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사실 그때는 몰랐어. 원체 흔한 이름이잖아? 하지만 에이미에 이어 비가가 오니 알았지. 아, 이건 제물의 몸을 빌려 쓴 페불라의 신도로구나.”
‘내가 에이미인 건 모르나 본데.’
비가는 내색하지 않고 상황을 정리했다.
“푸가 신전을 통째로 숨겨 놓은 건 나였어. 후일에 대비차 넣어 놓은 건데 아직도 그 신도들이 살아 있을 줄은 몰랐지. 그래서 아주 반가웠어. 호의를 베풀어 여러 가지 알려줄 만큼이나.”
그런데.
에덴의 그림자가 부풀어 오르더니 커다란 뱀의 형상을 입었다.
어둠이 씻기듯 흘러내리고 흰 뱀이 비가를 위협하듯 입을 벌렸다.
“아주 형편없더구나. 더는 이야기를 나눌 가치조차 없겠어.”
“알고 싶으면 오라더니?”
“나와 한 몸이 되면 전부 알게 될 거야.”
뱀은 이미 비가의 목숨이 제 입 안에 있다는 듯이 느리게 움직여 그녀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비가는 당장 공격 주문을 날리고 싶은 걸 참았다.
“날 죽이면 열쇠는 못 찾을걸.”
“하하, 그게 뭔지나 알고 하는 협박이야?”
“글쎄. 모리온이 든 방문 열쇠라도 되나 보지.”
“그래도 눈치는 있구나. 맞아, 열쇠 마법이라고 해. 교단의 초창기 때 만들어진 마법이야.”
기특하다는 듯 웃은 에덴이 설명을 이어 갔다.
들뜬 어린아이가 제 성과를 자랑하는 듯한 태도가 역겨웠으나 참고 듣는 게 이득이었다.
“모리온을 만들기 시작한 때 말이야, 잘못해서 신전의 눈에 띄면 곤란하니까 다섯 개의 열쇠가 모여야 힘으로 가는 문이 열리도록 했지.”
“열쇠는 원로들이 나누어 가졌겠네.”
“원래는 네게 열쇠까지 알려 줄 생각이 없었어. 그러니 헤오림의 눈에 넣은 걸 알아봤을 때 기대한 건데 정말로…….”
“…….”
“궁금한데 푸가 신전의 신도들은 수준이 다 그렇게 형편없니? 아무리 평신도라고 해도 나 땐 안 그랬는데.”
“내가 평신도 같아?”
“재볼 거 없어. 지금 그 신전에 수준 높은 신도가 남아 있을 리 없잖아? 있다 한들, 귀한 몸일 테니 함부로 신전 밖에 내돌리지도 않았을 테고.”
성자라면서 자기 신을 그렇게도 모르는군.
역시 상대의 말을 다 믿을 필요는 없었다.
인간 제물을 바친 것도, 검은 뱀을 만든 것도 페불라가 아닌 이자의 뜻.
제 행적을 신에게 덮어씌우려 하다니.
별로 신실한 신도가 아니었음에도 분노가 치솟는다.
하지만 비가는 감정을 잘 달래며 제 계획을 되새겼다.
「…….
베아티투도를 이용해 생자에게서 영혼을 뜯어내는 데 성공했다. 영혼의 일부를 떼어 냈을 때 기억의 일부가 소실되는 부작용을 확인했다.
…….」
교단을 뒤지며 발견한 기록이다.
그리고 그 후, 더 상세한 일지도 찾을 수 있었다.
영혼 조각이 생자에게 돌아왔을 때 생자의 기억이 돌아왔다.
그 말은 즉, 조각에 기억이 담긴다는 말이었다.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베아티투도를 이용해 영혼을 뜯어낼 수 있으면, 순수한 성력으로도 가능하지 않을까.
저처럼 남의 몸에 깃든 불안정한 영혼이라면 그 가능성이 올라가지 않을까.
물론 비가가 미치광이 연구자라 이유 없이 제 영혼을 뜯어보고 싶어진 건 아니었다.
그녀의 의도는 그 부작용 쪽에 있었다.
‘크루엘로가 내 말을 믿지 않겠다면, 직접 보여 주는 수밖에.’
