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같이 가 줄 거죠?”
크루엘로는 곧바로 답하는 대신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가끔은 헷갈려요, 달링.”
“뭐가요?”
“달링이 나를 믿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못 믿어서 그러는 건지.”
뭔 소리야.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 상태, 별로 안 좋죠?”
“아닌데요.”
“불리한 말에 일단 부정하는 거, 좋은 습관은 아닌 것 같아요.”
“……근거가 뭔데요?”
“딱히 자기랑 논쟁하자는 건 아닌데.”
무작정 부정하고 따지는 경향이 있는 건 사실이기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비밀이 많다 보니 음.
조금 머쓱하기도 했다.
몸이 좋지 않으냐 했지,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알았어요?”
“안색만 봐도 알아요.”
“내가 무리하겠다는 게 아니라요,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가보트 쪽을 확인해야 할 것 같아서 그런 거예요.”
원로는 다 죽고─심지어 에덴도─ 열쇠는 크루엘로의 손에 있다 치지만, 지금 상황은 어딘가 기묘했다.
분위기는 고조되고 파묻혀 있던 진실이 여럿 얼굴을 들이밀었음에도 과하게 평화롭다.
그것이 마치 폭풍 전의 고요 같아서, 조그만 특이점에도 과민하게 된다.
이게 내 유난이면 좋을 테지만.
“보네티에 가는 건 물론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그전에 보여 줄 게 있어요.”
“네?”
“따라와 줄래요.”
크루엘로는 나를 어딘가로 안내했다.
그의 분위기가 기묘해서 나는 잠자코 따랐다.
크루엘로가 위험한 곳에 나를 데려간다는 의심은 없었다.
비록 그는 나를 속였지만, 그 또한 비가를, 나를 되살리기 위함이었으니.
그의 발걸음은 공작저의 바깥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깊은 곳, 더 아래쪽으로 향해 간다.
크루엘로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았으나, 중간부터는 그가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에덴이 나를 불러냈던 지하실.
비가가 죽은 그 자리였다.
“들어와요.”
크루엘로를 믿지만, 신뢰와는 별개로 온몸의 털이 하나하나 곤두섰다.
되찾은 기억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듯한 착각이 인다.
그러나 크루엘로의 발걸음은 지하실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벽면으로 향하며 말했다.
“이 지하실에는 꽤 자주 왔었어요.”
“……왜요?”
“여기서 비가가 죽었거든요.”
비가. 늘 하녀로 뭉뚱그리던 이름이 그 입에서 정확히 튀어나온다.
나는 그게 누구냐고 물어야 할지, 아니면 잠자코 들어야 할지 고민하다가 후자를 택했다.
“처음에는 이런 장소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그 애가 몸소 알려 주더라고요. 아주 친절하게요.”
“그러니까…… 꿈을 꾸셨다는 말씀이신가요?”
“글쎄.”
크루엘로는 가벼이 웃고는 벽면에 손을 올렸다.
얼핏 그 손에서 거뭇한 물체를 본 것 같기도 했다.
그게 비밀 공간을 여는 키였는지 벽이 열리며 새하얀 공간이 드러났다.
그는 내게 따라오라는 손짓도 없이 안으로 들어섰고 나도 조심스럽게 뒤따랐다.
영혼 조각을 되찾았을 때 본 광경이 떠올랐으나 모리온이 있는 장소는 아니었다.
사방을 가득 채운 백색.
그건 마치 사막과도 같았다.
그리고 나는 사막을 이루는 그 알갱이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멈추어 선 크루엘로를 지나쳐 걸어가, 나는 새하얀 물체를 한 움큼 쥐어 보았다.
역시나 베아티투도였다.
이 많은 게 전부.
“이게 대체─.”
“그 애는 살해당했어요.”
장소의 정체를 묻기 위해 휙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사실 죽지 않을 수도 있었죠. 죽음을 직감했는지 내 침실에 찾아왔었어요. 그날.”
크루엘로의 손에 황금빛 물체가 들려 있었다.
그건, 이전에 내가 그에게 건네준 물건이었다.
“이 열쇠를 받았어요.”
“그거…….”
“모리온으로 가는 마지막 열쇠예요.”
크루엘로가 내게 황금빛 열쇠를 던졌고, 나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이걸 왜?
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주변의 광경만큼이나 머릿속이 새하얗게 얼어붙어서 한마디의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나를 향해, 사내가 물었다.
“한 번만 더 물어볼게요, 달링. 정말로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그 목소리엔 슬픔도 노여움도 없다.
아무런 감정이 없이 무채색에 가까운 말인데 내겐 왜 그게 애원처럼 느껴지는 걸까.
반사적으로 입이 벌어졌다.
“크루엘로, 난.”
그 순간, 지긋지긋한 계시가 머릿속을 장악했다.
[침묵하라.]
“나는요, 그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좀 더 진작부터 말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침묵하라.]
[침묵하라.]
[침묵하라.]
…….
계시는 끝도 없이 머릿속을 메워 갔다.
그건 내게 지혜를 전한다기보다는 내 생각을 방해하려는 듯했다.
한마디도 더 이을 수가 없어 나는 머리를 움켜쥐고 고개를 수그렸다.
두통으로 온 머릿속이 검게 물들었다.
그리고.
“없구나, 할 말.”
퍼뜩 고개를 들자 크루엘로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 말을 하면서, 그의 얼굴엔 어떠한 기대도 번져 있지 않았다.
마치 내가 침묵하리라 예상했던 것처럼.
말해야 해.
말해야 한다.
뒤늦게 의무감이 일며 머릿속에 떠오른 신의 말을 밀어냈지만, 입술은 떨어지지 않는다.
