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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19화 (119/162)

119화

소년은 자라 성인이 되었다.

그러며 크루엘로는 그때의 나비를 다시 보게 되었다.

검은 신전의 기도실에서 시오라가 소리를 전하기 위해 불러낸 새하얀 나비.

모든 일의 시작을 다시 보게 됐을 때 크루엘로는 선뜩해졌다.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머릿속은 팽팽 돌아갔다.

‘비가 또한 페불라의 신도였던 건가.’

그렇다면 비가가 그토록 저택을 뒤지고 다닌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비가와 시오라 사이의 공통점을 알게 되자 자연스레 의심이 싹텄다.

그들이 제게 접근한 데 어떠한 의도가 있진 않을까.

그러나 크루엘로는, 시오라가 말해 줄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았고 강제적으로 그 입에서 답을 얻어낼 자신도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그는 일부러 바쁘게 살았다.

대원로가 제 눈을 가리려는 걸 안다면서도, 일일이 미끼를 물고 덫을 지워 나갔다.

피곤해져야 머리를 비울 수 있었으니까.

그러며 그는 비가가 바쁘게 저택 일에 몰두하던 기분을 이해했다.

그녀에게 뭐가 그리 괴로웠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리고 엘린의 입에서 다시 한번, 나비의 이야기가 나왔다.

“혹시, 그쪽이 계시를 받을 때 이런 나비가 날아왔어?”

검은 뱀 교단의 초대 교주가 페불라의 성자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에 시오라는 제 신을 의심하는 듯했지만, 크루엘로는 반대로 생각했다.

페불라는 제 종의 죄를 수습하기 위해 교인들을 내보내는 게 아닐까.

그렇기에 비가와 시오라가 제 주변을 맴돌며 그토록 모리온을 찾아다닌 게 아닐까.

그렇게 추측한 이유는 간단했다.

페불라를 섬기고 있다는 엘린의 주장과 달리, 교인들은 그 이름조차 아는 이가 드물었으니까.

어쩌면 초대 성자란 자는 진작 페불라를 저버렸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설이 세워지니 생각은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크루엘로는, 제가 모리온을 위해 준비된 그릇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에덴을 밀어내기 시작한 무렵 우연히 그러한 정보가 손에 들어왔다.

그건 비가가 교단의 정보를 알아낸 수법과 똑같았기에, 크루엘로는 그게 에덴의 의도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저를 절망시키기 위해서? 아니면 체념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우습지도 않아.’

그런 건 크루엘로에게 가벼운 충격조차 되지 못했다.

그러나 에덴이 심어 둔 씨앗은 수년의 시간이 지나 피어났다.

시오라는 모리온을 없애려 한다.

또한 원로회를 제거하는 데도 가차 없었다.

그렇다면 모리온의 그릇인 크루엘로는?

만약 시오라가 저를 죽이려 한다면, 자신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맹세코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으나 그건 별개의 문제였다.

하지만 시오라가 장장 일주일 동안 쓰러져 있던 사이에, 크루엘로의 머릿속은 깔끔해졌다.

눈을 감고 죽은 듯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니까.

혹 그대로 죽어 버릴까 두려워 숨이 붙어 있는지 확인하고 심장이 뛰는지 살피면서 일주일을 보내니까 그래, 결론이 섰다.

설사 그녀가 제게 칼을 들이밀더라도, 그런 건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몇 번의 경험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는 비대하게 불어났다.

상처, 배신감, 원망 따위의 감정들은 그에 비교할 수도 없이 하찮다.

폭우 속에서 얼굴이 젖는 걸 염려하는 머저리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니 더는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새삼 의문스럽긴 하다.

사람의 죽음을 그토록 많이 겪었는데, 왜 이런 건 무뎌지지 않을까.

어째서 고통은 나날이 깊어지기만 할까, 하고.

크루엘로는 마차의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보네티 백작저가 보였다.

빠르게 가까워지는 건물을 보며, 그는 부하에게 받은 보고를 떠올렸다.

“미뉴엣 보네티 백작의 전언입니다. 그대로 전하라는 말이 있었으니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보네티 백작저로 와, 크루엘로. 너를 기다리고 있어.”

