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우리는 일단 마차로 돌아왔다.
달리는 마차 안에서, 나는 등받이에 기댄 채 생각에 잠겼다.
900년, 예언, 빛.
아무리 생각해도 에덴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광명한 빛이 세상을 어루만진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해피엔딩?
내가 생각하고도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왔다.
“이번엔 웃네.”
“뭐예요, 시비 걸지 말아요, 크루엘로.”
“아깐 화냈잖아요.”
“화를 낼 상황이었으니까!”
“왜요?”
크루엘로는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그딴 말을 들었는데 퍽 기분이 좋아 보인다.
대신 화를 내 준 나만 이상한 꼴이 됐다.
“크루엘로는 신분제의 개예요.”
“갑자기?”
“평소엔 조금만 기분을 상하게 해도 지독하게 보복하더니 황제라고 봐주는 거 봐.”
“보통 황제한테 ‘봐준다’는 말을 쓰진 않아요.”
“크루엘로는 신분제의 개예요.”
같은 말을 반복하자 그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뭐, 달링도 화를 낸 사람치곤 친절했잖아요. 그 주문까지 지워줘 놓고.”
“그래서 말인데요. 의심받지 않을 타이밍에 황제를 암살해 줘요.”
“그래요.”
“……농담이에요.”
“음.”
“농담이라니까?”
“하하.”
왜 웃기만 하고 정정을 안 해?
크루엘로가 아무렇지 않아 보였던 건 내 착각인가 보다.
하기야 황제를 위해 역모죄를 뒤집어쓰란 말을 듣고도 기분이 좋을 린 없지.
아무렴, 내가 에이미일 때 자존감을 키워 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게 크루엘로의 판단이라면 간섭할 생각은 없다.
페불라시여, 황제도 갑니다.
지금은 말고 좀 나중에.
“달링은 나를 꽤 좋아하나 봐요. 대신 화까지 내주는 걸 보면.”
“진짜 그거야말로 갑자기인데요.”
“그런데 왜…….”
“왜요, 뭔데. 불길하게 말끝 흐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요.”
“아까 그 예언 말인데요,”
그 말을 하려던 게 아닌 것 같은데.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지만, 주제가 주제니만큼 꼬투리를 잡지는 않았다.
“자기의 말대로, 초대 교주가 살아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럴 것 같았다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의심 가는 사람 있어요?”
어라.
이거 자연스럽게 타깃을 지정할 기회인가.
모처럼 생긴 찬스에 나는 냉큼 말했다.
“에덴 화이트데저트.”
“왜?”
“수상하니까요!”
근거라고 할 게 실로 빈약했지만, 그럼에도 댈 말이 이것뿐이다.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페불라를 의심하게 판을 깔 정도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인간이니 큼직한 단서를 줄 리 없지.
실은 계시를 받았다고 거짓말하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 두기로 했다.
“데이디어 경이 가져다준 통계 자료 때문도 있고요.”
“그 자료대로라면 확인하긴 쉽겠어요. 에덴이 오늘내일하잖아요. 곧 죽으면 다음 몸으로 넘어갈 것 같은데.”
“혹시 다른 몸이 뭘지 미리 짐작할 수는 없을까요?”
나는 기억을 더듬어 통계 자료를 떠올렸다.
에덴이 옮겨 다닌 몸, 공통점은 빈약했다.
화이트데저트의 방계라는 것밖에는.
“그것도 그렇고, 몸을 갈아타는 방식을 알아 두면 좋을 것 같네요. 여분이 몇백 개나 있으면 다 처리하기도 곤란하잖아요.”
크루엘로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나는 참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에덴이 남의 몸을 쓰는데 엄청나게 복잡한 조건이 필요하면 좋겠다.
하지만 현실이 내 바람대로 흘러간 적은 몇 번 없었지.
나는 결국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몸 상태가 회복되려면 멀었지만, 역시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다.
“크루엘로.”
“응.”
“아무래도 대신전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잘하면 힌트라도 얻을 수 있겠지.
어차피 에덴은 내가 에이미, 비가와 동일인이라는 것도 모를 테니까.
내 정체쯤은 알더라도 말이다.
“……알았어요.”
그는 나를 빤히 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는 대신전으로 방향을 바꿨다.
그리고 그 직후, 나는 에덴 화이트데저트의 부고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
미뉴엣 보네티의 일상은 빡빡하다.
급작스레 작위를 물려받았지만, 후계 교육을 착실히 받아 뒀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물론 완벽하게 인계받은 건 아니라서 전대 수석 보좌관의 도움을 받았다.
휘슬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를 받고 보네티 상단을 확인하고.
수도에 새로 생긴 이슈들을 넘겨받고 전대 보네티 백작이 저질러 놓은 비리를 수습한다.
