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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15화 (115/162)

115화

황제와의 독대는 전실도 알현실도 아닌, 그의 집무실에서 이루어졌다.

거기까지 가서야 크루엘로가 내 투명 마법을 지워 냈지만, 황제는 놀란 척도 하지 않았다.

황제는 탯줄을 자를 때, 당혹감도 같이 없앴나 보다.

“그래서, 이 난리를 피우면서까지 나를 불러낸 이유가 뭔가.”

그는 의자에 앉으며 피곤한 낯을 쓸었다.

그 모습이 잠깐 동안 황태자와 겹쳐 보였다.

“글쎄요. 궁금해서?”

“허.”

“먹이를 입에 넣어 드려도 통 씹지를 않으시더라고요. 혹 치아 건강에 문제가 있으신 건 아닌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폐하.”

“자네의 집안싸움에 내가 어디까지 끼어들길 바라는 건가.”

“휘말리기가 싫어 황태자전하를 내버려 두셨다니 놀랍네요. 치아가 아니라 다른 쪽을 살펴보셔야겠습니다.”

우와, 황제 속 긁는 솜씨 좀 봐.

바깥에 나온 후 나도 이 사회에 찌들긴 했는지, 황제라는 신분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는데 반성하자.

나는 소심하게나마 첨언했다.

“자객의 시체가 죽은 날벌레만큼 많더라고요. 황태자전하께서 그중 하나가 되시면 안 되잖아요.”

“……지금 황태자를 날벌레에 비유─.”

“할 수도 있죠. 그러길 바라신 건 폐하가 아닙니까.”

“아니. 난 그 애가 도망가길 바랐어. 자네들이 망쳐 버렸네만.”

“요즘은 생명의 은인을 그렇게도 부르나 보군요.”

중년의 사내는 인상을 찡그렸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피로감이 가신 얼굴에 천천히 무게감이 붙었다.

“그래, 자네가 갑자기 적극적으로 변한 것 또한 어쩌면 운명이라 해야겠지.”

나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가 한숨을 삼켰다.

운명이란 말에 좀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아.

“수십 년 전, 이 땅에 반역이 일어났네.”

갑자기 황제의 이야기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주축은 더할 나위 없는 충신들이었어. 군대의 주요 인사들도 포섭된 터라 제대로 저항도 해 보지 못하고 궁이 점령당했지. 그야말로 난데없다는 말이 어울리겠네만.”

“음.”

“궁에 남은 괴담을 아는가.”

“그, 탈리아스 황자전하라 하시던?”

나는 기억을 더듬어 물었다.

크루엘로가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일으킬 때 들은 괴담이었다.

뭐라더라.

반란군에 잡혀 죽은 황자가 무도회를 좋아해서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난다는 말이었다.

역시 내 기억력, 죽지 않았군.

“지금은 그 일이 한낱 괴담이 되어 버렸네만 당시엔 코앞의 현실이었어. 황실이 전복될 위기에 처했다. 그때, 원로회에서 손을 내밀었다네.”

거기까지 말한 황제는 제 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묻더군. 모조리 죽고 새로운 황실의 거름이 될지, 그게 아니면.”

그 나이라 믿을 수 없이 잘 관리된 몸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인상 깊은 것은, 단단한 육신을 옭아매듯 새겨진 검은 사슬 문양이었다.

“위에 하나의 세력만을 더 섬기겠느냐.”

그 사슬은 색만 다를 뿐, 내가 다루는 것과 정확히 같은 형태를 지녔다.

에덴의 짓이다.

나는 곧바로 확신했다.

“원래도 황실이 검은 뱀에 협조적인 입장이었음을 부정하진 않겠네. 다만 이제는 그러한 수준을 넘어섰지. 즉위식의 마지막 단계가 그들을 만나는 일임을 아는가?”

제 몸에 아로새겨진 문양을 확인시키고 황제는 다시 셔츠를 잠그며 말을 이어 갔다.

