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그리고 크루엘로는 곧바로, 자기 멋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했다.
우리는 황궁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저지당했고, 곧 대단히 긴장한 시종장에게 이런 안내를 받았다.
“죄송하지만 공작전하, 폐하께서 당분간 전하의 궁내 출입을 제한하라 하셨습니다.”
그렇지, 슬슬 사고를 칠 주기가 됐지.
나도 아는 걸 황제가 모를 리 없다.
크루엘로의 눈썹이 까딱이는 걸 보고 나는 번쩍 손을 들었다.
“그러면 저 혼자 들어갈게요.”
“……예?”
“출입을 금지당한 건 크루, 아니 공작전하뿐이니 전 괜찮잖아요.”
“죄송하지만, 레이디 시오라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왜!
억울하다.
내가 친 사고는 크루엘로의 반의반의 반도 안 되는데!
심지어 사고라기보다는 영웅담으로 미화해도 좋을 이야기들이었다.
크루엘로의 약혼자라고 싸잡힌 게 틀림없어.
내가 슬퍼하는 걸 보고 크루엘로는 웃었다.
“그렇다면 할 수 없네요. 가요, 달링.”
그는 나를 에스코트하며 황궁 입구에서 돌아섰다.
얼떨결에 따라가면서도 갑자기 크루엘로가 낯설게 느껴졌다.
원래 질척거리는 게 삶의 모토가 아니었나?
이렇게 깔끔하게 돌아서도 돼?
황태자를 안 구하면 교단 뒷정리는 누가 해 주는데!
너도 허수아비 가주라 그런 일 해 본 적 없잖아!
눈빛으로 온갖 항의를 다 쏟아 냈으나 크루엘로는 기다려 보라는 듯 검지를 제 입가에 가져다 대기만 했다.
그렇게 세 걸음쯤 걸었던가, 크흠! 시종장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그, 그러고 보니 슬슬 코카브 궁을 재정비할 때가 된 것 같군. 빛 한 점 들지 않아 누굴 가둬 놓기 딱 좋은 곳이었지. 경비가 자리를 비우는 게 새벽 2시쯤이었던 것 같은데, 크흠.”
혼잣말인 척하려거든 작게나 말하든가.
차라리 연극 대본을 읽는다 해도 저리 어색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가련한 할아버지를 위해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
그리하여 크루엘로는 코카브 궁으로 가는 게이트를 뚫기 시작했다.
심심했는지 연기 못하는 할아버지 이야기도 해 주었다.
“시종장은 아이가 없어요. 그래서인지 어릴 때부터 돌봐 온 황태자를 제 자식처럼 생각하더라고요.”
“아하.”
“계속 내버려 둘 수는 없었겠죠. 황명이니 따르긴 해도 계속 기회를 봤을 거예요.”
크루엘로의 부연 설명을 들었으나 온전히 납득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들키면 적당히 넘어가긴 힘들 것 같은데.”
코카브 궁인지 코르크 궁인지.
크루엘로가 게이트를 뚫는 모습만 봐도 일의 심각성이 느껴진다.
황궁이라 남다른 건지 아니면 황태자가 잡혀 있어서 그런지, 마법적인 방비가 상당했다.
한 번씩 그를 방해하듯 푸른 전류가 솟아올랐고 그래서 시종장의 도움이 더 위태로워 보였다.
“글쎄요, 용기를 낸 건지 황제의 암묵적인 용인이 있던 건지.”
“오…….”
후자라면 황제는 변태가 틀림없다.
본인이 가둬 놓고 풀어 주도록 은근히 부추긴다?
자기가 곤경에 처하게 해 놓고 상대를 구해 주는, 삼류 연극과 뭐가 다르담.
“뚫렸어요.”
그렇지만 시종장 본인이 결정한 일이니 알아서 감당하리라 믿는다.
결코 기다리기 지루해서 그 할아버지 걱정으로 시간을 때웠던 건 아니다.
곧, 크루엘로의 앞에 게이트가 생겨났다.
