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크루엘로의 눈물에 영혼째 얼어 버린 이후.
머리가 돌면서 의문이 일었다.
안 된다니 뭐가. 내가 당장 죽을 일이 뭐가 있다고?
조금 전에 그가 입에 담은 건…… 보네티였나.
입을 열었으나 그 순간 시야가 어지럽게 울렁거렸다.
무릎이 꺾이고 힘 빠진 몸이 의자로 무너져 내린다.
필사적으로 테이블을 짚고 버텨 보려 했으나 눈꺼풀은 견딜 수 없이 무거워졌다.
“잠깐, 나…….”
힘줄이 선 손등이 테이블보를 연거푸 고쳐 잡는다.
티포트와 찻잔이 떨어지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렸다.
얼마나 강한 수면제를 쓴 거지.
도대체 보네티에서 무슨 일이 생겼길래.
아니, 그런 것들보다 더 중요한 의문이 있었다.
“크루…… 엘로.”
나를 재우고 너는 뭘 하려는 거야.
생각할 단서가 없기에 끝 모르고 감정이 들끓었다.
터질 듯 부푼 심장 앞에 수천 개의 바늘이 놓인 것 같다.
안 돼, 뭐가 됐든 안 돼.
맞은편의 사내는 내가 버티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 알겠다는 듯한 감탄사. 이어 웃음소리가 들렸다.
“무서워요?”
그는 뒤로 걸어와 커다란 손으로 내 눈가를 덮었다.
한순간 검게 물든 시야에 나는 덜컥 겁을 먹었다.
크루엘로의 손가락을 떼어 내려 했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괜찮아요.
“나도 그랬는데 다 좋아지더라고.”
“나가서, 뭘…….”
“잘 자요, 내 사랑.”
그의 마나가 버티고 있던 내 의식을 찍어 눌렀다.
안…….
“부디 좋은 꿈 꾸길.”
끔찍하게 달콤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시야는 칠흑 같은 어둠에 삼켜졌다.
손가락을 치우자 단단히 다물린 눈꺼풀이 보였다.
시오라 보네티가 잠들었다.
“……끝났네.”
그녀의 이름은 에이미였으며 비가였으며 시오라였다.
아니, 그조차 거짓일 가능성이 크겠지.
새삼스럽게도 참 수상한 여자였다.
그럼에도 믿었다.
믿고 싶어서, 그리고 믿을 수밖에 없어서.
그토록 맹목적인 것을 과연 ‘믿음’이라 칭해도 되는지는 차치하고.
결론을 아는 지금에도 그런 생각이 든다.
에이미가, 비가가, 시오라가, 그 모두가 동일 인물이었다는 건.
아무도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건 너무나 제 좋을 대로 부풀린 망상 같지 않은가.
한때 에이미의 죽음을 부정하며 세상 사람들을 에이미로 본 크루엘로에게 그건 경계할 증상이었다.
그럼에도 그것이 진실이란다.
그들은 모두 살아 있었다. 모두 같은 사람이었다.
깨달은 순간 크루엘로는 안도했으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순수한 줄로만 알았던 호의에 어떠한 목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그가 배부른 투정을 부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뭐든 또다시 죽는 꼴을 지켜보는 것보다야 낫겠지.’
크루엘로가 실소했다.
설사 에이미가, 비가가, 그리고 시오라가 제게 의도를 가지고 접근했다고 한들, 그녀의 죽음과 그 고통을 비교하자면 가시에 찔리는 정도였다.
그는 다시는 시체를 끌어안을 생각이 없었다.
차라리 스스로의 목숨을 내어 주는 한이 있더라도.
다만 제 시체를 보면 시오라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는 궁금했으니 어쩌면 마음을 가득 채운 감정 중엔 복수심이 껴 있는지도 모르겠다.
크루엘로는 품에 안은 이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돌아 떠나는 발걸음은 이상하리만치 가벼웠다.
죽음이란 건 그래, 삶보다 무겁지는 않다.
비가가 제 침실 앞을 찾아왔던 그날부터 줄곧 그랬듯이.
***
“소공작님, 계세요?”
비가가 크루엘로를 찾아온 날, 소년은 깨어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그럼에도 답하지 않은 건 어떻게 말하면 오기 때문이었고 또 어떻게 말하면 배신감 때문이었다.
