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마리오네트-124화 (124/162)
  • 124화

    나는 〈운명〉의 겉장을 떠올리며 말을 풀어 나갔다.

    그게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모리온을 집어삼킨 이가 세계를 멸망시키리란 이야기였거든.”

    “……그래서.”

    “그걸 막기 위해 남의 몸을 쓰기 시작했어.”

    나는 숨을 한 번 가다듬었다.

    이미 드러난 사실을 입에 담는 건데도 혀가 무거웠다.

    크루엘로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네 생각대로야, 나는 에이미였고 비가였고 지금은 시오라지만, 이것도 원래의 나는 아니야.”

    내가 말을 듣지 않을 걸 아셨는지, 침묵하라는 계시가 내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머릿속은 이번에도 지독한 두통으로 지끈거렸다.

    “진작부터 털어놓고 싶었는데 못 했어. 어떤 뜻이 있었든 너를 속이고 기만한 건 사실이야. 미안해.”

    “그래서.”

    “하지만 너를 대하던 태도가 다 거짓이었던 건 아니야. 나는─.”

    “말하지 않았나? 그런 건 상관없다고.”

    상관없다고?

    그는 한 걸음을 다가와 내 앞에 섰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래, 네 사정 같은 건 궁금하지도 않았어. 내가 원하는 건 더 이상 네가 죽는 꼴을 안 보는 거, 그거 하나뿐이야.”

    그러니 길게 말할 것도 없지.

    그는 아직 검집에 집어넣지 않은 검으로 장난을 치듯 바닥을 긁었다.

    “유감스럽게도 시오라, 미뉴엣 보네티를 살려 둘 순 없어. 가까이에 적을 두는 머저리가 세상에 어디 있겠어?”

    “크루엘로.”

    “네가 나한테 미안하다면 이 정돈 내 뜻대로 하게 해 줘야지.”

    안 그래?

    되묻는 이의 눈동자는 차가웠다.

    우리는 아주 가까이에 있었으나 사이에 벽을 세워 둔 것처럼 단절되어 있었다.

    그러나 크루엘로를 원망할 수는 없다.

    그 벽을 세운 건 나였으니까.

    조금 더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를 설득하고 달래 줄 여유가 남았으면 훨씬 나았을 텐데.

    그러나 허비한 나날들을 아까워할 겨를은 없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말투를 바꾸었다.

    준비한 이야기의 허리를 자르고 끝부분의 결론만을 혀 밑에 깔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말에 약간의 자조가 섞여 들었다.

    “어차피 미뉴엣을 되살릴 수 없으니까 단념하라고? 그러면 나도 마찬가지야.”

    “그게 무슨─.”

    그는 눈가를 찡그렸다가 문득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이 낯을 바꾸었다.

    “너, 왜 움직이지 않아.”

    크루엘로가 손을 뻗어 내 팔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 감각이 전해지지 않았다.

    그에게도, 손에 닿는 감촉이 이전과 같지는 않았나 보다.

    사내의 낯빛이 단번에 창백해졌다.

    “영혼과 육신의 괴리 때문에 원래 남의 몸을 오래 쓰지는 못해. 그래도 이번이 제일 짧았네.”

    겨우 반년을 넘기고 끝나 버릴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잠깐이나마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죽…… 는다고?”

    “그래, 시오라 보네티는 죽을 거야.”

    크루엘로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네 성력이 아니었잖아. 베아티투도를 썼을 뿐인데 왜…….”

    “감당할 수 없는 양을 끌어다 썼으니까.”

    “뭐?”

    “휘슬의 마법진이 끊어진 것처럼, 그리고 지금 네 몸 상태가 말이 아닌 것처럼 똑같은 일이 생긴 거야.”

    “개소리 집어치워, 네가─!”

    크루엘로가 소리친 순간, 그가 붙들고 있는 팔에서 무언가 어긋나는 소리가 났다.

    그는 놀라서 제 손을 떼어 냈다.

    희게 얼어붙은 표정은 끔찍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 같았다.

    그 얼굴을 보며 나는 오래간만에 그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의 입 모양이 움직여 글자를 만들어 낸다. ‘이번에도’.

    나는 쓰게 웃으며 긍정했다.

    “맞아, 크루엘로. 나는 이번에도 죽을 거야.”

    “아…….”

    “그리고 이번에도 돌아올 거야.”

    내 말에 크루엘로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보기 괴로웠으나 나는 꾸역꾸역 남은 말을 이었다.

    “이런 과자 부스러기 같은 몸이 아니라 진짜 내 몸으로 올게. 그러니까 기다려 줘.”

    “웃기지 마, 나더러 널 믿으라고?”

    “응.”

    “지긋지긋하게 당했어. 이번에는 다를 거라며 생각하고 기대하고 바랐다가 배신당했어. 평생을 기만당했는데 그걸 또 믿으라고, 너를 또 기다리라고.”

    “응.”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그냥. 네가 날 기다려 주면 좋겠어, 크루엘로.”

