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침묵하라.]
“어차피 다 아는 마당에 뭘 비밀로 하라는 거야. 이제 됐어요.”
[침묵하라.]
“다 말할 거예요. 전부 털어놓을 거예요. 이젠…… 내 마음대로 할 거예요.”
나는 당신의 종이었을지언정, 감정을 모르는 꼭두각시는 아니다.
신전에서는 그렇게 살아왔더라도 나는 생각하고 행동하고 변화하고 피어난다.
당신이 정녕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나를 바깥에 내보낼 때 그쯤은 알았겠지.
“개 같은 페불라.”
계시는 어느샌가 뚝 그쳐 있었다.
팔등으로 눈가를 슥 닦아 내고, 나는 또렷해진 눈앞을 바라봤다.
그래, 내 마음대로 할 거야.
그러기 위해, 나는 살아 있는 크루엘로를 만나야 했다.
“정말로 세계 멸망을 막고 싶은 거라면 나한테 협력해요.”
거의 협박에 가까운 말이었다.
이전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마음으로 나는 신성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그 주문은, 놀랍도록 수월히 완성되었다.
─9주문. 수정modification.
영혼이 튕겨 나갔다가 돌아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 몸과 육체의 괴리가 심할 때라, 작은 주문에도 커다란 반동이 일었다.
그러니 각오하고 쓴 주문인데도 몸은 이상하리만치 멀쩡했다.
마치 정말로 페불라의 협력이 뒤따랐던 것처럼.
당신은 무슨 생각일까.
익숙한 의문이 떠올랐으나 지금 순간,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허공에 사각의 문이 생겨난다.
그걸 열기 전, 나는 몸을 구부리고 베아티투도를 잔뜩 주워 주머니에 가득히 밀어 넣었다.
황태자를 구할 때, 기분을 내기 위해 로브를 걸친 게 다행이었다.
그러며 뒤늦게 누가 이 공간을 만들었을지 의문이 일었지만 곧바로 답이 떠올랐다.
에덴이겠지.
두 주머니를 가득 채우고, 나는 내 바람을 담아 만들어 낸 문을 밀었다.
그 너머로 새로운 공간이 드러난다.
화이트데저트 공작저의 지하실이 아니었다.
시야를 채운 건 보네티 백작저의 정문. 그리고 그 앞에 잔뜩 모여 있는 수많은 사용인이었다.
저택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들은 건물 쪽을 바라보며 몸을 떨고 있었다.
무언가, 일이 벌어진 거야.
오싹해진 나는 곧바로 그들 사이를 헤집어 들어가려 했다.
누군가가 나를 붙들었다.
“아, 안 돼요, 시오라 아가씨!”
베티였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들어가시면 안 돼요!”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거야?”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냥…… 백작님께서 갑자기 공작전하가 오실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가보트 공자님과 식사 중이셨는데 전하께서 오셨고 갑자기 싸움이…….”
베티는 몹시도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어떻게든 내게 내부의 일을 설명하려 했으나 말이 분명치 않았다.
“공작전하께서 전부 나가라고 하셔서 일단 말씀을 들었는데, 어떻게 된 건지는 통 모르겠어요. 황궁 기사단에 사람을 보내는 게 좋을까요?”
“……미뉴엣이 크루엘로가 올 거라고 말했다고? 언제?”
베티가 입에 담은 시간은 나와 크루엘로가 화이트데저트 공작저에 들어서던 때였다.
가보트가 수상한 쪽지를 전해 준 이후, 저녁 식사가 시작되기 직전.
크루엘로가 미뉴엣과 약속을 잡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설마…….
순간적으로 섬뜩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베티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덧붙였다.
“실은, 백작님께서 좀 이상해요.”
“이상하다니 어떤 점이?”
“말로 할 수는 없지만, 평소 분위기랑 다르세요. 아, 그리고 제게 지시하신 내용도 이상했어요. 시오라 아가씨께서 저택에 돌아오시면, 응접실로 오라고 전하라 하셨거든요.”
“뭐……?”