크루엘로가 제 마음을 깨달았을 때, 소년은 비가에게도 같은 감정이 있으리라 믿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하여 평판 나쁜 제게 구태여 친한 척하고 무리해서 제 광증을 고쳐 주려 한단 말인가.
몇몇 사용인들은 그런 비가를 두고, 권력자에게 아첨하는 속물이라 쑥덕거렸다.
그러나 비가는 단 한 번도 물질적인 보상을 바란 적이 없었다.
설령 그녀에게 그런 욕망이 있대도 상관없었다.
크루엘로에게 재산은 넘치도록 많았으니, 그게 목적이라면 곁에 붙여 평생토록 가면을 쓰고 살아가게 할 수 있었다.
비록, 소년의 죽어 버린 친구는 그가 그러길 바라지 않았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그의 알량한 계산은 금세 조각났다.
비가는 그를 피했다.
억지로 붙들어 대화를 나눌 때조차 고민도 않고 거절했다.
생각해 볼 가치도 없다는 듯 단호한 답에, 소년은 뒤늦게 깨달았다.
그건 정말 비가의 가벼운 호의였다는 걸.
그녀에게 있어 자신은 조금도 특별하지 않았다는 것을.
마음의 무게가 다르단 걸 아니 비참해졌다.
그럼에도 소년을 더 괴롭게 하는 건, 도무지 마음을 접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몇 달이 지나도 그는 여전히 비가가 신경 쓰였다.
눈을 보고 말을 섞고 그보다 더한 것도 하고 싶었다.
에이미의 죽음 이후 퍼석하게 메말랐던 마음은 몇 방울의 호의조차 탐욕스럽게 집어삼키고는 갈증을 호소했다.
크루엘로조차도 제 감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제 광증을 고치도록 도와줬다고 한들, 세상이 비가를 중심으로 도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그건 그의 영혼이 무의식적으로 상대의 정체를 눈치챈 탓도 있었지만, 당시의 소년이 알 리 없는 사정이었다.
반면 비가의 일상엔 변함이 없었다.
심지어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여전히 밤마다 위험한 짓을 벌이기도 했다.
“소공작님, 어쩌면 조만간 저 잘못될지도 몰라요. 위험한 일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있는 힘껏 했거든요.”
‘제 입으로 자백까지 하는군.’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
침대에 앉아 있던 크루엘로는 울컥해 고개를 들었다.
비가가 위험한 조사를 한다는 걸 알고 몇 번씩이나 그녀의 몸을 살폈지만, 마나는 흔적조차 없었다.
그러니 그녀가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파견된 비밀 조사관일 리는 없었다.
사적인 원한? 어설픈 정의감? 얄팍한 호기심?
비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알 수 없었다.
‘몰라, 될 대로 되라지.’
소년은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애써 중얼거렸다.
비가와 저는 상관없는 남이다.
그녀가 어떻게 되든, 아프든, 다치든,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건방진 하녀는 그 뒤로도 몇 마디를 더 종알거렸다.
크루엘로는 귀를 막지 않고 그 말들을 다 듣고 있었다.
“제가 눈이 높다 못해 하늘 꼭대기에 달려 있어서 소공작님을 차긴 했지만, 그래도 소공작님의 안목은 인정해요.”
“…….”
“그래도 다음부턴 좀 더 괜찮은 사람을 좋아해 봐요. 친한 척 얼쩡거리는 건방진 하녀보다는 나은 사람, 분명 있을 거예요.”
없어.
제게 접근하는 별종은 살면서 딱 세 번 있었을 뿐이다.
에덴, 에이미, 그리고 비가.
그리고 남은 건 한 사람뿐이다.
크루엘로는 새삼스럽게 보고 싶은 얼굴들을 떠올렸다.
내일은 제 생일이니 에덴이 와 주겠지만, 그 한 사람만으론 가슴의 구멍이 메워지지 않는다.
그는 힘주어 입을 다물었다.
“소공작님, 저는 소공작님이…….”
한동안 말이 없던 비가는 잘 자란 말을 마지막으로 문 앞을 떠났다.
소년은 귀를 쫑긋이 세우고 발걸음 소리가 작아지는 걸 들었다.
기척이 느끼지 못할 곳까지 멀어진다.
크루엘로가 고개를 들었다.
‘간…… 건가?’
저 나이에 몰래 술이라도 훔쳐 마셨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말만 하다 가 버렸다.