믿던 이에게 배신당해 마음이 찢기는 것이, 아무것도 모르다가 영혼을 찢기는 것보단 낫다.
비가는 제 기억을 실어 크루엘로에게 날려 보낼 예정이었다.
다음이 있다는 걸 알기에 이런 무모한 짓까지 계획할 수 있었다.
에덴의 입이 더 벌어질 기세가 없자 그녀는 성력을 모았다.
비가를 휘감은 뱀이 곧장 반응해 그녀의 몸을 조여들었다.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어? 살아 나가게 둘 거였으면 주절주절 떠들어 대지도 않았지.”
압박감이 온몸을 짓눌렀으나 그녀는 피하지 않고, 외려 뱀의 비늘에 손을 올렸다.
“그래서 확인해 보려고.”
“응?”
“네가 얼마나 강한지, 성자라는 건 진짜인지, 그렇다면 페불라의 가호가 남았는지, 네크로맨서로 전향했는지, 전부 말이야.”
온전히 네크로맨서가 되어 버렸다면 결코 살아남지는 못할 것이다.
─8주문. 낙원heaven.
비가는 제가 쓸 수 있는 성력을 모조리 쓸어 담았다.
폭발적으로 치솟은 새하얀 기둥에 시야마저 분명치 않았다.
그 힘으로 1차적으로는 제 영혼의 일부를 뜯어냈고 2차적으로는 에덴과 뱀을 공격했다.
그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걸로 에덴이 죽으면 좋고, 죽지 않더라도 다음 생에 그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영혼을 뜯어내는 게 잘하는 짓이란 확신은 없었다.
억지로 영혼을 떼어 내더라도, 그 안에 어떤 기억이 담길지 알 수 없다.
에덴에 대한 경고는 한 점 없이 제 신이 비밀로 하라고 한 은밀한 정보들만 담길지 모른다.
그러나 비가에겐 그 불확실함을 메꿀 방법이 있었다.
‘페불라시여, 믿겠나이다.’
정녕 제 신이 세계를 구하길 바란다면, 그 조각에 담길 기억들을 그녀가 선별해 줄 것이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페불라를 향한 믿음인 동시에 주제넘게도 제 신을 시험하는 행위였다.
과연 그녀가 제 뜻대로 움직여 줄 것인가.
저는 여전히 그녀를 믿어도 괜찮을까.
그리고 그 결과표는 다음 생에 받아 볼 수 있을 것이다.
흐릿한 시야에 투명한 무언가가 비쳤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형체를 보고 비가는 그게 제 영혼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냥 잘라 내기만 해서, 영혼 조각은 제게 되돌아올 게 뻔했다.
그러니.
─3주문, 전음signal.
새하얀 나비는 조각을 싣고 염원을 불태우며 날아갔다.
그 순간, 그녀의 육신은 과다하게 터져 나온 성력을 이겨 내지 못했다.
몸의 곳곳에서 어긋나는 소리가 울리고 신의 권능으로 억지로 묶어 둔 영혼이 풀려난다.
일부를 잃은 영혼은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에이미, 비가를 지나 이제는 시오라 보네티로.
온전치 못한 기억이 다음으로 전해졌다.
***
“큭!”
붉고 질척한 액체가 바닥을 적신다.
더는 견디지 못하고 사내는 쓰러져 무릎을 꿇었다.
그러며 자연스럽게 그의 손이 모리온에서 떨어져 나왔다.
부활의 진에서 빛이 꺼지기 시작하고, 세상 무엇보다 검은 에너지는 입맛을 다시며 다시금 자기들끼리 뭉쳐 들었다.
크루엘로가 상당한 에너지를 끌어 썼음에도 모리온의 위세는 조금 전과 다를 게 없었다.
“쿨럭, 흐…….”
크루엘로는 제 입가를 틀어막고 겨우겨우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엉망진창.
노도와도 같은 마나가 지난 자리에 오물 같은 흔적이 남았다.
그러나 그에겐 제 몸을 돌보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비가를 되살리기 위한 부활의 진은 분명 가동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제 몸이 모리온의 에너지를 통제하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영혼 조각은 그 힘의 일부도 집어삼키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다른 곳으로 날아갔어.’
조각의 힘을 부풀리는 데 실패한 것뿐이라면 그것은 부스러져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조각은 특정한 목적지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건.