    논리는 빈약했고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누구도 설득하지 못할 만한 말을 꺼내면서 그냥 감정만을 눌러 담았다.

    평소의 자신감이 어디 갔는지 나는 세상에서 제일 작은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고개를 숙이고 싶은데 이제는 그것마저 되지 않아서 나는 서럽게 눈을 내리깔았다.

    “나, 원래 몸은 페불라의 신전에 있거든. 거기엔 나밖에 없어. 말이 신전이지, 거의 유배지야.”

    시선을 피했기에 크루엘로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초조함에 말이 조금 빨라졌다.

    “사는 데야 지장이 없지. 성력이 흘러넘쳐서 옷이나 물건도 상하지 않고 먹지 않아도 살 수 있거든. 노화는 어쩔 수 없지만. 그런데 그게 무슨 재미겠어.”

    즐거움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할 수 있는 건 부모님께 교육을 받고 도서관의 책을 읽고 페불라의 교리를 공부하는 것뿐이었다.

    페불라를 믿고 사랑하는 것만이 전부인 삶이었다.

    “아무리 찾아도 출구가 없으니 그냥 버텼어. 아니, 찾았더라도 나가진 못했을 거야. 그러니까, 내가 나가면 페불라께서 소멸하시거든. 지금도 언젠가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내리깐 눈에 크루엘로가 주먹을 움켜쥐는 모습이 보였다.

    하얗게 질리도록 힘을 준 모양새에 조금 긴장이 풀렸다.

    “이제 그렇게 살기가 싫어졌어.”

    너 때문에.

    아니 네 덕분에.

    “사실 네가 날 기다리든 말든 난 밖으로 나올 거야. 그런데 시오라로 나오지 못할 테니까 도움받을 곳이 아무 데도 없어서.”

    내가 시오라였다는 걸 아는 사람은 없다.

    말한다고 믿어 줄 리도 없겠지.

    그러니까.

    “네가 있으면 좋겠어.”

    아.

    말하고 나서 나는 그게 내 본심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내뱉은 건 지레 겁을 먹고 둘러 둔 얄팍한 포장지뿐이었다.

    다소 힘겨웠으나 나는 좀 더 솔직해졌다.

    “그냥 기다리는 사람이 너였으면 좋겠어.”

    “……왜.”

    “너는 안 믿겠지만, 그리고 네가 안 믿게 신뢰도를 깎아 먹은 것도 나니까 할 말도 없지만.”

    아니지, 할 말은 넘친다.

    일단 내뱉었다가 속으로 부정하는 꼴이 반복되니 스스로도 우스웠지만, 그러면서 내 본심이 얼마나 깊은 곳에 숨어 있었는지도 알았다.

    이쯤 되면 인간 양파 수준이로군.

    자조하면서도 감정은 점점 고양됐다.

    “나라고 아무렇지 않았던 건 아니야. 물론 네가 더 힘들었겠지, 이러는 거 적반하장으로밖에 안 보일 거 알아, 그런데…….”

    한 번 숨을 멈추었다가 터뜨리듯이 말했다.

    “나도 네가 좋았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누구에게 났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심장이 발치까지 떨어져 내린 건, 분명 내 쪽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말을 꺼낸 것처럼 감정 한 움큼이 뜯겨 나갔다.

    아니면 그건 본심과 머리 사이를 가로막은 거대한 오물 덩어리였는지도 모르겠다.

    방해물이 사라지자 감정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에이미일 때도 비가일 때도 지금도 그래, 네가 좋았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해. 신의 뜻도 거스를 만큼 그래.”

    코끝이 시큰해서 나는 한 번 훌쩍거렸다.

    “네가 좋아, 크루엘로. 그게 가족애인지 우정인지 사랑인지 그런 건 모르겠는데 그냥, 그냥 그래. 네가 제일 소중해.”

    페불라의 말을 거역하면서, 베아티투도로 가득 찬 공간을 박차고 나오면서 그의 죽음을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으로 상정하면서 알았다.

    사실…… 그전에도 모르진 않았다.

    아무리 감정을 누르면서 살아왔다고 한들, 사람이 어떻게 제 안에 있는 감정을 모르겠는가.

    막 에이미가 되어 크루엘로를 만났을 때를 생생히 기억한다.

    눈을 반짝거리는 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웃고 울고 저를 걱정하는 모습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나는 크루엘로를 만나며 사랑이라는 게 무언지 알았다.

    이전에도 내게 호의적인 사람들은 있었으나, 선배 신도들의 친절은 실상 불쌍한 아이를 향한 연민이었다.

    그렇기에 난 책을 읽으며, 그들에게 바깥 이야기를 들으며 사랑이란 신전 밖에 있는 과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맛본 과실의 맛은 너무 달았다.

    크루엘로는 내게 동생 같았고 친구 같았고 어쩌면 몇 번쯤은 연인 같기도 했다.

    그 감정들을 다 모르는 척하고 살았다.

