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마리오네트-126화 (126/162)

126화

“뭐야.”

몸을 옥죄던 사슬이 갑자기 녹아 사라졌다.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필사적이던 청년은 당황하여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이름은 가보트였다.

이상해진 미뉴엣과 식사를 마친 후 그는 정령 소환실에 감금당했다.

주문으로 만들어 낸 사슬에 사지를 결박당하고 강제로 수면제를 삼켰다.

그대로 잠들지 않은 건 소매에 은밀히 챙겨 둔 나이프 덕분이었다.

겁이 나서 손바닥을 살짝 베어 냈을 뿐이지만, 약간의 쓰라림이 큰 도움이 되었다.

미뉴엣이 방을 나선 즉시, 그는 피아니시모를 불러내 그녀를 뒤쫓게 했다.

그러고는 제 정령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도중 결박은 갑자기 사라졌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욱신거리는 팔을 주무르며 그가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반가운 소리가 들렸다.

뺙!

“피아니시모!”

뺙, 뺙!

들뜬 뱁새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제 영웅담을 털어놓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병아리가 삐악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겠으나, 계약자인 가보트는 그 말을 다 알아듣고 되물었다.

“해치웠다고? 그러면 미뉴엣은 어떻게 됐어?”

뺙…….

뱁새의 기세가 급격히 죽었다.

모른다는 뜻이었다.

“참. 시오라가 올 거라고 했지. 그 애는 어떻게 됐어, 하다못해 공작은?”

뱁새의 가슴털이 점점 더 쪼그라들었다.

알 턱이 있나.

공격이 성공한 걸 알자마자 반쯤은 신이 나서, 또 반쯤은 보복당할 게 무서워서 꽁지깃이 빠지도록 날갯짓을 했는데.

가보트는 한숨을 참으며 완전히 풀이 죽은 새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피아니시모를 달래 줄 때는 아니었다.

해치웠다는 걸 보면 최악의 상황은 피했을지 모르겠지만, 차악이라고 끔찍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는 제 정령을 끌어안고 정신없이 달렸다.

긴장한 무릎이 몇 번씩 꺾였으나 한 번도 멈추지는 않았다.

가야 할 곳은 뱁새가 알려 주었다.

‘미뉴엣은 어떻게 된 거지?’

지금에 와서도 어쩌다 일이 그렇게 된 건지 반절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머릿속에선 각양각색의 생각이 떠다녔다.

해치웠다는 건 분명 이상해진 미뉴엣을 대상으로 한 말이다.

만약에 미뉴엣이 그대로 죽었으면…….

가보트는 황급히 고개를 저어 부정한 생각을 털어 냈다.

시오라가 온다고 했으니 괜찮을 것이다.

얼핏얼핏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범상한 성직자가 아닌 건 분명했다.

시오라가 미뉴엣을 죽게 했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거기까지 생각하자 이번에는 다른 쪽이 염려되었다.

시오라는 괜찮을까.

그리고 공작은…….

‘죽든 말든 알 바 아니지.’

가보트의 머릿속이 급속도로 냉정해졌다.

만약 공작이 잘못됐으면, 가보트는 수도 귀족을 다 만나서라도 시오라에게 다른 짝을 찾아 줄 의향이 있었다.

약혼 상대가 없는 건 그 또한 마찬가지라도 말이다.

어쨌거나 그는 원래의 형체를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응접실에 도착했다.

문인지 잔해물인지 모를 철 덩어리를 힘겹게 밀어젖히고 가보트는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마자 그가 본 것은.

“뭐야. 다 어디 갔어.”

텅 비어 버린 폐허뿐이었다.

***

정신을 차린 순간, 이미 눈을 가린 손은 없었다.

나는 신전에 있었으나, 꿈도 현실도 아닌 듯한 그 기묘한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화신체의 몸을 빌린 신 역시도 보이지 않는다.

“…….”

나는 입술을 꾹 말아 물고 소매를 들어 눈가를 닦았다.

