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시야를 가리는 머리칼은 검다.
그러나 주변을 가득 채운 새하얀 공간은 내가 알던 신전과는 어딘가 달랐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구조도 장식물도 같았지만, 원인 모를 이질감이 느껴졌다.
현실이 아닌 듯한 부유감.
그렇다고 꿈이라고 치기엔 지나치게 생생한 그…….
“아.”
나는 더 두리번거리지 못하고 고개를 멈추었다.
겨우 세 걸음 앞에, 금발을 늘어뜨린 화려한 미인이 서 있다.
그녀는 내가 아주 잘 아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시오라 보네티?”
무의식중에 그 이름을 입에 올렸지만, 나는 상대가 시오라가 아니란 걸 잘 알았다.
그건 그저 직관이었으나 또한 확신이었다.
영혼 전체가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고 내게 속삭이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는 영혼의 외침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게 가능한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니? 네 생각대로란다.]
내 속을 읽은 것처럼 상대가 말했다.
나는 어깨를 움찔 떨면서도 멍하니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시오라의 형상을 입은 상대는, 페불라는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반갑구나, 내 아이야. 오래전부터 너와 이야기할 날만을 기다려 왔어.]
“말, 도 안 돼…….”
정말로, 터무니없는 자기소개였다.
눈앞에서 내게 말을 걸어오는 이가 내 신이라고?
신이란 건 신분제의 정점에 이른 왕 같은 존재가 아니다.
그야말로 인간과는 격이 다른 존재, 대화 같은 게 가능할 리 없다.
계시의 형태로 신의 뜻을 전하고 어떻게든 그걸 해석하기 위해 신어를 만들었다지만, 이렇게 인간의 말로 소통할 수 있는 상대는 절대로 아니었다.
그러니 꿈이든 현실이든 신과 대화할 수 있다면, 그려 볼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하나, 상대가 턱없는 사기꾼이거나.
둘, 신의 격이 추락해 더 이상 신이라 부를 수 없게 되었거나.
내 직관이 말하는 대로라면 아마도.
아득한 진실에 한순간 숨이 막혔다.
[너도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아주 자연스러운 일.]
경악한 와중에도 재미없는 농담에 나는 눈가를 찡그렸다.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내 격이 추락한 건 당연한 일이다. 다른 고대의 신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진작 사라졌어야 할 몸이야. 그럼에도 신으로 남아 있던 건 그 아이의 미련 때문이었지.]
“하지만 저는 아직 성력을 쓸 수 있잖아요.”
[억지로 붙잡아 둔 것과 다름없지. 이제는 그마저도 끝이 나 버렸지만.]
치미는 혼란을 견디지 못하고 나는 얼굴을 쓸었다.
[신의 존재가 한순간에 지워지지는 않아. 그 흔적이 길게 이어졌지만 머잖아, 나는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예정이란다.]
신의 소멸.
그건 분명 내가 머릿속에 몇 번이나 그려 본 생각이 맞았다.
내가 마지막 신도인 줄 알았기에 내 죽음이 페불라의 끝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도 나는 페불라의 계시를 거부하고 신전을 나오길 택했다.
성력을 쓸 수 없게 될 거란 계산보다도 그저 그러고 싶어서.
그러나 그러한 각오가 무색하게도, 나는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이야기를 듣는 기분을 느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널 더 빨리 만날 수 있을 줄 알았어.]
나와 달리 그녀는 아주 즐거운 투로 말을 이어 갔다.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산보를 나온 듯 내 주변을 돌았다.
이따금 펄럭거리는 옷자락이 꼭 나비처럼 보였다.
[너는 아주 자유로운 아이였지. 그토록 폐쇄적인 공간에서도 바깥에 나가고 싶다고 말하기를 서슴지 않았어. 그래서 이렇게까지 버틸 줄은 몰랐는데.]
“버티다니요?”
[생각해 보렴. 나를 신으로 섬기는 이와 어찌 대화를 나눌까. 내가 다 죽어 가는 별이라고 한들 말이다.]
“제가 계시를 거역하기를 기다렸다는 말씀이세요?”
[그 말대로야.]
“잠깐, 잠시만요.”