에덴이 저를 부르고 있었다.

어느새 껍데기를 갈아 끼운 그의 친척 형제가 마지막 순간을 완성하기 위하여.

크루엘로는 고개를 기울이며 제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그곳엔 특정한 공간과 연결된 마법진이 새겨져 있다.

그 끄트머리에 있는 건.

“모리온을 쓴 걸 알면 시오라가 싫어하려나.”

하기야 무슨 상관이람.

그 여자도, 제가 싫어하는 짓을 질리도록 했는데 말이다.

크루엘로가 주먹을 움켜쥔 순간 마차가 멈추었다.

바야흐로 그의 긴 비극을 결말지을 순간이었다.

***

“화이트데저트 공작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백작님.”

집사장은 다이닝룸에 있던 미뉴엣을 찾아와 소식을 전했다.

미뉴엣이 산뜻하게 미소 지었다.

“응접실로 모셔. 곧 갈 거야.”

“예, 백작님.”

집사장이 다이닝룸을 나선다.

미뉴엣은 고개를 들어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곧 죽을 사람처럼 낯이 핼쑥한 그녀의 동생이 있다.

그녀가 입을 닦으며 혀를 찼다.

“통 먹지를 않네. 독은 안 탔다니까. 내가 먹는 걸 보고도 의심이 가?”

“…….”

“넌 정말 고집이 세구나, 바티.”

어쩔 수 없지.

미뉴엣은 옅게 한숨을 내쉬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안 먹을 거면 일어나. 손님을 맞이하는 동안 있을 곳을 안내해 줄게.”

그럼에도 가보트는 버티듯 앉아 있었으나 의미 없는 저항이었다.

발치에 매달린 그림자가 억지로 청년의 몸을 붙들었다.

그가 뒤따를 걸 의심하지도 않고, 미뉴엣이 다이닝룸을 나섰다.

“젠장.”

욕지거리를 중얼거린 가보트는 한껏 버티다가 손을 뻗었다.

식사용 나이프가 그의 소매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런 게 무슨 소용일지는 모르겠지만,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

설사 알량한 위안거리로만 용도를 다하더라도 말이다.

가보트를 의자에서 뜯어 낸 그림자는 그를 에스코트하듯 멋대로 움직였다.

강제로 다이닝룸을 나서면서 청년은 아까부터 떠올리던 말을 다시금 되새겼다.

새벽에 들은 시오라의 꿈.

“가보트가 죽는 꿈이었어.”

“감동적이었지. 언제나 겁에 질려 호들호들 떨던 가보트가 주변 사람들을 지키고 희생해 죽는 꿈이라니, 다시 봤지 뭐야.”

절로 실소가 나온다.

그 말대로 의미 있는 죽음이라도 맞으면 차라리 낫겠다.

***

그건 피로가 과할 때 드는 잠과 비슷했다.

몸은 잠들어 있는데 의식은 사라지지 않고 생각이 이어진다.

잠들기를 바라 봐야 그마저도 의식을 잇는 연료가 된다.

비가로 지낼 적 종종 그런 밤을 보냈다.

그러나 지금에 와 깨닫는다.

잠들기보다 깨어나길 소원하는 시간이 더욱 고통스럽다고.

“…….”

눈을 감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 봐야 무겁게 늘어진 몸은 반응하지 않았다.

의식과 몸이 유리된 것처럼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

답답해 속이 터질 것 같은 때, 내 몸에 누군가의 손길이 닿았다.

누구야.

산들바람처럼 가벼운 접촉, 이마를 어루만지는 듯한 부드러운 감각에 눈꺼풀이 움찔 떨렸다.

그 순간,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눈을 떴다.

번쩍,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은 일시에 깨어났다.

“헉!”

나는 여전히 테이블에 엎어진 채였다.

나를 깨운 게 누군지 찾아보려 해도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착각이었나?

아니지,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때가 아니다.

“얼마나 잔 거지.”

목소리는 조금 잠겼을망정 평범했다.

짧으면 몇십 분, 길면 몇 시간쯤 잠들어 있던 것 같다.

그러면 바깥은. 혹시 모든 게 끝났으면 어떡하지?

