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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29화 (129/162)
  • 129화

    “뭐, 내 신이 누군지는 직접 알아보고.”

    기분이 다운되자 반대로 이성이 치고 올라왔다.

    지금이 놀고 있을 때는 아니지.

    나는 교차 검증을 위해, 데이디어에게 보네티의 상황을 다시금 확인했다.

    그리고 충격을 받았다.

    “줄리안이 거짓말을 안 했다니!”

    당연히 간교한 거짓말로 나를 현혹했을 줄 알았는데!

    줄리안의 평소 언행을 보고 내린 판단이었지만 기분이 상했는지 그는 미간을 찡그렸다.

    “내게 뭘 원하든 협력하겠다. 사슬은 풀어 다오.”

    “사슬만 풀고 도망갈 줄 어떻게 알고.”

    “제복 안쪽에 돈주머니가 있다.”

    “겨우…….”

    음.

    나는 슬금슬금 사슬을 움직여 보았다.

    아니, 뭐, 소지품 검사쯤은 해야 하잖아.

    위험한 걸 가지고 있을 수는 있고.

    데이디어의 겉옷을 열자 주머니가 보였다.

    슬쩍 가져와 천을 열어젖히자 황금빛이 내 시야를 찔렀다.

    나는 황홀해 중얼거렸다.

    “이게 바로 몸값…….”

    앗, 현혹될 뻔했다!

    “그리고 공작에 대한 추가 정보가 있다.”

    “뭐?”

    “줄리안은 숨어 지내는 터라 소식이 늦었을 뿐이니 탓하지 않으면 좋겠군.”

    “……데이디.”

    “그래서 줄리안을 풀어 주면 알려 주겠다, 그런 말이야?”

    “아니. 다시 모습을 보인 건 일주일 전쯤, 보네티에서의 일로 조사를 받는 중이라 하더군.”

    아무것도 협상하지 않았는데 말이 줄줄이 흘러나온다.

    나는 조금 당황했으나 데이디어는 별일 아니라는 듯, 할 말만을 계속했다.

    “매일같이 황궁에 들락거리고 있다 하니 입궁하면 만나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신원이 불확실한 몸으론 힘들겠지만.”

    “그래서?”

    “입궁만이라면 내 수행인으로 위장해 도울 수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줄리안은 보내야 해. 이 친구는 세상에 너무 알려져 있으니까.”

    어쭙잖은 채찍 대신, 당근을 줄 테니 인질을 포기해 달란 건가.

    줄리안 납치 사건에 화가 났을 텐데도,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대하는 솜씨가 노련하다.

    마차 문을 뜯을 때와 달리, 고저 없이 침착한 목소리가 제안의 신빙성을 높였다.

    확실히, 괜찮은 사람이다.

    “어떻게 할 거지?”

    나는 줄리안을 묶은 사슬을 풀어 주며 빙그레 웃었다.

    데이디어도 나를 따라 미소 지었다.

    ***

    줄리안을 놓아주고 우리는 데이디어가 부른 마차로 갈아탔다.

    “일단 그 얼굴은 어떻게 하는 편이 좋겠군. 너무 눈에 띄어서 의심을 받을 테니까.”

    데이디어가 완곡하게 내 외모를 찬양했다.

    “그냥 후드를 눌러쓰는 건 안 되겠지?”

    “궁에서 얼굴을 가리는 건 위법이다. 그건 나도 해결해 줄 수가 없어.”

    “그러면 잠깐만.”

    신성 주문 중에, 외관을 달리 보이게 하는 주문은 없다.

    하지만 다른 건 있지.

    이제 성력도 넘쳐나는 판이니 닭 잡는 일에 소 잡는 칼을 쓸 수도 있었다.

    나는 아낌없이 성력을 끌어 올리고 주문을 외웠다.

    ─9주문. 수정modification.

    본질을 바꿔 버리는 주문이다.

