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타인의 육신을 쓰는 한, 영혼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는 없다.
몸과 혼을 억지로 묶어 놓아야 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그 결합은 약해진다.
무리하게 성력을 쓰면 그 몸에 머무를 수 있는 기한은 더 짧아진다.
내가 에이미로 지내던 때 점점 몸이 약해진 건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데이디어가 가져온 기록에 따르면, 에덴은 남의 몸에 머무르는 시간을 어떻게든 늘려 온 것으로 보인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아니, 그보다 근본적인 의문이 있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던 건 페불라의 권능 덕분이다.
그러나 에덴은 나 이상으로 자유롭게 몸을 갈아타며 살아온 듯 보인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정리된 줄 알았던 머릿속이 다시금 혼란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 생각을 정리할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자네가 하려는 말이 뭔가.”
“소몬 후작의 건을 근거로 말씀드립니다. 이들이 모두 동일인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잘못하다간 에이미까지 한패로 엮이겠는데.
크루엘로의 표정을 살피고 싶었으나, 나는 필사적으로 마음을 억눌렀다.
데이디어의 말이 이어졌다.
“정확히는, 남의 몸을 빼앗아 그 인생을 대신하는 존재가 있을 거란 가설입니다.”
“가능하다면 그 또한 영생이로군.”
“교단의 목적에도 정확히 부합합니다. 아쉽게도 근거는 그뿐이라 내세울 수는 없겠지만요.”
그녀는 찻잔을 기울여 목을 축였다.
“하나뿐이지만,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언행이 달라진 케이스도 있습니다.”
“……에이미?”
“예. 그래서 추가적인 조사를 바라신다면 전하께서 그 아가씨에 대한 이야길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크루엘로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의 침묵이 길어지는 동안, 내 심장 소리가 공백을 메웠다.
두근두근두근, 분명히 들릴 것 같은데 미치겠네.
나는 어떻게든 진정하기 위해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잠시 뒤.
“그 애는 아니야.”
“……에덴은 진짜 아니야.”
크루엘로의 목소리가 이전에 들은 말과 겹쳐 들렸다.
나는 차를 마시지도 잔을 내려 두지도 못한 채로, 잠시 묘한 기분을 느꼈다.
에덴을 향했던 맹목적인 신뢰가 에이미에게 여전히 남아 있다.
어떻게 아직도 사람을 믿는 걸까.
그의 신뢰는 이미 산산조각이 난 적이 있었는데 말이다.
몹시 기이했고 그 이상으로 기꺼웠다.
나를 믿는구나, 크루엘로는.
나는 찻물과 함께 불안의 덩어리를 삼켰다.
“그렇군요. 하기야 화이트데저트의 혈족이 아니신 데다가 발병 시기도 일렀으니까요.”
데이디어는 아쉬운 기색도 없이 가설을 폐기했다.
그러고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릴 말씀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러면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네.”
“레이디 시오라, 괜찮다면 배웅해 주시겠습니까? 개인적으로 여쭐 것이 있어서요.”
나는 크루엘로를 흘긋 살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디어는 내게 보폭을 맞추려는 듯이 느리게 걸었다.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복도를 울린다.
물어볼 게 있다고 한 사람치고 그녀는 몹시 조용했으나, 재촉하지는 않았다.
짐작 가는 것이 있었으니까.
데이디어는 응접실에서 한참은 멀어지고야 입을 뗐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공작전하의 주변에 수상한 사람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냥 제가 수상하다고 바로 말씀하시지 그래요.”
“죄송하지만 그렇습니다. 조사 결과, 이전과 성격도 달라지셨고 드러난 행적 자체가 없다시피 했으니까요.”
“제가 검은 뱀으로 보여요?”
“그건 아닙니다.”
하기야 내가 검은 뱀으로 보일 정도면 눈 대신 단추를 달고 다니는 거겠지.
데이디어의 두 눈에 실 구멍이 없다니 다행이었다.