계시를 내려놓고 그걸 거부하길 바랐다니 이게 무슨 말이야?
자식을 가둬 두고 도망치길 바랐다는 황제 꼴이 따로 없다.
그러니까.
“말하고 싶을 때마다 머릿속이 계시로 차올랐던 게…….”
[응.]
“머리가 아플 만큼 수다스럽게 계시를 내리셨던 게!”
[맞아.]
“제일 듣기 싫을 때 상관도 없는 말을 퍼부어대셨던 게!”
[하하.]
“좀 알기 쉽게 말씀하시든가요!”
그녀는 유쾌하게 웃었다.
그 모양새가 내가 듣고 그려 온 신의 모습과는 상당히 달랐다.
경외의 대상이라고 하기엔 거리감이 내 부모님만도 못하다.
[그렇다고 내 말을 거역하라는 계시를 내리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으니까.]
어쩐지.
“……분명히 신의 말을 거역했는데 이상하게 성력이 잘 나오더라.”
페불라는 다시 웃었다.
“그러면 다른 계시는 뭐였던 거예요?”
[그건 통 이야기의 진전이 없으니 등을 떠민 거였어. 마냥 기다려 주기엔 내 시간이 오래 남지 않았으니까.]
“시간…….”
[그래도 기한 내에 네가 선택해 주어서 다행이야. 너는 스스로의 길을 정했지만, 대부분의 신도들은 그러질 못하거든.]
그녀는 고개를 꺾어 신전을 둘러보며 말을 이어 갔다.
[이 신전에 갇혀 시야가 좁아져 버리고 세계가 나로 한정되지. 바깥엔 아무런 가치가 없고 나한테만 가치가 있다고 믿어. 그렇게 생각해야 불행해지지 않거든.]
신전 안을 울리는 목소리는 퍽 씁쓸하게 들렸다.
[나는 그들이 그러지 않길 바랐으나 어찌할 수 없었어. 신이 신도들에게 나를 경외하지 말고 신전 바깥으로 나가라 등을 떠미는 건 내 배역을 거스르는 일이었으니까.]
“신도 못하는 게 있나요?”
[한둘이 아니지. 내 아이와 대화할 수 없고 잘못된 길을 걷는 걸 바로잡을 수 없고 신앙이 있는 한 내려 준 권능을 거두어 갈 수도 없다.]
네가 날 풀어 준 거란다.
“……혹시 제가 계시를 거역한 게 당신의 소멸에 결정적이었나요?”
[그게 최후의 일격이 되긴 했지.]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페불라는 다가와 그런 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손길은 신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서툴렀으나 내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따뜻했다.
어쩐지 목이 막혔다.
[고마운 일이지, 덕분에 난 자유로워진 거야.]
“…….”
[이야기에 신 같은 건 필요 없어.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정해진 운명대로 흘러갈 거라니 그 얼마나 따분한 일이니. 인간이 이야기의 신을 믿지 않게 된 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란다.]
나는 누구보다 그러길 바라 왔어, 이어지는 목소리는 진실했다.
“제게 바라시는 게 뭐예요? 이런 상황에서 그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불러내신 건 아닐 거 아니에요. 곧 사라지시는 마당에.”
[그래, 내 힘이 다 지워지기 전에 네게 부탁할 것이 있단다.]
“……에덴이요?”
[그 애를 쉬게 해 주렴.]
“에덴에게 성자의 권능을 거둬 가시지 못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나요?”
[어긋난 신앙심이라 한들 나는 신앙의 선악을 결정할 수 없으니까.]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곤 자못 장난스럽게 예시를 들었다.
[생각해 보렴. 중력이 이건 옳지 못한 일이라며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떨어뜨리길 거부하는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그렇다고 그 아이가 교리를 어긴 것도 아니고 말이야.]
이럴 땐 교리가 자유로운 것도 문제가 되는군.
“제 힘으론 에덴을 상대할 수 없어요. 다른 걸 떠나서 몸을 갈아탈 수 있으면 영원히 죽이지 못하잖아요. 애당초 그 주문은 뭐예요?”
[옛날엔 내 힘이 더 강했으니 성자에게도 더 큰 권한이 부여됐었어. 그리고 주문이라면.]