    그러나 껍데기를 아예 다 바꿨다가는 원래의 몸으로 돌아올 자신이 없었기에, 얼굴에 가면을 덮어씌우는 것처럼 새로운 거죽을 덧씌웠다.

    돌아올 땐 그것만 뜯어내면 되게끔.

    눈구멍을 좀 작게 내고 콧대도 낮춰서 되도록 평범한 형상을 만들었다.

    거울이 없었기에 내 눈으로 확인할 순 없었지만, 다른 눈은 있었다.

    “어때? 눈에 안 띄지, 세상의 40%쯤은 이런 얼굴일 것 같지?”

    “……35%쯤은.”

    5%야 딱 좋은 오차 범위다.

    “변신 마법인가?”

    “대충 비슷해.”

    얼굴을 손본 뒤, 나는 데이디어의 진짜 수행인이 가져다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내 사제복과 로브는 마차에 보관해 두기로 했다.

    의복까지 갖추어 입자, 겉으로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아마 에덴과 마주쳐도 어지간히 가까워지지 않는 한 그 또한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페불라의 성력이란 수준이 높아질수록 더 자연스러워지니까.

    말로만 들었을 때는 잘 몰랐으나, 서로 패를 까기 전까지는 나나 에덴도 서로에게서 성력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설령 알아본들 이제는 내 쪽이 포식자였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했다.

    몸을 바꾼다거나 인질을 잡는다거나 찾을 수 없게 숨어든다거나, 그가 고를 수 있는 패는 여전히 많았으니까.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데이디어는 시간을 확인하고 말했다.

    “오늘분 조사를 마치고 궁을 나올 시간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마주치겠군.”

    “딱 맞춰 왔네. 좀 돌아가자, 마주칠 생각은 없거든.”

    “말을 섞지 않아도 괜찮단 말인가?”

    “응. 멀리서 확인할 수 있는 정도가 좋아.”

    크루엘로가 나타났다고는 하는데 타이밍이 공교로워 의심스럽다.

    본인이라는 확신이 들 때까진 조심해야지.

    추가적인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으나 데이디어는 나름대로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마차의 문을 열려는 듯하기에 고개를 저으며 그 앞을 막았다.

    “뭐지?”

    “수행인인 척하라며.”

    나는 대신 문을 열고, 웃으며 그녀에게 팔을 내밀었다.

    “모시겠습니다, 크림슨 경.”

    “원래도 에스코트를 받고 마차에서 내리진 않지만.”

    데이디어는 실소하면서도 장단을 맞춰 주었다.

    우리는 마차에서 내렸다.

    황궁이 눈앞에 보였다.

    염려한 것보다 입궁은 수월했다.

    하기야 원래도 이런 느낌이었지.

    권력자가 옆에 붙은 덕이 커 보였지만 나는 괜히 안도했다.

    얼굴을 바꾸고 들어온 지라 암살자가 된 것 같아서 그만.

    속으로만 생각하며 나는 크루엘로가 지나간다는 길 근처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당연하게도 황궁 역시 별로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끔찍하리만치 화려하고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모리온이라든가, 에덴의 계획 같은 건 하나도 모르겠다는 듯 일상적인 광경이 자못 순진무구해 보였다.

    내가 실패하면 여기도 폐허가 되겠지?

    새삼 책임감이 들었다.

    “말하는 걸 잊었다만, 황궁에서 조사를 받는 건 공작뿐만이 아니다.”

    “뭐? 그럼 누가……. 가보트 보네티?”

    보네티 사건의 관련자 중, 실종되지 않은 건 가보트뿐이다.

    아니나 다를까 데이디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레이디 시오라의 행방을 알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이지. 내겐 말해 주지 않았다만, 만나고 싶다면 자리를 마련해 주지.”

    “됐어, 공작만 보면 돼.”

    만나야 할 사람은 크루엘로였고 알아야 할 건 에덴의 행방이다.

    가보트를 만난들 소득은 없을 것이다.

    마음만 심란해지겠지.