생각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져서 나는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허벅지를 강하게 부딪쳤으나 개의치 않고 달렸다.

크루엘로가 나를 데리고 들어왔던 곳으로, 이 공간의 문으로.

폐가 터지도록 다리를 움직였으나 그 자리에 문은 없었다.

특수한 도구가 있어야만 여닫을 수 있는 문인가?

잠깐은 굳었으나 곧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문을 열어 본 적이 있었다.

“위대하고 지혜로운 페불라시여, 그대의 종이 감히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걱정은 멋대로 증식했다.

만약에 바깥에 일이 이미 끝났으면 어떡하지.

무엇인가, 내가 짐작하지 못한 일이 벌어져서 이미 엉망진창이 되었으면.

크루엘로가…… 죽었으면?

상식적으로 에덴이 그를 죽일 리 없다는 걸 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크루엘로의 말이, 그때의 분위기가 나를 불안하게 했다.

손이 덜덜 떨리고 시야가 자꾸만 흐려졌다.

신성 주문은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쓰러지기 전의 일이 계속해서 떠오르며 내 집중을 방해했다.

진작 말해야 했어.

그렇게 생각한 것과 동시에, 내가 그럴 수 있었을까 하는, 지긋지긋한 의문이 따라붙는다.

페불라, 태어나 지금껏 내가 섬겨 온 이름이다.

부모님의 강압과 그들이 페불라를 받든답시고 벌인 일에 반감이 치솟았으나 그럼에도 저버릴 수 없는 평생의 무게.

“세상 무엇보다 신의 뜻을 우선해야 한다.”

“또 교리를 어겼구나. 말했잖니, 마지막 신도인 만큼 너는 더 완벽해야 한다고!”

“네 선조가 대대로 모셔 온 신의 마지막을 그렇게 모욕하려는 셈이냐?”

“이미 죽은 것들이 무어 대수라고! 그들 또한 페불라를 숭배했다. 너는 그들의 죽음까지도 능멸하고 있는 거야!”

심지어는 그래, 내가 지금 신전의 바깥에 나와 있는 것조차 그녀의 뜻대로였다.

그 말을 거스르는 게 어떻게 선택지가 된단 말이야.

애당초 내게 자유는 없었다.

비가일 때도 에이미일 때도 신전에 머무를 때도 태어난 그 순간에도 전혀.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익숙한 생각을 떠올렸다.

무겁게 받아들일 일이 아니야.

슬퍼하지 마, 화를 내지 마, 겁을 먹지도 마.

설사 크루엘로가 이미 잘못됐더라도 어쩌면 그조차 신의 뜻일지 모른다.

그는 모리온의 그릇이었으니까.

어차피 닥칠 일이었다.

그러니 가볍게, 가볍게…….

“왜.”

왜 안 될까.

내 감정을 달래는 건 평생에 걸쳐서 해 온 일인데 왜 도저히 먹히지 않는 걸까.

그럼에도 내가 페불라의 신도란 건, 그 신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는데.

이번에 나는. 나는 왜.

원인 모를 눈물이 자꾸만 방울져 떨어졌다.

내 동요를 페불라께서 아셨을까.

[침묵하라.]

질리도록 들어온 말이 뇌리에 아로새겨진다.

기가 막히다.

지금 내 사정을 털어놓을 사람이 누가 있다고.

내가 무슨 말을 지껄이든 여기에 그 말을 들을 사람이 누가 있다고.

뭐 그리 대단한 비밀이라고 크루엘로가 죽었을지 모르는, 이런 상황에서까지 입을 다물어야 한단 말인가.

서글펐다가 짜증이 치밀고 화가 났다가 오기가 솟고.

기어이는 내 몸을 이루는 껍데기에 금이 가는 것처럼 바스락 소리가 들린 것 같다.

[침묵하라.]

“……싫어.”

평생의 결박을 풀어내는 때의 기분이란 차라리 시원할 정도였다.

신앙? 믿음?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람.

당신은 신도를 잘못 골랐다.

나는 나무가 아니다.

강제로 떠맡은, 그런 실체 없는 허상을 고정할 만큼 단단하지 못하다.

아.

나는 다시 말한다.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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