“조사관의 업무를 하다 보면, 현실적인 논리보다 막연한 직감이 잘 맞아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제법 자주 있는 일이지요.”
“그래서요?”
“망상을 해 봤습니다. 남의 몸을 쓰면서 긴 세월을 거쳐 온 이가 있다면 꼭 하나뿐일까 하고.”
“둘이면 뭐가 달라지나요?”
“글쎄요. 둘이라면 누군가는 정의의 편이 아닐까요?”
말하며 데이디어가 조용히 웃었다.
“조사관이 내놓기엔 참으로 형편없는 가설입니다. 그러길 바랐을 뿐이니, 소설을 썼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뒤, 그녀는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부터는 혼자 가겠습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만 레이디, 줄리안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줄리안은 어디에 있어요?”
“지금은 제 별장에 가 있습니다. 일이 마무리되면 데려오겠습니다.”
아, 데이디어는 잊고 있었다는 듯 덧붙였다.
“혹 교단에 대한 정보가 더 필요하시거든 황제폐하를 찾아봬도 괜찮을 겁니다.”
“찾아간다고 뭘 들을 수나 있겠어요. 원로를 갖다 바쳐도 뭉그적거리며 움직이질 않던데.”
“그건, 그분께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으셨을 겁니다.”
“아하, 요즘은 권력자의 눈치를 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라 눈감아 주나 봐요.”
“진정으로요. 오죽하면 군사를 끌고 가려던 황태자전하를 감금해 말려 죽이고 계실까요.”
응?
이런, 데이디어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표정으로 제 말을 수습했다.
“말실수를 해 버렸군요. 저희 아버지께서 은밀히 알려 주신 정보인데 비밀로 해 주시겠습니까?”
“저기요, 데이디어 경.”
“그러면 저는 정말로 가 보겠습니다. 레이디의 앞길이 무탈하길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용건을 마쳤다는 듯이 데이디어는 정중히 허리를 구부리고는 내 앞을 지나쳐 걸었다.
허, 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가 더 멀어지기 전에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장신의 기사에게, 아니지 아마추어 소설가에게 해명했다.
“저는 젊어요. 태어난 지 30년도 안 됐어요.”
남의 몸을 좀 썼다고 나이가 많다는 건 커다란 착각이다.
“그러…… 시군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가 눈을 깜박였다.
못 알아듣겠으면 말고.
늘 그랬듯 변덕을 부리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휙 하고 몸을 돌렸다.
응접실로 돌아가면서, 나는 다시 머릿속을 의문으로 채웠다.
에덴, 페불라, 남의 몸, 수명.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는데 설마 페불라께서 에덴에게 권능을 빌려주신 건 아니겠지?
나는 위쪽을 흘겨보다가 일단은 신뢰를 회복한 지 얼마 안 된 내 신을 좀 더 믿어 드리기로 했다.
비가 때 기억도 적당한 수준에서 잘라 주신 것 같으니까.
일단은 데이디어가 주고 간 통계 자료부터 낱낱이 뜯어보자.
발은 금세 응접실 앞에 닿았다.
벌컥 문을 열어젖히자, 크루엘로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다리를 꼬고 느긋하게 찻잔을 기울이며 자료를 살피고 있었다.
자기 집이야, 아주.
크루엘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뭐래요?”
“황태자가 갇혀 있으니 구해 달래요.”
“저런. 더 줄 만한 대가도 없을 텐데.”
“황태자한테 받아야죠, 뭐.”
명색이 황태자니까 개인 자산이 동화 한둘은 아니겠지.
***
이쯤 되면 누군가는 내가 자선 사업에 취미가 있나 의심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검은 뱀 교단을 뒤처리해 줄 사람은 꼭 필요했다.
배후가 똑똑히 살아 있는 판에 또 무슨 짓을 벌일 줄 알고.
조금만 더 고생하면 평생이 편안하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처리해야 할 문제 하나가 더 눈에 들어왔다.
