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페불라 8계명비를 부쉈던 건 어쩌면 예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덕분인지 더 큰 걸 허물기로 결심하고도, 마음은 전보다 편했다.
죽고 나면 지옥에 갈 것 같은 기분은 여전한데 말이지.
“후우.”
이 거대한 신전을 하나하나 부수며 나갈 곳을 찾는 건 시간 낭비.
한 번에 해결하자.
페불라의 신상 앞에 무릎을 꿇고 양손을 바닥에 내려놓은 채로 나는 눈을 감았다.
“위대하고 지혜로운 페불라시여, 그대의 종이 감히 바랍니다.”
가장 오랜 기간을 살아온 내 몸인데도 입에서 나는 목소리가 낯설게 울렸다.
하나 쏟아지는 성력에 길을 내는 건 조금도 생소하지 않았다.
남이 아닌 내 몸.
빌려 쓰는 껍데기가 아닌 진실한 육신은 영혼에서 흘러넘친 성력을 부담 없이 받아 내고 완벽하게 통제한다.
“종말에 새로운 구원을 가져오소서. 결말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소서.”
힘은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으나 본신의 성력은 비워지자마자 채워졌다.
“어둠에 잠긴 이들에게 빛으로 향하는 길을 제시하소서.”
마침내 손끝에서 순백의 힘이 터져 나왔다.
“당신의 마지막 신도가 바라나이다.”
─페불라 신학 10주문. 역행retrogression.
광휘가 신전 전체를 휘감았다.
그 빛 너머로 나는 신전만큼이나 거대한 책의 낱장들이 과거로 돌아가는 듯한 환각을 봤다.
건물이 겪어 온 수백 년의 시간이 역행한다.
다른 때, 바깥에서 이 정도 규모로 일을 벌였다면 그건 필히 자살행위였겠으나 지금은 달랐다.
성지나 다름없는 페불라의 신전은 늘 그랬듯 내게 끊임없는 성력을 공급했고 신에게 넘겨받은 권능은 노도와도 같은 힘을 완벽히 다스렸다.
막대한 시간을 거스르면서도 한동안 신전은 변하지 않았다.
성력으로 온존되던 건물, 마치 오래전부터 시곗바늘이 고정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런 변화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한계는 있었다.
언제나 그 상태일 것처럼, 늘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존재할 것처럼 버티던 건물은 어느 순간을 지나서 돌변하기 시작했다.
모양 좋게 깎아 낸 문양이 사라지고 인공적으로 잘라 낸 형태가 무너져 내린다.
건물을 바치던 기둥이 휘청거리고 압력과 온도로 변했던 그 성질마저 되돌아갈 즈음, 나는 성력을 거두었다.
쿠르릉, 신전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는 얼핏 비명처럼 들리기도 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고개를 꺾었다.
정성스럽게 조각했던 페불라의 신상은 이미 원형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음.”
실상, 역행보다 수정을 써서 나가는 문을 만드는 편이 더 수월했을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구태여 신전을 통째로 무덤 삼기로 했다.
[내 격이 추락한 건 당연한 일이다. 다른 고대의 신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진작 사라졌어야 할 몸이야. 그럼에도 신으로 남아 있던 건 그 아이의 미련 때문이었지.]
“당신이 수백 년 전에 사라지길 바라셨다면.”
이건 한참은 늦은 내 조의였다.
물론 시간을 역행시키는 걸 자연스럽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안에서 수백 년을 살았던 내 선조들을 모욕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겠지.
그럼에도 나는 그러고 싶었다.
에덴이 벌인 일로, 오욕으로 점철된 페불라의 수백 년이 당신의 뜻이 아니었음을 알기에 위로하고 싶었다.
이러한 자기만족이 그녀에게 한 점의 위안이라도 되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움직이자.”
내가 살아온 평생이 무너져 내린다.
그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고 싶었지만, 함께 죽고 싶은 건 아니다.
