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가장 먼저 보인 건, 봄꽃 같은 연분홍색 머리칼이었다.
그 외에 엄청난 변화는 없었다.
겨우 두 달가량이 지났을 뿐이라니까, 뭐.
그는 나를 한껏 경계하다가 눈이 마주친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시오라라는 걸 눈치챈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그렇게 상상력이 좋은 타입은 아니었다.
그래도 조금 신경이 쓰여서 나는 초면임을 강조하는 인사말을 골랐다.
“안녕? 네가 줄리안 미네르바지?”
“……누구냐.”
퍼뜩 정신을 차린 줄리안은 다시 나를 경계했다.
다행히 나를 알아본 것 같지는 않은데 내뱉을 답이 궁색해졌다.
내가 누구냐고?
줄리안이 이제 와 에덴에게 붙을 리는 없겠지만, 시오라였다고 말하기도 곤란하다.
다른 걸 떠나서 진실을 고백하려면 수백 가지 설명을 곁들여야 했다.
귀찮아, 시간 없어.
“네 생명의 은인의…… 아주 소중한 사람?”
아무렴 나 자신은 소중하지.
“데이디어?”
얘는 무슨 입만 열면 데이디어래.
“시오라 보네티!”
정정해 주자 그는 마땅치 않아 하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내가 살려 준 걸 알긴 아나 보군.
별로 대화에 협조할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나도 줄리안과 오래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다.
“너 자수한다고 들었는데 숨어 있는 걸 보면 아직 죗값은 못 치른 거지?”
“뭐?”
“이참에 교화해 보지 않을래?”
물론 그의 의사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걸 존중받고 싶었다면 진작에 똑바로 살았을 테지, 아무렴.
***
나는 새까만 커튼으로 창을 가린, 커다란 상행용 마차에 올랐다.
줄리안의 돈주머니를 털어 빌린 마차였다.
이런 걸 타고 있으니 뭔가.
“옛날 생각 난다.”
큐딜을 낚아 먹은 게 엊그제 같은데 그게 벌써 몇 달 전이라니, 시간 참 빨라.
물론 완전히 같은 상황은 아니었다.
내가 납치당하는 쪽도 아니거니와 큐딜과 달리 나는 상대의 팔다리를…….
“읍, 으읍!”
“조용히 좀 해 봐, 추억 여행을 할 수가 없잖아.”
뭐 이렇게 예의가 없담.
사슬에 묶인 채 팔다리를 버둥거리는 모습이 물에서 막 나온 생선 같다.
나는 인상을 찡그렸으나 자비심을 베풀기로 했다.
손짓하자 줄리안의 입에 물려 있던 사슬이 녹아 사라졌다.
이쯤 되면 그도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테지.
아니나 다를까, 내게 붙들리기 전까지만 해도 넝쿨을 채찍처럼 휘두르던 줄리안은 입이 자유로워졌음에도 꽤 얌전했다.
나를 태울 듯 노려보는 눈길은 뭐, 내가 추울까 봐 배려해 주나 보지.
“나한테 바라는 게 뭐냐.”
“말했잖아, 데이디어한테만 데려다 달라고. 정말 그게 전부야.”
“…….”
“성력까지 봐 놓고 못 믿어? 어허, 머리 굴리지 말고.”
나는 슬금슬금 바닥을 기는 넝쿨을 콱 밟아 버렸다.
힘 조절을 못 해서 마차 바닥이 약간 파인 게 감동적이었다.
그렇지, 이 정도는 돼야 몸이지!
“데이디어한테 나쁜 짓 안 한다니까? 내 신을 걸고 맹세할게.”
줄리안의 눈매가 미미하게 누그러졌다.
악당 하수인 노릇을 한 건 자기면서 왜 애먼 날 의심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에게 바라는 건 돈과 마차, 정보와 인질로서의 가치밖에 없었다.
“……시오라 보네티는 어떻게 된 거지?”
“너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데. 그러니까…… 보네티 백작저가 뒤집어졌다는 것까진 알아봤어. 이후에 어떻게 됐어?”
다 털어놓으란 채근에 줄리안이 마지못해 입을 뗐다.