여러 일을 배우고 처리하다 보면, 눈꺼풀은 금세 무거워진다.
남들에게 드러내 보이지는 못하지만, 이따금 미뉴엣이 집무실에서 고개를 꾸벅거리는 건 대단히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잠깐 눈을 감았을 뿐인데, 수마는 때를 놓치지 않고 그녀를 집어삼켰다.
“…….”
가만히 오르내리는 가슴팍. 고르게 드나드는 숨결.
이변은 축 늘어져 있던 손등에서 시작됐다.
새파란 핏줄이 움찔 움직이더니 이어 손가락, 손목이 멋대로 꿈틀거렸다.
얌전히 잠들어 있는 몸과는 확연히 다른 움직임이 기괴하게 느껴진다.
돌연, 그녀의 눈꺼풀이 반짝 올라갔다.
여자는 퍽 어색한 모양새로 움직였다.
찡그린 채 눈꺼풀을 내리눌렀다가 들어 올리고 사방으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어깨를 까딱하고 팔다리를 흔들어 본다.
극장 위의 마리오네트처럼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사람 같지 않게 어색했다.
피아노를 치듯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그녀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여자는 집무실 안을 느리게 걸었다.
삐거덕거리고 휘청거리다가 걸음의 수가 많아질수록 움직임은 자연스러워졌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손거울을 꺼내 들었다.
제 얼굴을 비추어 보고 입을 벌렸다.
“아.”
아, 아, 아. 톤을 맞추어 보듯이 몇 번 내뱉다가 이내 평소의 목소리를 되찾았다.
이번에는 미소 지었다.
눈꼬리를 접어 웃었으나 기억과 다르다.
안 되지.
몇 번의 시도 끝에 그녀는 평소대로의 표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미뉴엣이 온유하게 웃었다.
“안녕, 시오라?”
음.
“안녕, 시오라. 안녕, 시오라. 안녕, 시오라.”
아, 이런 톤이다.
그녀는 입꼬리를 당긴 채 가만히 중얼거렸다.
“안녕, 시오라. 좋은 아침이야. 아, 이제 저녁이구나. 언제쯤 돌아오려나, 기대된다. 알아보면 좋겠는데 못 알아보겠지?”
미뉴엣의 미소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창 쪽을 휙 쳐다봤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창밖엔 아무것도 없었다.
착각했나?
아, 아니지.
“그 뱁새인가 보다.”
미뉴엣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가보트는 제 품으로 날아든 피아니시모를 재빨리 끌어안고 걸었다.
그의 낯빛이 창백했다.
‘저게 뭐야.’
그런 걸 보려던 게 아니었다.
가보트는 평소처럼 피아니시모를 불러 정령술을 연습하고 있었다.
오감을 공유하는 마법이었다.
잘 따라주는 듯하던 정령은 어느 순간 갑자기 날아올랐다.
뺙, 뺙, 반가워하며 어딘가로 날아갔다.
요즘 시오라를 깜짝 방문하는 것이 작은 새의 취미였기에, 가보트는 그녀가 귀가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피아니시모가 향한 곳은 미뉴엣의 집무실.
뱁새도 당황했는지 화들짝 놀라 뛰쳐나왔으나 이미 그 안에서 있던 일을 모두 보고 들어 버렸다.
미뉴엣이 이상했다.
‘왜 시오라의 이름을 부르고 있던 거지?’
그것도 아주 기이한 느낌으로.
이게 제 착각이면 좋겠지만, 피아니시모와 계약한 이후 가보트의 직감은 아주 예민해졌다.
그 여자는, 미뉴엣이 아니다.
분명히 제 누이의 얼굴과 목소리가 맞았지만 그럼에도.
‘젠장,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가보트는 짧은 고민 끝에 제 방으로 달려가 수첩 한 장을 뜯었다.
만년필을 휘갈겨 내용을 적고, 그걸 뱁새에게 건네주었다.
줄곧 불안해하던 피아니시모는 곧장 쪽지를 물고 날아올랐다.
가보트가 한숨을 내쉬던 때.
똑똑.
노크 소리가 울렸다.
“나야, 바티. 들어가도 되겠지?”
청년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
“에덴이 죽은 게 그렇게 충격적이에요?”
크루엘로의 물음에 심란하던 속이 더 엉망이 되었다.
모르겠다, 좀 더 일찍 찾아갔어야 했는지.
아니면 아예 마주치지 않는 게 옳았는지.
“벌써 다른 몸으로 갔으면 어떡하죠?”
“엄밀히 말해 달라질 건 없어요. 달링이 세운 가설대로라면 이대로 숨어서 얌전히 지낼 리도 없고.”
“그야 그렇긴 한데.”
“데이디어 크림슨의 가설이 아예 틀렸을 수도 있잖아요?”