신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평생의 무게가 무겁게 턱을 붙들었다.
더는 아무런 말도 없이 크루엘로는 공간의 더 안쪽으로 들어갔고 나는 머뭇거리다 그를 따라갔다.
베아티투도로 가득 찬 새하얀 사막 같은 장소.
그 가운데에는 공간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놓여 있었다.
동그란 테이블, 티포트와 찻잔.
유려한 문양이 새겨진, 새하얀 물건들은 저택의 온실에나 어울릴 법했다.
일찌감치 준비해 두었던 것 같다.
기묘한 위화감에 머뭇거리면서도, 나는 크루엘로가 빼 준 의자에 앉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계시는 끊임없이 머릿속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내가, 혹은 내 신이 고장이라도 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쪼르륵, 크루엘로가 동그란 잔에 찻물을 따랐다.
“생각해 보면 나도 참, 달링에게 아무것도 묻지를 않았네요. 어차피 답을 듣지 못할 거란 계산에서였는지.”
“…….”
“사실 질문 자체가 무서울 때도 있었어요. 그러다가 그 입에서 내게 안 좋은 말이 나온다면 어떨까. 차라리 좋을 대로 생각하는 쪽이 편하지 않을까, 하고.”
연둣빛 차가 담긴 잔을, 그가 내 앞으로 밀어냈다.
반면 그의 앞엔 아무것도 놓이지 않았다.
“아까부터 몸이 안 좋았다면서. 마셔요, 푹 잠들 수 있을 거예요.”
“……이게 뭔데요.”
“독차는 아니에요.”
“그러면 뭘 탔는데요. 수면제?”
“네.”
당당한 답에 실소가 나온다.
나는 맑은 찻물에 비친 내 얼굴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크루엘로.”
“참, 아까는 거짓말을 했어요. 보네티 백작저에 무슨 일이 생겼나 보더라고요. 달링이 잠들면 가서 확인해 볼게요.”
“지금 날 협박하려는 거예요?”
“글쎄, 협박일까.”
나는 차를 바닥에 부어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루엘로는 따라 일어나지 않았으나, 그의 붉은 눈동자는 내 움직임을 가만히 따라왔다.
“가보트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거죠?”
“있으면 그 몸으로 뭘 어쩌려고요.”
“크루─.”
“이번에도 멋대로 죽고 싶어서?”
……아.
머릿속에 새하얀 물감을 들이부은 것 같다.
정수리부터 터져 나온 충격은 내 뇌리를 씻어 내리고 시야를 희게 물들이고 성대를 틀어막고 심장을 적셨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은 듯한 감각은, 흡사 시간이 멈춘 것과도 유사했다.
아아.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었다.
내가 깨어난 이후 크루엘로가 보였던 행동, 눈빛, 말.
그럼에도 근거가 부족해서, 페불라의 뜻을 거스르고 모든 걸 털어놓을 수가 없어서 외면했다.
그가 내 침묵을 모른다고 생각하고, 아니 실상은 그러길 바라서.
그랬는데…….
나는 멍하니 크루엘로를 바라보았다.
“생각하면 우습지, 내가 얼마나 천치로 보였을까.”
크루엘로의 입매는 비죽 뒤틀려 있었다.
그 모양새가 아주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크루엘로를 다시 본 비가가 된 것 같았다.
그러나 이건 이미 흘러가 버린 과거가 아니라 현재였고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비가만 당신이었어요? 아니면 에이미도?”
“…….”
“아, 전부였구나.”
심장이 너무 빠른 속도로 뛰어서 가슴 안쪽이 타는 듯하다.
반면, 크루엘로는 여상히 웃는다.
그는 비어 버린 잔을 제 앞으로 끌고 갔다.
티포트에서 나온 따뜻한 찻물이 다시금 그 안으로 고여 들었다.
“여태 물어봐도 답하지 않았으니까 이번에도 물어보지 않을게요. 멋대로 생각하는 게 피차 편하잖아요.”
“크루엘로.”
“앉아요, 시오라. 그리고 차를 마셔.”
“할, 말이 있어요.”
여전히 머릿속은 페불라의 말씀으로 가득했으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죄책감인지, 무언지 모를, 이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크루엘로, 나는, 난 말하려고, 그러고 싶었는데요. 아, 말할게요. 나는, 아.”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니까.”
“……그러면, 뭐가 중요한데요. 나한테 바라는 게 뭔데요.”
말은 멋대로 조각나 도무지 온전하게 나오지 않았다.
실은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내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크루엘로는 나 대신 찻물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피할 겨를도 없이 내 뺨을 붙들어 당긴다.
감촉.
입술에 닿는.
그리고 목구멍 너머로 넘어오는 따뜻한 액체.
아.
정신이 든 건 크루엘로가 떨어지고 난 다음이었다.
그는 웃으려는 듯했으나 입꼬리는 금세 허물어졌고, 표정이 일그러졌다.
종내, 크루엘로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알잖아.”
실핏줄이 터졌는지 그의 눈 쪽에서 툭, 하는 소리가 났다.
크루엘로의 흰자위는 삽시간에 붉어져 눈동자와 구분할 수 없는 색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 동그란 눈동자에서, 차마 성장한 크루엘로에게선 보지 못하리라 믿었던 것이 떨어졌다.
툭. 툭.
그토록 붉은색에서 떨어졌는데도 사람의 눈물은 어쩜 이렇게 맑을까.
저렇게나 나를 격렬하게 노려보고 있는데도 어째서.
“뭘 바라는지 알았잖아. 그걸 알면서도 죽으러 갔잖아.”
크루엘로는 얼굴을 엉망진창으로 일그러뜨린 채 웃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