    어쩌면 이전의 삶에서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 없던 건, 내게 행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을 준 인간관계가 백지로 돌아가는 건 생각보다 마음 아픈 일이었으니까.

    생각은 자연스럽게 내내 마음을 줬던 유일한 사람에게로 흘러갔다.

    크루엘로.

    몸을 바꾸어 가며 그를 만났을 때, 내가 느낀 건 충격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 속에 고통도 섞여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잠깐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훌쩍 키가 크고 성격이 변하고 나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한다.

    막상 그 일을 겪을 때는 머릿속에 다른 생각으로 가득했는데, 돌이켜 상상해 보는 지금은 마음이 욱신거렸다.

    부정적인 감정을 외면하며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어서 무뎌진 걸까.

    아니면 감성을 억눌러 왔던 반동으로, 나지도 않은 상처를 핥고 있는 걸까.

    “악!”

    “갑자기…….”

    아직은 머릿속을 가볍게 하는 태도가 더 유용한 것 같아.

    나는 휙휙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하면 우울감이 날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당황해하던 데이디어가 곧 화제를 돌렸다.

    “황궁을 나서면 어쩔 거지.”

    “너무 귀찮게 하진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콕 집어 나를 찾아온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편하잖아. 인질만 하나 잡으면 돈, 정보, 기동성이 다 따라올 텐데.”

    데이디어가 직업병 때문에라도 그 일을 파 봤을 거란 계산도 있었다.

    저번의 통계 자료는 상당히 쓸 만했으니까.

    “줄리안을 찾는 쪽이 더 힘들지 않았나.”

    “다아 방법이 있지.”

    성의 없게 대답하는 동안, 드디어 기다리는 사람이 나왔다.

    먼발치에서 하늘빛 머리칼이 보였다.

    내가 알기로 제국에 그런 머리 색은 하나뿐이다.

    크루엘로!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자세히 살피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번개가 내리친 듯한 기묘한 감각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동시에 나는 데이디어의 소매를 잡아당기고 몸을 돌렸다.

    “확인하려던 게 아니었나.”

    당황한 그녀는 되물으면서도 내 뒤에 따라붙었다.

    “일단은 그냥─.”

    “크림슨 경?”

    크루엘로의 목소리가 내 말을 잘라먹었다.

    이런.

    제법 먼 거리였는데 데이디어한테 알은체를 할 줄이야.

    별수 없이 그녀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나도 그를 확인했다.

    하늘색 머리칼에 올려다보려거든 목이 아플 정도의 장신.

    어딜 가든 시선을 집어삼킬 것처럼 아름다운 사내가 여유롭게 다가오고 있었다.

    뒤로는, 평소 대동하지 않던 수행인들이 배경처럼 늘어서 있었다.

    처음, 별 감흥이 없는 듯하던 얼굴은 데이디어와 시선을 마주한 순간 변했다.

    눈이 가늘어지고 입꼬리가 깊이 패며, 명백히 상대를 경시하는 미소가 그려진다.

    평소 크루엘로가 짓던 표정이었으나 나는 거기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다.

    “안녕하십니까, 공작전하.”

    “경을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황궁엔 어쩐 일이지?”

    “만날 사람이 있어 입궁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조사를 받고 나오시는 길입니까?”

    “만날 사람이라…….”

    묘한 투로 말끝을 흐리며 사내가 다가왔다.

    간격은 빠르게 가까워졌다.

    다섯 걸음, 네 걸음, 세 걸음.

    그 기세는 마치 사냥감에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시선이 지나가듯 내게로 향하는 순간.

    누군가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가보트였다.

    “뭐야, 데이디어. 너도 황궁에 와 있었냐?”

    아니, 진짜, 뭔!

    그야말로 유령 같은 등장이라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어떻게 나날이 기척이 줄어들어?

    왜 내 몸으로도 눈치채지 못한 건데?

    이쯤 되면 내 성력의 은밀함을 자랑하지도 못할 수준이다.

    나는 가슴께를 부여잡고 남몰래 가보트를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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