그 말은 자못 불길하게까지 들렸으나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죽을 위기에 처하려 해도, 그럴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마나도 못 다루는 몸으로 깊이 파고들어 봐야 한계가 있다.
정말로 위험한 짓을 하다가 걸렸으면, 그녀는 제 문 앞에 오지도 못하고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마도, 안심해도 좋을 텐데.
문득 크루엘로는 내일이 제 생일이라는 걸 떠올렸다.
생일은 그에게 기꺼운 날이 아니었다.
좋은 일이 일어난 적은 손에 꼽히도록 적었고 불행한 일은 셀 수도 없이 많이 일어난 날.
“……아냐.”
크루엘로는 소리 내어 중얼거리면서도, 견디지 못하고 자리를 박찼다.
문을 연 순간 쨍그랑, 그의 발치에 자그만 쇳덩이가 차였다.
황금빛 열쇠였다.
손에 쥐어 보니 검고 불길한 마나가 그의 손바닥에 엉겨 붙었다.
낯이 창백해진 소년은 무작정 달렸다.
비가를 찾아야 한다.
그녀의 침실, 청소 구역, 자주 다니던 정원, 그 외에도 저택의 곳곳을 속속들이.
크루엘로의 뜀박질 소리는 퍽 요란했으나 아무도 나와 보는 이가 없었다.
마치 저택 전체가 잠든 것처럼, 그 혼자 악몽에 잠겨 있는 것처럼.
폐가 터질 듯이 뛰어다녔으나 그는 비가를 찾지 못했다.
기어이 크루엘로의 마음에 불안에 다 잠겨든 순간, 새하얀 나비가 날아들었다.
“저건…….”
나비는 찬란한 황금빛 조각을 품에 안고는, 피할 새도 없이 소년의 이마로 스며들었다.
타인의 영혼이 그에게 뜯겨 나간 기억을 전했다.
“우윽!”
무릎이 꺾인 소년이 엎드린 채 벌벌 떨었다.
검은 신전을 들락거리는 비가.
지하실로 내려가는 비가.
열쇠 마법. 에덴의 배신.
그리고 비가의…… 죽음.
많은 부분이 성에가 낀 것처럼 가려졌기에 마나가 없는 비가가 무슨 수로 거기까지 내려갔는지, 어떻게 영혼 조각을 뜯어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온전한 기억들은 더욱 선명히 부각되었다.
충격이 가시니 침전물이 드러났다.
“윽, 흑……!”
결정적인 건 마음이다.
기억이란 건 아무리 씻어 내도 결코 객관적일 수는 없다.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던 순간의 감정이 떼어 낼 수 없게 녹아 있었다.
크루엘로가 받은 비가의 기억에도 그랬다.
그러니 알게 되는 것이다.
저택의 일에 무리하리만치 매달렸던 건, 마음의 괴로움을 잊기 위해서라는 걸.
제 고백을 거절하던 때, 비가의 마음이 겉처럼 담담하지는 않았다는 걸.
제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소년을 피해 다녔다는 걸.
실은 그녀에게도 크루엘로가 특별했다는 걸.
누구보다 소년을 걱정했기에 그에게 위험을 전하고자 했다는 걸.
비가에게도 통상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의 애정이 있었다는 걸.
그러니 분노하게 되는 것이다.
너는 왜 죽음을 각오하고 나를 찾아왔으며 죽고 나서야 네 마음을 전했는가.
그건 그를 위한 방식이 아니었다.
누군가 자신을 위해 희생한다는 건, 크루엘로에게 가장 끔찍한 트라우마였다.
저를 위한답시고 심장을 갈가리 찢어 놓은 비가를 용서할 수 없었다.
크루엘로는 비가가 유품으로 남긴 열쇠를 끌어안고 소리 없이 오열했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아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만약에 그에게 한 가지 기억이 더 전해지지 않았더라면, 그는 기꺼이 최악의 선택지를 골랐을 것이다.
「×월 ×일.
실마리를 찾았다. 답은 인간의 영혼에 있었다.
…….」
그러니 어떤 의미로는, 그에게도 악마의 목소리가 깃들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크루엘로는 복수를 결의했다.
천연덕스럽게 제 옆에 숨어 저를 조종하려던 에덴을 향한.
그리고 제게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남겨 준 비가에 대한.
되살아날 수만 있다면, 어떤 꼴이라도 상관없어.
나를 어떻게 보더라도 상관없어.
그건 크루엘로가 태어나 처음 품은 욕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