“내가 검은 뱀을 거스르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네. 그런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허용되지 않아.”

“…….”

“그러니 자네들이 그들의 적이라면, 나 또한 같다고 할 수 있겠네.”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크루엘로. 가깝진 않았어도 내, 너의 외숙으로서 부탁하마.”

그의 두 눈에서 형형한 불길이 일었다.

그건 아주 오래전부터 지핀 불길이었다.

뒤늦게, 나는 황제가 크루엘로를 집무실로 부른 게 오래전부터 그려 온 그림이 아닐까 의심하게 됐다.

그만큼 황제의 이야기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나를 죽여 다오.”

“…….”

“나를 죽이지 않으면 이 굴레는 영원히 끊기지 않아. 지금은 잠잠한 듯해도 곧 뱀의 모가지가 얼굴을 들이밀 게다. 다시 내전을 일으키려 들지도 몰라.”

“원로들은 다 죽었어요.”

“죽었다고? 하하, 이 주박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

황제는 드디어 감추지 못하고 제 감정을 드러냈다.

흥분한 사내가 집무실의 책상을 거세게 내려치며 소리쳤다.

“살아 있어! 시전자가 다 죽었다면 어찌 내 몸에 이 저주가 고스란히 남아 있단 말이냐.”

“그래서. 수십 년 전 황족들의 허물 때문에 저더러 역모의 죄를 뒤집어쓰라는 말씀입니까?”

“그게 아니라면 너 또한 영원히 뱀굴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거다. 장담하마.”

붉게 물든 사내의 눈은 금방이라도 피눈물을 쏟아 낼 것처럼 이글거렸다.

그는 몸소 단검을 꺼내 강요하듯 그걸 집무실의 책상에 올려 두었다.

쾅, 소리가 요란하다.

듣자듣자 하니 이 아저씨가 재수 없는 말만 늘어놓네.

“그러니까. 황제폐하께서는 어쩔 수 없으니 아직 주박에 묶이지 않은 황태자전하께 보위를 넘겨서 검은 뱀을 한 번에 밀어 버리라는 말씀이신가요? 역모죄를 쓴 크루엘로가 쫓기다가 죽든 말든, 그런 건 알아서 하고?”

뭐, 그렇게 해 달라는 게 많담.

크루엘로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고 황제의 얼굴엔 짙은 노여움이 서렸다.

그러나 화를 낼 사람은 나였다.

“직접 하시지 그래요? 죽는 게 뭐 어렵다고.”

“그딴 편법이 통했다면 진작 했네.”

“그러면 황태자전하께 부탁하셔야죠. 왜 이럴 때만 해 준 것도 없는 조카를 찾으실까.”

“감히! 지금이 자네가 끼어들 자리로 보이는가!”

황제가 노기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래, 이만하면 많이 참았지.

신분제의 정점에 선 이가 평민 출신의 어린애한테 조롱을 들었는데 말이야.

나도 어지간해선 바깥의 제도를 존중하려고 했다.

그래도 정도껏 해야지.

결박은 자기 선조가 뒤집어썼고 자기는 현상 유지에만 급급했으면서 뭐?

황위 교체는 크루엘로가 하고 교단을 미는 건 황태자가 해라?

황제의 눈에서 불길이 인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그에게 남은 건 타고 남은 잿더미뿐이다.

“그러네. 신분제 사회에서는 끼어들 자격 같은 게 필요했죠?”

그렇게 말하고 나는 곧바로 성력을 끌어 올렸다.

그래도 하루를 더 쉬었다고 또 각혈하지는 않았다.

입안이 부글거리기는 하지만 참을 수 있다.

그러나 흑마법이 아니기에 성력을 쏟아내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었다.

나는 황제의 몸을 뒤덮은 주문을 탐색했다.

나와는 다소 다른 느낌이었으나 분명히 페불라의 성력이다.