“상황이 이리될 걸 모르고 말씀하신 거겠죠?”
그녀는 내가 그 말에 동조해 주길 바라는 듯했으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의혹은 단시간에 거름을 머금고 말도 안 되게 부풀었다.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말해 줘서 고마워, 베티. 저택엔 절대로 들어오지 마.”
“네? 시, 시오라 아가씨! 들어가시면 안 돼요!”
베티의 팔을 뿌리치고 저택으로 내달렸다.
목적지는 미뉴엣이 말한 응접실이었다.
가보트가 보낸 쪽지.
미뉴엣이 이상해졌다는 말.
크루엘로의 무리한 행동.
그리고…… 얼마 전에 죽은 에덴.
여태껏 에덴이 옮겨 다닌 몸은 전부 화이트데저트 혈족의 육체였다.
그러나 핏줄 같은 게 상관없었던 거라면, 그가 어떤 몸이라도 쓸 수 있는 거라면.
남의 몸을 쓰는 일에 페널티가 있는 게 당연하다고 내 편견대로 결론지었던 거라면.
나는 터무니없는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가설이 구체화되었을 때, 나는 저택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에 사용인들은 아무도 없었다.
설사 있었더라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백작저의 안쪽은 혹독한 겨울이 다시 온 것처럼 새하얗게 얼어 있었다.
처음부터 얼음을 깎아 그 구조를 만들어 낸 듯이 멀쩡한 곳이라곤 한 군데도 없다.
크루엘로의 마법이다.
그리고 그 마법에는, 형용할 수 없이 짙고 불길한 기운이 뒤섞여 있었다.
“……모리온.”
크루엘로는 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야.
내게 찻물을 마시게 한 이후 그의 얼굴과 마치 유언처럼 들리던 그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는 터질 듯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기운이 가장 극명하게 치받는 곳으로 향해 갔다.
새하얗게 얼어붙은 응접실 문을 뜯어내듯이 열어 재꼈다.
마치 거대한 거미가 집을 지은 것처럼, 얼음으로 된 실선이 곳곳을 메우고 있었다.
숨결이 얼어붙도록 추운 그 가운데에 두 사람이 있다.
바닥에 주저앉은 미뉴엣, 그리고 그녀 앞에서 검을 들고 선.
“크루엘로.”
크루엘로와 눈이 마주쳤다.
당혹감에 커진 붉은 눈동자가 선명하다.
그는 살아 있다. 절반의 안도가 마음에 차올랐다.
반대로 크루엘로의 얼굴에는 내게서 옮겨 간 절망 같은 것이 떠올랐다.
“……어떻게 왔어요? 문을 열 수 없었을 텐데.”
“왔어요, 어떻게든.”
“지금 말장난할 때가……. 젠장, 됐으니까 돌아가요. 당장─!”
그렇게 말하며 크루엘로가 게이트를 열려던 때, 얼어붙었던 미뉴엣의 그림자가 움직였다.
쩌저정, 살얼음을 깨고 나온 그것이 뱀처럼 튀어나와 크루엘로를 덮쳤다.
그러나 그림자는 그에게 닿지 못했다.
─6주문. 가호protection.
“방심했다가 또 당하는 취미는 없어.”
저택의 안쪽으로 달려들며 외워 둔 주문이 빛을 발했다.
허공에 떠오른 커다란 방패 셋이 공격을 틀어막았다.
나는 크루엘로를 등지고 섰고 방패는 우리를 둥글게 감쌌다.
이번에는 응접실 전체에서 얼음 깨지는 소리가 났다.
생명을 얻은 것처럼 그림자가 넘실거리고 주저앉아 있던 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가 홀로 이어진다.
“이상하네. 이런 상황에선, 크루엘로가 언니를 죽이려 했다고 화를 내야 하지 않나?”
그 느릿한 몸짓은 분명 평범했으나 이상하리만치 기괴해 보였다.
여자는 구부렸던 무릎을 펴고 반듯이 서서 시린 은발을 쓸어 넘겼다.
“역시 좀 더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게 좋았을까. 어쨌거나 할 수 없지.”