정리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크루엘로와 미뉴엣─에덴─, 그리고 시오라 보네티 모두가 실종되었다.
지금은 가보트가 백작 대리 역을 맡아 공황에 빠진 보네티를 이끌고 있다.
꽤나 허둥거리는 모양인데 보좌관의 도움을 받아 어떻게든 하고 있다고.
진작 보네티의 원로회를 정리해 놓은 게 다행이었다.
“화이트데저트 공작의 광증이 재발하여 두 사람을 죽이고 잠적했다, 가장 유력한 가설은 이쪽이다.”
크루엘로의 평판이 그 모양이니 어쩔 수 없다.
나는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생각했다.
두 달이 흘렀다.
짧은 듯했지만 일이 터지려면 얼마든 터질 수 있는 시기였다.
그런데도 이토록 잠잠한 걸 보면 크루엘로가 어떻게든 에덴을 틀어막고 있는 건가.
그게 아니면…… 이미 미뉴엣을 죽여 없앴을 수도.
생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철렁했으나 그런 일이 벌어졌다 한들 그를 탓할 수는 없었다.
그 몸을 차지하고 있는 건 에덴이었고 되찾을 수 없다고 판단하는 것도 이상치 않았으니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지만 갑자기 너 같은 게 등장한 걸 보면, 시오라 보네티는 살아 있던 모양이지?”
어쭈, 너 같은 거?
줄리안의 처지를 되새겨 줄까 하다가 뒤쪽의 말에 멈칫했다.
“……죽었어.”
입이 쓰다.
그래, 시오라는 죽었지.
내가 원래 몸으로 바깥에 나왔다고 한들, 그게 시오라의 부활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영영 그 몸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애당초 거기서 누리던 것 모두가 내 것이 아니었다.
그때 만났던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되면, 지금의 줄리안처럼 생판 남을 보듯 반응하겠지.
데이디어도 황태자도 베티도, 그리고 가보트와 미뉴엣도.
조금 울적해졌지만 괜찮아, 크루엘로는 날 알아볼 테니까.
그거면 된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다면 다시 관계를 만들어 가자.
이제 내겐 시간이 많으니까.
“데이디어를 만나서 뭘 어쩌려는 거지.”
“궁금한 게 많네. 심심해서 그래?”
“유감이지만 그 애가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몰라, 일정한 주기마다 그쪽에서 찾아왔을 뿐이니까.”
“그렇구나.”
“거짓말로 들리나 본데─.”
“응? 아냐, 믿어. 너한테 데이디어의 위치를 들을 생각도 없었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줄리안이 눈썹을 찡그렸으나 진심이었다.
그의 역할은 정말로 나를 데이디어한테 데려다주는 것까지였다.
어떻게든 만날 수만 있으면 되는데 내가 찾아갈 필요는 없지.
마침 우리가 탄 마차로 빠르게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숫제 돌진한다고 표현해도 되겠다.
그도 느꼈는지 줄리안의 안색이 변했다.
“기사님 오셨다, 줄리안.”
“대체……!”
“아까 네가 얻어맞아서 잠깐 기절했을 때 말이야, 메모 하나를 남겨 두고 왔거든.”
더 열 받으라고 나는 일부러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진달래는 내가 데리고 있다!”
진달래치곤 줄리안의 머리 색이 좀 엷긴 했어도 할 수 없다.
내가 아는 분홍색 꽃은 그것뿐이야.
줄리안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오, 창피한가 봐! 이런 거에 약했군.
거의 가보트급으로 붉어진 얼굴이 재미있었다.
“그, 게 무슨, 너……!”
“웃기지? 세상에 이렇게 큰 진달래가 어디 있담. 에휴, 데이디어도 콩깍지를 좀 떼어 내야 할 텐데.”
“네가 적어 둔 메모잖아!”
“엥? 내가 통찰력이 좋아서 데이디어의 마음을 꿰뚫어 본 거잖아. 못 알아들었으면 왔겠어?”
“이……!”
이럴 때 보면 덜 자란 어린애는 맞는데.
아, 맞다.
나는 내 머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뇌 없어?”
