잠깐 이상하게 여기더라도 문서화시켜 정리하기엔 너무도 주관적이지.”

“정확히는, 남의 몸을 빼앗아 그 인생을 대신하는 존재가 있을 거란 가설입니다.”

“아쉽게도 근거는 그뿐이라 내세울 수는 없겠지만요.”

나는 데이디어가 가져왔던 자료와 그녀의 말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자료에는 에덴도 있었다.

그리고 에덴이 죽었다는 건 딱히 비밀도 아니었다.

데이디어는 이미 확신하는 눈치였다.

에덴의 몸이 죽고 그 영혼이 미뉴엣에게로 옮겨 왔다고.

“덧붙이자면 나는 공작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죽일 의향이 있었다면 진작 그 목숨을 거뒀을 테니까.”

“…….”

“가짜 공작이 모습을 드러낼 정도라면, 진짜는 어딘가에 갇혀 있을 확률이 크겠군.”

덧붙여, 데이디어가 굳이 내게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그녀에게 또 다른 확신이 있기 때문이겠지.

“망상을 해 봤습니다. 남의 몸을 쓰면서 긴 세월을 거쳐 온 이가 있다면 꼭 하나뿐일까 하고.”

나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러면 시오라 보네티는 어디에 있을 것 같은데?”

“그쪽은 전혀 짐작할 수 없었지만, 오늘에 와서는 살아 있다는 걸 알겠더군.”

“왜. 마침 시오라와 같은 신을 섬긴다는 신도가 등장해 줄리안을 찾아서?”

“희한한 일이지. 레이디 시오라는 내가 숨겨 놓은 줄리안을 잘도 찾아내더군. 나중에 들으니 목에 웬 사슬 조각이 박혔다던데.”

“……나는, 줄리안한테 시오라가 죽었다고 확답했어.”

“이런 상황에 줄리안에게 온전한 진실을 말할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는군.”

그 능청스러운 말에 어이가 없었다.

거기에 가보트를 대하는 내 태도 같은 게 결정타가 됐겠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행동을 조심하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그런 발상을 떠올리고 확신하여 내뱉는 데이디어의 언행이 정말로 재미있었다.

“내가 감탄해야 해요, 아니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발뺌을 해야 해요?”

사실상 내가 시오라와 같은 사람이라고 시인하는, 항복 선언이었다.

데이디어의 입가에 느슨한 미소가 걸쳤다.

“힌트는 넘치도록 주셨습니다. 뚱딴지같은 소리에도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레이디는 그렇게 나이가 많지 않다고요.”

“보통은 그걸 힌트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경도 그땐 못 알아들었잖아요.”

“어리석게도 지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데이디어의 두 눈은 성취감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래, 나라도 이런 걸 맞혔다면 퍽 기뻤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승리감을 만끽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데이디어는 금세 제 감정을 수습하고 본론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이 장소 중 짐작 가시는 곳이 있습니까?”

“네. 보자마자 알 것 같더라고요.”

나는 리스트의 한 곳을 가리켰고 곧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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