마차를 타고 있어서 그 골칫덩이는 아주 가까이 있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를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는 사내, 크루엘로 말이다.
어떻게 꼬여내야 나를 모리온 앞까지 데려가 줄까.
그에게 열쇠가 전부 있다는 걸 알지만, 안다고 말할 수가 없다.
역시 모든 사실을 까발리고, 열쇠를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게 최선인데.
[침묵하라.]
예, 오랜만에 연락 주시네요.
그렇게 찾을 땐 계시 한 자락 안 내려 주시더니.
나는 뇌리를 가득 채운 신어에 부루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지름길이 안 된다면 하는 수 없지.
“크루엘로.”
창밖을 바라보던 이가 눈을 돌려 나를 쳐다봤다.
“열쇠 말인데요, 어디서 찾아보는 게 좋을까요?”
“……글쎄요.”
크루엘로는 한 번 입을 다물었다가 곧 다시 말을 이었다.
“생각해 봤는데요, 달링. 마지막 남은 열쇠를 꼭 찾을 필요가 있을까요?”
“네?”
이게 뭔 오래간만의 개소리야?
“자기가 염려하는 건 누군가 모리온을 이용할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이용할 ‘수도’ 있는 게 아니라 이용하는 걸 봤다.
네가.
지금 입 열고 있는 당사자가.
비가를 되살리려던 크루엘로 화이트데저트가.
입이 근질근질했으나 내가 할 수 있는 답은 끽해야 ‘네’뿐이었다.
화병 걸릴 것 같아.
“하지만 상당수의 열쇠가 내 손에 있어요. 잘 관리하면, 아무도 손댈 수 없을 텐데 그걸로 충분하지 않나요?”
순순히 마지막 열쇠의 행방을 밝힐 생각은 없나 보군.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
아직 비가 부활을 포기하지 않았나?
그게 아니면, 모리온에 홀려 버린 건 아니겠지?
조금쯤 불안해져서 나는 더 단호하게 말했다.
“미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확실히 해야죠.”
“그래요? 확실한 게 좋구나.”
“당연한 소리를.”
거기서 대화를 끊고 크루엘로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눈빛에선 기묘한 감정이 일렁이는 듯했다.
곧이어, 그가 잠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달링.”
“네.”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요?”
별거 아닌 질문인데도 말문이 탁 틀어막혀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타이밍은 금방 지나갔다.
곧, 다른 말에 물음표가 붙었다.
“아직 나를 믿어요?”
“……크루엘로는요.”
혀끝으로 겨우 밀어낸 답이 이 모양이라니.
크루엘로는 어떠한 말도 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얼마 안 가 마차가 멈출 때까지 계속.
마부가 문을 열자 크루엘로가 먼저 내렸다.
나는 그 뒤를 따라가며,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혔다.
나는 그렇다 치고 쟤는 갑자기 왜 저런담.
크루엘로한테도 잃어버렸던 영혼 조각이 날아가 기억을 되찾아 준 건 아닐 텐데.
아, 잠깐만.
무언가가 생각날락 말락 머릿속을 아른거려서 나는 마차 문 앞에 잠시 멈추어 있었다.
정말, 잠시뿐이었는데!
“뭐, 뭐 해요!”
몸이 덜렁 들려 올라갔다.
당연히, 크루엘로다.
“머릿속이 시끄러운 것 같아서. 하던 생각 계속 해요. 내가 데려다줄게요.”
“아니, 이런 상태로 누가 무슨 생각을 해요? 내려요!”
“싫어요.”
싫다는 말이 어쩜 저렇게 당당하게 나와?
기가 막혀 말문도 막힌다.
이게 네 몸이야?
물론 내 몸도 아니긴 한데……!
“그냥요.”
크루엘로는 나를 끌어안은 채로 천연덕스럽게 중얼거렸다.
“나도 이제 내 멋대로 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