나는 미뉴엣을, 그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이를 노려봤다.
그녀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안녕, 시오라. 다시 만나 반가워.”
평소의 미뉴엣과 다를 바 없이 웃고 있는데도 이질감은 확연했다.
나는 베티의 말을 온전히 이해했고 내 의혹이 적중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에덴.”
미뉴엣은, 내 자매는 집어삼켜졌다.
원래의 그 애는 어떻게 되었을까.
손끝이 차갑다.
내가 쓰던 몸이 페불라에게 바쳐진 제물임을 알게 된 지금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한 몸에 두 개의 영혼이 존재할 수는 없다.
미뉴엣 또한, 살아 있지는 못할 것이다.
가슴 안쪽이 새까맣게 타오르고 눈에 열기가 몰린다.
그러나 멍청하게 눈물이나 흘릴 때는 아니었기에 나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았다.
미뉴엣의 형체를 뒤집어쓴 이는 고개를 기울이더니 웃었다.
“제대로 불러야지. 나는 네 언니잖아.”
“개소리 집어치워.”
“어쩌면 동생들이 하나같이 버릇이 없담. 전에 몸을 쓰던 아이가 동생 교육에는 관심이 없었나 보지?”
악의가 실린 조롱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하는 수 없지. 아쉬운 건 나니까 새로 길들이는 수밖에.”
그리고 그 순간, 미뉴엣의 그림자가 부풀어 오르며 새하얀 뱀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가 때 본 적 있는 광경이었다.
“본 적 있지? 내게 엘리니아에게 가르쳐 준 마법이었어.”
뱀은 가차 없이 달려들었다.
가호의 방패가 공격을 막았으나 사나운 이빨에 방패 하나가 산산이 조각났다.
내 방패가 민무늬 뱀의 한 입 거리라니.
생김새론 이쪽이 압승이었는데.
“비켜요.”
뒤쪽에 서 있던 크루엘로가 내 어깨를 잡아당겨서 나는 얼떨결에 물러났다.
내가 피한 자리, 바닥에서부터 하늘빛 얼음 창이 연달아 솟구쳤다.
내게 달려들던 뱀이 피하지 못하고 꿰뚫렸으나 피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연기로 된 생명체처럼 커다란 백사의 상처는 순식간에 수복되었다.
그러며 뱀에게서 느껴진 힘은.
“……성력.”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온다.
안 그래도 골치 아프던 게 성력 버전으로 부활한 꼴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크루엘로의 얼음 창은 계속해서 솟아오르며 뱀을 쫓았다.
그 하늘빛 마법은 얼핏 평소와 똑같아 보였으나 안쪽에 새까만 불꽃 같은 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크루엘로의 마나에 섞여든, 더럽고 부정한 것, 모리온이다.
크루엘로가 그 힘을 집어삼킨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어떻게 그 힘을 쓰고 있을까.
금세 알 수 있었다.
그의 손바닥에는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고 모리온은 거기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모리온을 부활의 진의 동력으로 삼을 때처럼 그는 제 몸을 통로로 쓰고 있었다.
내가 베아티투도를 쓰던 방식과 같았다.
이래서 어린애 앞에선 찬물도 마시면 안 돼.
그러나 그저 통로로 사용할 뿐인데도 그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혈색은 점점 나빠지고 식은땀에 셔츠가 다 젖을 정도였다.
크루엘로는, 마치 중독된 상태처럼 보였다.
그의 몸을 지나가는 칠흑 같은 마나가 크루엘로를 탐내듯 이따금 일렁거린다.
이러다가 크루엘로가 잡아먹힐지도 몰라.
확 치솟은 불안감에 나는 그의 손을 붙들었다.
평소보다 흐릿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거 쓰지 말아요, 크루엘로.”
“이번에도 나비가 행운을 물어다 주길 기대하는 건 아니죠?”
“아니, 좀 더 든든한 조수가 있어요.”
크루엘로가 무리할 필요는 없다.
그러기 위해 주머니를 가득 채워 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