    내겐 돌아갈 곳이 있었으니까, 그래야 버틸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고개를 돌린다고 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감정이 부풀면서 결국 그 무게가 페불라보다, 내 일평생보다 무거워졌다.

    나는 여전히 내 마음을 말하는 게 무섭고 버겁다.

    하나 곧 이 육체를 떠날 수밖에 없었기에 나는 유언으로나마 그걸 털어놔야 했다.

    크루엘로는 내 죽음에 얼마나 고통스러워할지 알았기에.

    혹시나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의 시신을 보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기에.

    그런 이기적인 마음으로 나는 애원하고 있었다.

    제발 버텨달라고, 한 번만 더 기다려 달라고.

    너를 잃고 싶지 않다고.

    “……거짓말.”

    길고 긴 침묵 끝에 나온 말에, 나는 눈동자를 들었다.

    눈앞에는 세상에서 가장 혼란스러워 보이는 사내가 서 있었다.

    “그딴 거짓말은 필요 없어. 네가 날 사랑하든 증오하든 뭐가 됐든 상관없어.”

    “크루엘로.”

    “나는……. 잠깐, 너.”

    손을 들어 그를 어루만지고 싶었으나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이번에는 그것으로 그치지도 않았다.

    내가 내 마음을 다 털어놓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강제로 멈추고 고정해 두었던 시간은 기어이 다시 흐른다.

    시오라 보네티의 죽음이 가까워진 게 시각적으로 드러났다.

    밑이 깨진 모래시계에서 가루가 떨어지듯 내 몸에서 황금빛 연기 같은 것이 흘러넘쳤다.

    이전에 뜯어 낸 영혼 조각과 같은 색이었다.

    그게 크루엘로에게도 보였는지 그의 두 동공이 짐승처럼 커다랗게 열렸다.

    “……가지 마.”

    죽음을 틀어막을 듯 그는 절박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서 그대로 내 가슴에 각인되는 것 같았다.

    “또 죽는 꼴을 보라고? 이번에도 시체가 돼서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는 걸 보라고?”

    크루엘로의 이름을 아무리 불러도 그는 진정하지 못했다.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 온몸을 끌어안고, 그는 울 듯이 화를 쏟아 내고 분노하듯 애원했다.

    그 몸을 마주 안아 주고 싶었으나 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손을 뻗었고, 내 몸은 거짓말처럼 뜻대로 움직였다.

    마치 마지막 남은 생의 불길을 태우듯이 자유롭게.

    “더는 못 해. 못 버텨. 가지 마, 제발. 죽지 마.”

    “……돌아올게.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올 거야.”

    “그딴 말을─.”

    “믿어.”

    나는 크루엘로의 양 뺨을 붙들었다.

    그는 어린 날처럼 울고 있지 않았으나, 두 눈은 새까만 공포와 절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대로 그의 얼굴을 당겨 입을 맞추었다.

    “무…….”

    크루엘로는 움찔했으나 피하지 않았다.

    불안이 고스란히 녹아든 입술은 찼다.

    그러나 그 숨결은 따뜻해서 마음까지 녹아내리는 듯했다.

    나는 잠시간 눈을 감고 입을 맞춘 그대로 그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조금 뒤 얼굴을 떼어 냈을 때 그는 한결 좋아 보였다.

    아니, 다른 의미로 넋이 나갔다고 해야 할까.

    덕분에 나는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말을 꺼낼 수 있었다.

    “크루엘로, 나한테 빚이 있었지?”

    “뭐?”

    “내가 너한테 아직 받지 않은 재산, 너한테 받기로 한 대가들 말이야.”

    지금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말에, 그는 가만히 눈가를 찡그렸다.

    “나, 어릴 때부터 신전 밖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어. 그래서 바깥에서 돈이 얼마가 귀중한지도 잘 알고 있었어.”

    한때의 내게 바깥이란 낙원의 이름이었으니까.

    언젠가 나갈 거란 환상으로 교단의 계좌를 질리도록 외우고 또 외우던 때가 있었다.

    그렇기에 계좌가 없단 말을 듣고 배신감에 치를 떨었지만, 음, 생각해 보니 선배 신도들은 무죄였군.

    알아서 천국으로 돌아가셨겠지.

    “그 돈 안 받을게.”

    그러니까 크루엘로는 내 말에 얼마나 대단한 의지가 담겼는지를 알아야 한다.

    내가 돈을 포기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야 했다.

    “대신에 한 번만 더 나를 믿어 줘. 이번에는 배신하지 않을게, 반드시 돌아올게.”

    “……시오라.”

    “시오라가 아니야.”

    울컥해서 차오른 마음을 삼키고 나는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내 이름은 라스티야.”

    그 말을 끝으로 영혼은 쏟아지듯 흘러넘쳤다.

    기어이 시야가 꺼지기 직전, 나는 남은 성력을 모조리 크루엘로에게 쏟아부었다.

    파도치듯 일렁이는 의식의 끝자락, 나는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릴 들은 것만 같았다.

    ***

    그리하여 눈을 뜬 순간, 나는 다시 라스티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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