나는 상념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물에 깔리는 결말을 맞을 수는 없었기에 가호 주문을 써서 몸을 방어하고…….
“……어라.”
나는 마침내 무너져 내린 벽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야, 무너지라고 주문을 썼으니 벽이 허물어졌다고 놀란 건 아니다.
다만.
“왜 물이……?”
어째서 그 틈새로 따뜻한 햇볕이 아닌 물이 들어오는 걸까요?
나는 쏟아지는 물줄기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마침내 깨달았다.
아하.
“여기 바닷속이었구나.”
어쩐지 출구가 없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군.
이럴 줄 알았으면 수정으로 살살 구멍 내서 나갈걸.
나는 실소하며 그대로 물살에 휩쓸렸다.
***
“어푸!”
이제 내가 똑똑하다는 생각은 못 할지도 몰라.
어떻게든 육지로 기어오르는 데는 성공했으나 물에 젖은 미역 꼴이 되었다.
나는 엎어져 헐떡거리며 자조했다.
다소 두툼한 재질의 사제복이 무겁게 늘어졌다.
“그나마 춥지 않은 때라 다행이지.”
그대로 얼어붙었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나는 힘겹게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폈다.
내가 튀어나온 곳은 해안의 시골 마을인 걸로 보였다.
건물은 높지 않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적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내 꼴이 재밌기도 하겠지.
곧 자경단에서도 몰려오는 거 아니야?
자괴감이 들려던 찰나.
“엄마, 저기 천사님이에요!”
“쉿, 마크! 사람한테 삿대질하면 안 돼!”
“진짜로 천사님인데. 반짝반짝 빛나는데.”
어라…….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오?”
“괜찮을까요? 귀한 사람 같은데.”
아하.
눈을 떼지 못한 게 감탄해서였단 말이지?
그렇지, 틈만 나면 나를 놀려 대기 바빴던 선배 신도들도 내 외모만은 조금도 트집 잡지 못했다.
나는 금세 자신감을 회복하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주변에서 감탄사가 몇 개 들려와 자신감이 한 층 더 올라갔다.
자, 그러면 다음 문제는 여기가 어디냐는 건데.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아 보였다.
나는 뺨을 붉히고 이쪽을 흘금거리는 아이와 눈을 마주쳤다.
“안녕, 애기야.”
환하게 웃어 주자 아이의 뺨이 조금 더 붉어졌다.
“내가 막 하늘에서 내려와서 잘 모르는데 뭐 좀 물어봐도 될까?”
“어? 근데 물에서 나왔는데.”
“응, 물에 비친 하늘에서 왔어.”
이 정도 임기응변이야 일도 아니지.
나는 여유만만하게 물었다.
“지금이 며칠인지 아니?”
위치! 수도 남쪽에 위치한 케타르 남작령, 리베라멘테.
시간! 시오라가 죽은 지 두 달가량이 지난 5월.
정보를 얻어 내는 건 수월했다.
여태까지 쌓아 온 요령을 총동원했냐고?
그냥 물어보니까 전부 답해 주더라.
원래 몸으론 이렇게 편한걸!
괜히 억울해졌다.
어차피 사라지실 거라면 남의 몸에 넣지 말고 내 몸을 통째로 내보내 주시지.
아니지, 아무것도 모르고 맨몸으로 나왔으면 금방 에덴에게 걸렸을 것이다.
살해당하든 후계로 낙점 찍히든 좋은 꼴은 못 봤겠군.
아무튼, 그놈이 문제야.
기세 좋게 나오긴 했으나 약간은 막막했다.
일단은 돈이 없었고 근방에 뱅크도 없었으며 어떻게 마차를 빌려 타고 가더라도 아무런 정보도 없이 어딜 가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더더군다나 이렇게 수상한 차림새로는 더더욱.
신전이라도 찾아가야 하나, 고민하던 때.
“어라.”
순간적으로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착각이 아니라는 듯이 그 기운은 점차 선명해졌다.