페불라의 손에서 나비가 피어났다.
새하얀 생명체는 우아하게 날갯짓하며 내 이마로 스며들었다.
지식이 전해졌다.
11주문. 탈피molting.
그것은 기존에 알던 대로 원래의 육신을 벗고 남의 몸에 들어가는 주문이었다.
그리고 12주문. 헌신commitment.
그건 제물을 영혼째 집어삼켜서 사도의 격을 드높이는 주문이었다.
존재만으로 악신 소리를 들을 만한 주문들, 그러나 그것들을 만든 건 페불라가 아니었다.
아니, 그뿐 아니라 모든 주문이 그랬다.
일반 주문들은 대부분의 고대 신전, 나아가 현 신전과도 겹치는 면이 있는 보편적인 내용이라면 고유 주문은 성녀, 성자들이 이야기의 특성에 맞추어 만들어 낸 것이었다.
마지막 두 주문을 만들어 낸 건 에덴이다.
가볍게 말하자면, 탈피는 연극배우가 배역을 바꾸는 주문이었고 헌신은 다른 어떤 이야기의 조연으로 복속시키는 주문이라 칭할 수 있다.
다만 현실을 단순한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커다란 문제였다.
진짜 세상에 조연 같은 건 없다.
남의 이야기를 위해 희생해도 좋은 사람은 없다.
나는 이야기의 신이 사라져야 한다는 페불라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이가 남았다.
“에덴은 왜 그렇게까지 해 온 거예요?”
페불라는 슬프게 웃었다.
[말했잖니. 대부분의 신도들은 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어. 그 애는 푸가 신전에 갇혀 자라지 않았지만 크게 보면 마찬가지였단다. 온 세상이 오로지 나뿐이었으니.]
“…….”
[내 권능을 넘겨주마. 전부를 전할 순 없겠지만 그 애가 억지로 집어삼킨 영혼들을 풀어 줄 수는 있을 거야. 가장 올바른 방법을 찾아 주렴, 내 아이야.]
거기까지 말했을 때, 그녀의 몸이 희게 빛나기 시작했다.
눈이 멀 것처럼 찬란했으나 눈꺼풀을 덮어 누르지 않아도 편안히 그 빛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찬연한 광휘는 내 몸으로 흘러들었다.
프레스토에게, 피아니시모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는 그녀의 권능을 넘겨받았다.
서광에 온몸이 휘감겼을 때, 나는 어떻게 하면 이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공간을 빠져나갈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나 발걸음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만약에 제가 깨어났을 때 모든 게 끝나 있으면 어떡하죠? 또 몇 년이 지나 있으면요.”
[늦지 않도록 간격을 메워 주마.]
“그러면 이걸로, 이걸로 끝이에요? 페불라께서는 이대로 사라지는 거예요? 다시 만날 수는 없는 거예요?”
[아주 오래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이야. 말하자면 이 또한 운명이로구나.]
“하지만!”
“시간이 된 것뿐이란다.”
확연히 사람다워진 목소리에 놀라 나는 움칠 어깨를 떨었다.
페불라는 거리를 좁히고 다가왔다.
크루엘로가 그랬던 것처럼 부드러운 손길이 내 두 눈을 가렸다.
의식이 혼몽해진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자장가를 노래하듯 부드럽게 내 머리로 흘러들었다.
누군가는 마법이 풀릴 시간이라고 말할 거고, 누군가는 고통을 끝낼 시간이라고 말하겠지.
너는 나의 아이로 태어났으나 반드시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건 아니야.
모두가 그렇단다.
너도, 크루엘로도, 심지어는 나 또한.
그렇게 태어난 게 아니야. 고통을 짊어져야 하는 운명 같은 건 없어.
내가 사라진다는 건, 외부에서 지워 준 굴레가 사라질 뿐이라는 말이란다.
내가 없어지더라도 이야기는 세상에 남아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연결되고 흘러가겠지.
강제된 운명이 사라진다고 겁먹지 말렴.
너는 정해진 이야기에 묶인 마리오네트가 아니야.
우리는 좀 더 자유로워질 뿐이란다.
이제, 스스로 살아야지.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너도, 크루엘로도.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