맹세 주문을 변형한 형태 같은데, 소실된 주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구조는 내 것과 같았기에 약한 부분을 공격해 풀어내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새하얀 성력이 황제의 몸을 항해하듯 구불거리며, 툭툭, 주문의 핵심을 끊어 냈다.

그리고 머잖아 모든 게 마무리됐다.

“제가 폐하의 생명의 은인이 된 것 같은데 이젠 좀 끼어들 자격이 되나요?”

황제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떻게…….”

내가 성직자라는 걸 처음 안 사람처럼 군다.

황태자가 입이 무겁긴 한가 보네.

“불경하게도 한 말씀 올리자면 폐하, 죽음을 각오하는 것만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죽는다고 무슨 문제든 해결됐다면 나는 벌써 세계를 두 번은 구했을 것이다.

흥!

“가요, 크루엘로.”

나는 크루엘로의 팔을 잡아 당겼다.

졸지에 욕을 먹고 남을 도와준, 속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지만, 나름대로는 계산하고 벌인 짓이었다.

황제가 에덴의 수하로 남아 있으면 어떤 귀찮은 일이 생길지 몰랐으니까.

자칫하면 정말 크루엘로가 반역의 죄를 뒤집어쓸지도 모른다.

그건 싫다.

나는 끔찍해도 돌아갈 곳이 있었지만, 크루엘로에겐 바깥이 전부였으니까.

이 애에게도 있을 곳은 필요했다.

그렇게 집무실의 문을 열기 직전, 뒤쪽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자는 여인이었고 사내였고 노인이었고 어린아이였으며 천사였고 악마였고 인간이었으며 괴물이었다.”

익숙하게 들리는 구절에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자네가 신학관에 들렀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어떤 책을 펼쳐 봤는지에 대해서도.”

황궁 도서관에 입관했을 때다.

한창 페불라 악신설을 조사하던 중, 레카논의 신도에게 단서를 얻어 신학관으로 향했고 고대 신학 도서의 가운데 틈에서 낱장 하나를 발견했다.

「수많은 빛이 그를 차마 단죄하지 못함은 그자의 등에 올라탄 거대한 빛에 뒤덮임이다.

예언자 호르메이아가 가로되, 장차 인류는 900년의 평안을 얻을 것이며 그간에 죄악은 그림자 속에서만 옷자락을 스칠 것이다.

제자 텔가가 스승에게 물었다.

그러면 900년 후에는 어찌 되겠나이까.

호르메이아는 답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 구절을 읽어 줬던 사람은…….

에덴?

크루엘로가 소리 없이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에덴 화이트데저트였다.

“정작 학자들은 쳐 주지도 않는 사료라지만, 나는 그 예언을 질리도록 읽었어.”

“……어째서요?”

“황실에 비밀리에 전해지던 예언의 일부였다네. 지금은 대부분의 자료가 소실되었지만, 그 예언서에는 반역의 날에 대한 기록도 있었어.”

그래서 더 저항하지 못했지.

“개인적으로 파악해 두었던 그들의 힘에 더불어 그러한 예언까지 있었으니 말이야.”

황제는 실소하며 집무실의 의자를 당겨, 거기에 걸터앉았다.

“어머니의 말씀이 잊히질 않는군. 당신께서는 그날, 기어이 괴물이 찾아왔노라 말씀해 주셨다네.”

“…….”

“이 또한 자네에겐 변명으로 들리겠네만.”

“사정은 누구에게나 있어요. 남들이 일일이 알아주길 바라는 건 과욕이죠.”

적어도 나는, 누가 내 고생을 알아주길 바란 적은 없었으니까.

더 기다리지 않고 나는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빚을 하나 달아 두시게. 그토록 염치없지는 않으니.”

못 들은 척하며 나는 집무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기 직전, 틈새로 황제의 마지막 말이 흘러나왔다.

“시오라 보네티. 그대가 그 광명한 빛이길 바라네.”

내 머릿속에 에덴의 목소리가 둥둥 떠다녔다.

“그때는 광명한 빛이 세상을 어루만질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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