이럴 때면 다시 답답해진다.
에덴이 영영 사라졌을 리는 없다.
확실하다.
하지만 그걸 말하려면…….
[침묵하라.]
네, 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머릿속에 새겨지는 신어.
답답함을 넘어 슬슬 짜증 난다고 하면 너무 불경한 발언일까.
나는 참지 못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튼요. 화이트데저트의 방계 쪽을 좀 살펴 줘요, 크루엘로.”
적당히 뭉뚱그리며 나는 고개를 돌렸다.
마차의 창밖에 보네티 백작저가 보였다.
저택은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고, 거기서부터 뱁새가 날아오고 있었다.
음?
“크루엘로, 저게 뭘로 보여요?”
“유령이라도 보이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차마 말로 설명하기도 전에 뱁새는 창문을 뚫고 들어와 버렸다.
뺘아아악!
동그랗고 넓적한 물체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더니 두 다리로 딛고 착 몸을 일으켰다.
정령이면서 이렇게까지 역동적인 자세로 들어올 필요가 있을까.
어쨌거나 귀엽기는 해서 박수쳐 주자 뱁새가 우쭐거리며 가슴 털을 부풀렸다.
“이제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되나요, 달링?”
뺙!
피아니시모는 날개를 퍼드덕거리며 알 수 없는 몸짓을 선보인 다음, 부리에 물고 있던 쪽지를 건넸다.
안에는 가보트가 급하게 휘갈겨 쓴 듯한 글이 적혀 있었다.
「백작저로 돌아오지 마.」
어라.
심상치 않은 내용에 나는 눈을 깜박였다.
옆으로 자리를 옮겨 온 크루엘로가 쪽지의 내용을 보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화날 일 했어요, 달링?”
“엥. 데이디어가 프러포즈하는 걸 구경한 게 전분데요. 아까 같이 봤잖아요.”
“가능성 있네요, 달링의 동생은 속이 좀 좁은 듯하니.”
크루엘로는 마부를 불러내, 마차의 방향을 바꾸게 했다.
거의 코앞까지 가까워졌던 보네티 백작저가 다시 멀어지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란 뱁새는 인사도 하지 않고 도로 마차를 빠져나가려 했다.
“잠깐만!”
뺙?
혹시 모를 예감에 나는 볍씨를 붙들고 게이트 반지를 쥐여 줬다.
피아니시모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 반지를 물고 날아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는 뒤늦게 크루엘로에게 고개를 돌렸다.
“근데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데 마차를 돌려요?”
“보통 이런 조언을 무시하면 좋은 꼴은 못 보더라고요. 백작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는 따로 알아본 뒤에 돌아가면 그뿐이고.”
크루엘로가 빙그레 눈을 휘어 웃었다.
“간만에 같이 식사나 해요.”
***
그리하여 마차가 도착한 곳은 화이트데저트 공작저였다.
안으로 들어서며 크루엘로는 수하에게 보네티에서 있던 일을 알아보라 지시했다.
허기가 져 음식을 밀어 넣으면서도 계속 아까 받은 쪽지가 신경 쓰였다.
몸 상태도 회복되기 전이니, 크루엘로의 판단이 옳긴 했다.
사실상 에덴을 만나러 가려는 것도 무모했었고.
가보트는…… 아마 괜찮을 것이다.
게이트 반지까지 쥐여 줬으니.
“…….”
에휴, 요즘은 시원하게 되는 일이 없냐.
한숨을 삼키며 포크를 내려놓자 크루엘로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진작 식사를 마치고는, 내가 식사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직 내가 친구로 보이진 않는 모양이다.
“디저트 먹을래요?”
“괜찮아요.”
“딸기 푸딩이라던데.”
“먹어도 괜찮아요.”
안 먹어 본 디저트는 최대한 정복하고 돌아가야 아쉬움이 덜하겠지.
그게 아쉬워 신전을 탈출하려고 하면 페불라께도 손해다.
나는 미래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다.
내가 푸딩을 먹는 동안, 드디어 바라던 일이 생겼다.
크루엘로의 부하가 돌아온 것이다.
크루엘로는 귀엣말로 보고를 전해 듣고는 부하를 내보냈다.
입에 있던 마지막 한 입을 삼키고 나는 물었다.
“보네티 백작저에 무슨 일 있대요?”
“별일 없다는데요.”
그럼 그 쪽지는 뭐지?
별일 없었다는 말이 오히려 위화감을 조성했다.
그의 부하가 눈치채지 못한, 별일은 생겼을 수도 있다.
아무래도 가보트를 만나 봐야겠다.
하지만 이런 몸 상태로 혼자 갈 수는 없으니까.
“크루엘로.”
나는 자연스럽게 조력자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