언제부턴가 폭포수처럼 터져 버린 눈물 탓에 천이 축축하게 젖었다.

이게 무슨 꼴불견이람.

신을 죽이겠노라, 그리 당당하게 선언해 놓고 막상 정말로 사라진다니까 꼬리에 불붙은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던 꼴이라니.

아무도 본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다.

“킁!”

실은 아직도 가슴 안쪽이 먹먹했다.

그러나 지금은 묻어 두기로 했다.

모든 게 정리되면 일주일쯤은 당신을 위해 울어 줄게요.

마카롱도 색색별로 준비해 드릴 테니 조금만 참아요.

전해질지조차 불분명했지만, 나는 훌쩍거리며 속으로 페불라에게 말을 전했다.

당장 더 급한 문제는 신전을 나가는 것이다.

나는 습관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제단에 놓인 두 권의 책을 발견했다.

두꺼운 양장 쪽은 전에 읽어 익숙한 것이었지만, 얇은 책은 처음 본다.

“왜 이런 걸 가져다 두신 거지?”

한시가 급할 때였으나 페불라께서 제단에 책을 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처음 보는 책을 집어 들어, 겉면에 적힌 표제를 읽었다.

“글러트니 전기?”

아무리 봐도 초면인데.

겉장을 넘기자 곧장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아이는 부모의 얼굴을 몰랐다.

최초의 기억은 길거리에서 시작됐고 이후로도 한동안 장소는 바뀌지 않았다.

삶은 힘겨웠다.

음식을 입에 넣는 날보다 배를 주리는 날이 더 많았다.

레카논 신전에서 길거리의 고아들을 데려가 주지 않았다면, 아이는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는 이제 굶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평생의 습관을 저버리지 못했다.

먹을 수 있을 때 먹어 둬야 한다는 생각으로, 아이는 다른 이의 음식을 훔쳤다.

그날부로 아이의 이름은 폭식, 글러트니가 되었다.

레카논은 규율과 절제의 신, 아이의 죄를 용납하지 않았다.

글러트니의 처지는 딱하게 되었다.

식탐을 길들이랍시고 남들보다 적은 양의 식사를 배정받았고 또래의 아이들에게도 따돌림을 당했다.

그를 견디지 못한 글러트니는 몇 번 더 남의 음식을 탐냈고 신관들은 더는 아이의 행태를 참아 주지 않았다.

아이가 다시 길거리에 나앉을 신세가 되었을 때, 운명이 아이를 인도했다.

‘그러면 저희가 그 아이를 데려가겠습니다.’

글러트니는 페불라의 신전으로 옮겨졌다.」

“이거 설마…….”

이건 소설도 동화도 아니었다.

한 사람의 일생을 요약해 놓은 듯한 투박한 문장의 나열.

글자의 뒤편에서 내가 아는 누군가의 얼굴이 보이는 듯하여, 나는 빠르게 다음 내용을 읽어 나갔다.

「아이는 경계하고 털을 세웠으나 레카논과 달리 페불라의 교리는 느슨했다.

페불라의 신관들은 아이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글러트니는 곧 페불라를 사랑하게 되었다.

열심히 교리를 익히고 실천했으며 그 신앙심은 점점 깊어졌다.

성인이 되던 해에 글러트니는 성자로 임명받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위대한 신은 저무는 해였다.

당시 지배자들은, 지배 체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레카논을 적극적으로 선포했고 자유로운 이야기의 신을 은연중 깎아내렸다.

더하여 사람들은 이야기와 운명의 신을 위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건 허상이며, 실상은 하나의 신이 존재할 뿐이라는 이론까지 발표되었다.

페불라는 잊히고 있었고 글러트니는 그녀의 소멸을 막고 싶었다.

‘페불라의 위상을 드높여야 해.’

신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선 신도의 질이나 양 중 적어도 하나는 확보되어야 했다.

신도는 나날이 줄어들었기에 성자인 그의 격을 올려야 했다.

글러트니는 충실한 교인들의 자원을 받아 그들의 영혼을 먹어치웠다.