안으로 들어가며 그가 말했다.
“코카브 궁은 어릴 때 황태자가 하사받은 궁이에요. 작은곰자리의 베타성을 그대로 따 와 이름 지었죠.”
“마침 이 궁의 비사가 더할 나위 없이 궁금하던 참인데 설명 감사해요.”
“그냥 구조를 좀 안다고요. 가끔 온 적이 있어서.”
게이트를 두어 번 더 넘어가자 새까만 어둠이 사방을 메웠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곳, 그 가운데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황태자가 어떤 모습으로 갇혀 있을지를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역시 더미 가보트 꼴이려나.
안대로 눈이 가려지고 사지가 의자에 묶인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불이 들어온 순간, 내가 본 광경은 실망스러웠다.
“……꿈인가?”
황태자는 멀쩡하게 서 있었다.
건강해 보인다.
심지어 빛은 그녀가 든 마석 램프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감금당하신 거 아니었어요?”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실망한 목소리에, 황태자는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어떤 꼴을 기대한 거지?”
“좀 더 극적인 모양새를 바랐죠! 우리가 구해 주지 않으면 언제 숨이 넘어갈지도 모르는! 생명의 은인에게 전 재산을 내어 줄 마음이 드는 그런 모습이요.”
“자네에게 내가 황태자라는 자각이 있으면 좋겠군.”
“전쟁 중에 황태자전하가 인질로 잡히더라도 그보단 나은 대접을 받을 거예요, 달링.”
이래서 신분제란!
내가 실망감을 달래는 동안, 크루엘로는 허공에 불 몇 개를 더 띄웠다.
주변이 완연히 밝아지자 장면이 조금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새까만 복면을 입은 이들이 한 무더기 쓰러져 있고 황태자의 몸 곳곳에서 상처 자국을 발견하기도 했다.
물론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밤을 화려하게 보내셨네요.”
“유감이네만, 밤낮을 가리진 않았어.”
“미안한데 제가 지금 좀 힘들어서요. 그 정도는 자연치유력으로 해결해 주세요.”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미리 거절해 줘서 참으로 고맙네.”
“그런 게 다 배려심이죠.”
“그래서 자네들은 또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건가.”
황태자는 태연한 척 어깨를 으쓱였으나 얼굴에 자조의 기색이 묻어났다.
“내가 내 일을 다 하지 못했다고 따지러 온 건가.”
“음, 반쯤은요?”
“그러면 나머지 반절은 뭔가.”
“잘못된 일을 바로잡고 전하의 의무를 수행하시라 등을 떠밀러 왔습니다.”
“……이제 와 말하기 참으로 궁색하네만, 할 수 없네.”
어라.
황태자, 멋있었는데 벌써 타락했나?
눈을 깜박이자 그녀가 이유를 덧붙여 말했다.
“아무리 고결한 뜻이라 한들 부친의 목숨과 맞바꾸어 가며 이룰 수는 없지 않겠는가.”
내가 부탁할 건 개미집 뒷정린데 왜 황제의 목숨 얘기를 하시는지?
의아해 물으려던 차에 줄리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황제한테도 그 짓거리를 해 놨다면 이해할 수는 있었다.
내가 해결할 수도 있을 테고.
“그러고 보니 자네들은 부모가 없어서 모르겠군.”
“저기요? 그거 사실이긴 한데, 왠지 기분이 나쁜데요.”
“이해해요, 달링. 원래 황족이란 족속들은 태어날 때 탯줄과 함께 공감 능력도 같이 잘라 버리거든요.”
“……실언이었네, 사과하지.”
흥.
황태자의 말을 못 들은 체하고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이들을 둘러보았다.
흑마법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계속해서 들이닥친다면 황태자의 목숨도 장담할 수는 없다.
자기 목이 달랑달랑한 건 괜찮은데 황제의 목은 지켜야 한다고?
이걸 효심이 깊다고 해야 할지, 미련하다고 해야 할지.
어쨌거나 결론은 난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선 황제를 만나야 했다.