감각 확장쯤은 써 줘야 쓸 만해지는 시오라의 몸이 아니라 내 본래의 육체였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거, 사슬 조각이다.
그리고 내가 조각을 심어 본 건 평생에 한 번뿐이었으며 그 대상은.
“줄리안……?”
그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코앞에서 마차가 지나갔다.
검고 매끈한, 딱 보기에도 귀족이 탈 것 같은 수려한 마차.
커튼이 쳐져 있어 안쪽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사슬의 기운이 그 안에 있던 것만은 분명했다.
나는 멀어지는 마차의 꽁무니를 보다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뭐, 이런 우연이…….
“아.”
우연이 아니구나.
아무래도 페불라께서 나를 좀 더 제대로 도와주시는 모양이다.
그것이 죽기 직전의 마지막 불꽃 같아서 나는 또 울컥했다.
요즘 왜 이렇게 감성적이 된 거람.
나는 뺨을 내리쳐 정신을 차리고 조각의 기운을 따라 움직였다.
그러한 행태가 수상해 보였는지 절반쯤 갔을 때 병사 하나가 나를 붙들었다.
“정지, 정지.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신분패를 보여 주십시오.”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음, 잠시만요.”
나는 주머니를 뒤지는 척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이 많지 않은 마을이라 근처에 있는 건 이 병사와 나를 신고한 옷가게 주인뿐이었다.
명색이 세계를 구하려는 입장인데 붙잡혀 검문당하는 것이 몹시도 슬프고 유감스러워, 나는 그만 병사의 목덜미를 내려쳐 기절시키고, 도망치려는 주인까지 덩달아 기절시킨 다음 두 사람을 가게 안에 밀어 넣고 문을 잠그는 짓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며 괜찮아 보이는 검은 로브가 있었기에 사제복 위에 걸쳐 보기도 했다.
돈은 없었지만, 한번 입어 볼 수는 있잖아.
체험해 보고 괜찮으면 나중에 사러 올 수도 있고, 음…….
“왜요.”
괜스레 페불라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한번 반항해 봤다.
미약한 죄책감이 들었기에 주인에게 슬쩍 축복을 걸어 주기도 했다.
만성 요통을 앓고 있는 것 같은데 이걸 고쳐 줬으니 로브 값은 했겠지.
나는 후드를 꾹 눌러쓴 채 다시 조각을 찾아 떠났다.
차림새도 멀쩡해져서 이제는 누구도 나를 검문하려 들지 않았다.
줄리안이 있는 곳은 해안 곶에 지어진 새하얀 건물이었다.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그건 누가 봐도 별장이었다.
이쯤에서 나는 데이디어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줄리안은 어디에 있어요?”
“지금은 제 별장에 가 있습니다. 일이 마무리되면 데려오겠습니다.”
드디어 내 노예의 도움을 받을 때가 된 것 같다.
몸이 뜻대로 움직인다는 건 감동적인 일이다.
직전에, 왼팔을 들려고 해도 오른팔이 올라가는 육신을 썼다면 더더욱.
나는 수월하게 기척을 죽이고 별장의 외벽을 타올랐다.
물론 줄리안을 만난대도 그가 날 도와줄 거란 보장은 없었다.
나는 이제 시오라가 아니었고, 나를 도와줄 거라고 약속한 건 그가 아닌 데이디어였으니까.
하지만 어떠한 진창에도 다 대책이 있는 법이다.
줄리안을 인질 삼으면 데이디어는 다시 내 노예…….
“큼큼.”
데이디어는 다시 날 도와주려 할 것이다.
세계를 구하는 일이니 그녀한테도 영광스럽겠지.
마침내 나는 조각의 기운이 느껴지는 방의 발코니에 다다랐다.
달칵, 창문을 열어젖힌 순간, 자줏빛 넝쿨이 날아들었다.
“알았어, 알았어. 나도 반가워.”
뭔, 주인 기다리던 강아지도 아니고 이렇게 환영해 준담.
나는 그 넝쿨의 부축을 받듯 줄기를 붙들고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