이렇게 쓰는 게 맞나.
줄리안의 말버릇을 되돌려주자 바닥에서 넝쿨이 솟구치며 나를 공격했다.
하하, 안 귀여워!
─7주문. 처단punishment.
허공에서 피어난 새하얀 불꽃이 공격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쪽 교단은 성격이 다 그 모양인가 보지?”
“너무 고평가하지 마. 내 쪽이 특출해서 그렇지 성격이 더러운 사람도 있거든.”
“내가 칭찬한 게 아니 허……. 하…….”
말문이 틀어 막힌 줄리안을 보니 10년 치 스트레스가 날아간다.
말을 더 보태려던 순간, 히힝! 말 울음소리가 높게 울렸다.
마차가 급격히 멈추며 차체가 크게 흔들렸다.
비명을 지르던 마부의 목소리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끊겼다.
죽은 것 같지는 않고 기절시킨 건가?
그리고 머잖아 마차의 문이 콰드득!
“괜찮나, 줄리안.”
뜯겨 나간 문틈 새로 검은 제복을 입은 기사가 보였다.
나무색 머리칼이 바람에 요란하게 흔들리고, 무감하던 재색 눈동자는 이글거린다.
검에서 불꽃처럼 피어난 진홍색 오라를 더하면 데이디어 크림슨은 그야말로 다크나이트였다.
멋있다, 조금.
“데이디…….”
과연, 줄리안도 데이디어에게 반한 사람처럼 표정이 멍했다.
아, 잠깐만.
이거 정도는 약하지만, 줄리안이 아까 날 봤을 때 지은 표정과 비슷한데.
물가에서 들은 아이의 목소리가 다시 생각났다.
“엄마, 저기 천사님이에요!”
안 돼, 삼각관계에 끼고 싶지 않아!
나는 줄리안에게 더 가혹해지기로 결심했다.
……이러다 어둠의 취향에 눈을 떠 버리는 건 아니겠지?
“줄리안, 잠시만 기다려. 곧 풀어 줄 테니까.”
“누구 마음대로?”
상념을 찢고 들어온 말에 나는 툭 내뱉었다.
데이디어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눈빛 한번 귀신 같네.
기세를 보아하니 말로 풀어 나갈 생각은 없어 보였고, 나 또한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성력을 끌어 올린 순간 데이디어가 달려들었다.
그리고 5분 뒤.
“…….”
커플은 삽시간에 같은 꼴이 되었다.
저번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지만, 사람이 화가 났다고 두 배, 세 배로 파워업?
터무니없는 망상을 버리세요!
설령 데이디어가 정말 몇 배로 강해졌다고 한들 의미 없다.
나는 페불라의 권능을 통째로 넘겨받았으니까.
인간이 신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지, 아무렴.
사슬에 결박된 데이디어는 풀이 죽어 보였지만, 줄리안보단 상황을 침착하게 받아들였다.
“레이디 시오라와 같은 교단의 사람이라고 했지. 어느 교단인지는 듣지 못했는데 어느 쪽이지?”
“사랑의 신, 그란디에. 사랑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귀찮게 하는 너희를 징벌하러 왔어.”
“……푸읍!”
“그쪽은 소멸했을 텐데.”
사레들린 줄리안과 달리 데이디어의 반응은 심심했다.
그저 소꿉친구인 척하면서 사랑이란 단어에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니.
비밀 연애가 아니라 줄리안의 일방적인 짝사랑인가?
아무튼 재미없어.
부루퉁하게 데이디어를 노려보자 그녀가 잠깐 움찔했다.
“당연하지, 농담이니까.”
별개로 잠깐 상상해 보기는 했다.
내가 정말 그란디에의 신도였으면…… 그 화신체가 말이니까 제물도 말이려나?
그러면 크루엘로의 주변 짐승에 빙의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로이가 어릴 적 기르던 망아지?
크루엘로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 말.
그가 주변인을 잃고 슬퍼하는 순간, 마구간을 탈출해 달려 나와서 푸르릉, 그를 위로하는…… 말.
기분 나빠.
나는 줄리안을 묶은 사슬을 더 옥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