황궁 출입도 막아 버린 걸 보면 쉽게 만나 주지는 않겠지만, 약간의 창의력을 발휘하면 간단해진다.
“자네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야. 그러니 이만 돌아들─.”
“크루엘로, 여기에 불 질러 보면 어때요?”
“네?”
“뭐?”
아무렴 자식을 가둬둔 궁에 불이 났으면 들여다보러는 오겠지.
황태자의 미약한 저항은, ‘전하를 살리고 싶은 제 충정을 이해해 주십시오’로 대충 뭉개고 넘어갔다.
못 움직이게 마법으로 묶어 뒀다는 말이다.
그리고.
“와, 저 이렇게 큰불은 처음 봐요. 수확제 불꽃놀이도 이것보단 규모가 작을 것 같은데.”
“그때 못 본 게 서운했어요?”
“엥? 아니요, 이쪽이 보기 드물잖아요.”
황태자가 감금된 궁을 불태워 황제를 불러내는 건 나밖에 안 해 봤을 거야.
코카브 궁의 궁인들은 재워서 내보냈고, 불이 다른 건물로 옮겨붙지 않도록 꼼꼼히 신경 썼다.
새카만 매연은 사람을 피하듯 위로만 올라갔고 뜨거운 열기는 마법이 중화해 주니 이만한 볼거리도 없다.
즐기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뿐이다.
나는 침묵 마법에 당해 굳은 황태자를 흘겨보았다.
계속 싫다, 안 된다, 소리만 하고 말이야.
반대를 입에 담으려면 대안도 같이 가져와야 하는 거 아닌가?
고지식한 지도자는 골치 아프다니까.
나는 그녀를 놀리듯 말했다.
“저분이 즉위하시기 전에 제국을 떠야겠어요.”
“어디로 가려고요?”
“음.”
내…… 신전.
생각하니 암담해져서 정정했다.
“생각해 보니 이 나라도 살기 괜찮은 것 같아요.”
그쯤에서 우르르 몰려오는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크루엘로는 투명 마법으로 우리 세 사람의 모습을 감추었다.
저 중에 황제도 있겠지? 왔겠지?
나는 두근거리며 결과지를 확인했고 무리의 선두에서 답을 찾았다.
깔끔하게 넘긴 백금발에 사자를 닮은 중년.
있다!
황제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나는 기대하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보인 반응은 내가 예상치 못한 종류였다.
“이런 장난은 그만하시게.”
어라.
중후한 목소리에 나는 눈을 한 번 깜박였다.
“이젠 철이 들 때도 되지 않았나, 공작.”
황족들은 무슨 일만 터지면 크루엘로를 의심하는 건가?
적중률 100%라는 점에서 소름이 돋는다.
크루엘로는 천연덕스럽게 투명 마법을 해제하고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유년기를 너무 험하게 보내서 그런지 철이 잘 들지를 않네요. 잘 지내셨습니까, 폐하.”
여전히 나와 황태자는 보이지 않는 채였다.
“고, 고, 공작전하?”
“세상에 이게 무슨…….”
당황해 웅성거리는 이들 틈바구니에서 황제만이 침착하게 말했다.
“일단 불부터 끄시게.”
“독대를 허락해 주신다면 기꺼이.”
황제는 피곤하다는 얼굴로 눈가를 문지르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크루엘로의 손짓에 새빨간 화마가 녹듯이 사라졌다.
동시에 황태자에게 걸려 있던 투명 마법도 풀렸다.
결박 마법도 함께 지워져서, 마치 그녀가 크루엘로의 기행에 동조한 듯한 그림이 나왔다.
그럼에도 황제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제 딸을 바라보다가 툭하니 내뱉었을 뿐이다.
“근신은 이제 되었다. 폴라리스. 네 궁으로 돌아가거라.”
“……예, 황제폐하.”
반응이 생각보다 싱겁다.
크루엘로의 기행 때문에, 황제도 이런 일이 익숙해진 모양이다.
실망하며 나는 크루엘로를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