글러트니는 위대해졌고 그의 신은 더더욱 위대해졌다.

그는 제 영혼이 타락해 가는지도 모르고 탐욕스럽게 격을 쌓아 갔다.

하지만 일은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페불라는 인신 공양을 받는 악신이다!’

낌새를 눈치챈 레카논 측이 페불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악신으로 규정짓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일은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는 차라리 페불라가 사람들에게 잊히길 기다리기로 했다.

다만 최소한의 안전 장치로 신전 하나를 은밀한 곳에 숨겨 두었다.

이후 그는 교인을 늘릴 방도를 찾았다.

정령으로 다른 방식의 신앙이 통하는지 확인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네크로맨서 단체의 가장 본질적인 욕망을 신앙에 이용할 수 있을지 시험했으나 성공한 건 소수뿐, 대부분은 제 욕망에만 급급했다.

그래서 글러트니는 그들을 다른 용도로 이용하기로 했다.

‘가장 짙은 어둠을 드리우자.’

세상을 검게 물들이고 그 어둠을 몰아낼 다른 빛을 지워 내면 된다.

믿을 수 있는 게 페불라뿐이라면, 다른 선택지가 없다면 사람들은 페불라에 열망하게 될 것이다.

그는 모리온을 만들고 그 그릇을 빚어냈다.

페불라를 위해서.

자신을 선택해 준 운명을 위하여.

…….」

예상했던 대로 그건 에덴의 이야기였다.

그 뒤로는 내 호기심을 향한 배려였는지, 궁금해하던 내용 몇 가지가 적혀 있었다.

이를테면, 내가 페불라를 의심하게 만들기 위해 에덴이 어떻게 판을 짰는지 따위가.

의심의 씨앗을 심기 위해, 크루엘로가 나를 수확제에 데려갈 무렵 일부러 레카논에 수작질을 부렸다는, 그런 이야기들.

에덴이 왜 그렇게까지 일을 벌였는지에 대한 뒷사정.

책을 다 읽은 뒤의 감상을 말하자면 이랬다.

“미친놈이네.”

그의 어린 시절은 꽤나 불우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만으로 모든 죄가 용서되지는 않았다.

내 주변에 불우하게 자란 사람이 어디 한둘이어야 말이지.

동정표를 얻으려거든 적당히 했어야지, 남의 영혼을 집어삼킬 생각을 한 것부터가 논외였다.

나는 내팽개치듯 〈글러트니 전기〉를 집어 던지고 그 옆의 걸 집어 들었다.

갈색의 가죽 양장, 〈운명〉.

이건 이미 다 읽었는데 왜 도로 올려 두셨담.

내가 기억하기론 책의 마지막장을 넘기자마자 책 더미 위에 던져 버렸는데 말이야.

혹시 내용이 바뀐 걸까.

첫 문장이 ‘그날은 시오라 보네티의 약혼식 날이었다.’ 따위가 되어 있다면 우습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겉장을 넘겼다.

“……어.”

그러나 그 안에 글자는 한 자도 없었다.

〈운명〉은 온통 백지가 되어 있었다.

그게 죽어 가는 내 신처럼 느껴져서 나는 다시금 울컥했다.

굳이 이런 걸 왜 보여 주시는 거람.

앞으로의 이야기를 스스로 채워 나가라고?

나는 시큰한 코를 훌쩍이다가 책을 덮어 옆구리에 꼈다.

아무래도 내 성격이 페불라와는 맞지 않나 보다.

지금이 감성적이어도 될 순간은 아닌데 말이야.

나는 다시 눈가를 비비고 고개를 들었다.

이젠 정말 바깥으로 나갈 때였다.

그러나 이전의 숱한 탐색으로 알았듯이 이곳에 정상적인 출구는 없다.

그나마 출구로 의심하던 곳마저도 제물의 시신을 보관하는 묘지였으니까.

평범하게 나갈 수 없다. 그렇다면.

“신전을 부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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