「×월 ×일.
생자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왔다. 부활의 진을 발동시킨 순간, 영혼 조각은 생자에게 되돌아가 대상의 영혼에 도로 융합되었다.
…….」
살아 있는 이의 영혼 조각을 썼을 때 나타나는 반응이었다.
크루엘로의 두 눈에 강한 의혹이 담겼다.
***
눈꺼풀은 아주 느리게 올라간다.
나는 힘겹게 눈을 떴고 침실 천장을 바라보았다.
빼먹으면 안 되지, ‘내’ 침실이었다.
한두 번 본 광경도 아닌데 어쩐지 울컥해서 나는 손으로 두 눈을 덮었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더니.”
원해서 나간 것도 아닌데 너무해.
가슴 안쪽에서 기름이 끓는 것처럼 감정이 요동친다.
안 돼, 울지 마.
감옥에 다녀온 것도 아니고, 고향에 갔다 온 건데 이런 걸로 울면 창피하지.
나는 언제나 그랬듯 객관적인 사실에 집중하려 애썼다.
새로 알게 된 것들은 많았다.
잃어버린 줄도 몰랐던 기억이 깨끗이 돌아왔고 복잡하던 머릿속은 꽤 명쾌히 정리되었다.
비가는 과로사한 게 아니라 에덴에게 살해당…….
“그건 아닌가?”
엄밀히 말하면 살해하려고 애쓰다가 제 힘을 못 견디고 영혼이 튕겨 나온 거지만.
음, 없어 보이니까 살해당한 걸로 치자.
날 죽인 원한은 잊지 않겠다, 에덴!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긴 하다.
감히 신을 시험하려 한 벌을 받은 건지, 하필이면 그 기억이 싹 날아갈 줄이야.
페불라께서도 은근 뒤끝이…….
“흠흠.”
어쨌거나 당시 전력을 다했음에도 에덴은 무사했다.
그러면 그 괴물을 어떻게 죽여야 하지. 정말로 베아티투도를 구해야 하나?
그 외에도 의문이 남았다.
죽지 않은 걸 보면 성력이 남아 있는 것 같은데 그게 가능한가부터 시작해서.
수백 년을 살아온 건 베아티투도 덕분인지, 어떻게 주위의 의심을 받지 않았는지, 그의 목적은 뭔지 하는 것들.
그러나 그 모든 의문을 차치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은 두 가지였다.
에덴 화이트데저트를 처리하는 것. 그리고 모리온을 없애는 것.
결국 원로회의 배후를 알게 되었을 뿐 달라지는 건 없었다.
훨씬 어려워지긴 했어도…….
“응?”
고민을 이어 가던 중에 달각, 하는 소리가 귀에 걸렸다.
창가 쪽에서 났다.
나는 눈을 덮은 손을 치우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삐거덕거리며 요란한 비명을 내질렀으나 어떻게든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댈 수 있었다.
당장 적이 쳐들어온 거라면, ‘여기 있습니다!’ 하며 얌전히 목을 내줘야 할 상태다.
그러나 나는 긴장하지 않았고 상대를 경계하지도 않았다.
창 너머로 들어오는 긴 다리, 창틀을 쥔 손가락, 얇은 셔츠 차림의 상체.
그리고 붉은 눈동자.
“아.”
눈을 마주친 순간, 당황한 듯 흔들리고 마는 붉은 눈동자.
마음의 둑이 터져 버린 것 같다.
모르겠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순간에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게 맞을까.
나를 속이고 모리온에 손을 댔으니 분노해야 할까?
아니면, 죽은 비가를 그리워해 되살리려고 벌인 짓이니 애달파해야 할까?
일반적인 상황에서 평범하게 구는 건 이제 잘하는데도, 이처럼 특이한 상황에서는 어째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래서 나는 그냥 양팔을 벌렸다.
그에게 다가갈 기력은 없었다.
조금 전까지 혼잣말을 잘 내뱉던 목구멍은 감정의 덩어리에 짓눌려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크루엘로는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다가왔고 그가 내 앞에 다다른 순간.
나는 그를 덥석 끌어안았다.
이번에도, 별로 따뜻하진 않다.
그럼에도 혼자일 때와 비교하자면 사람의 온기란 불에 닿은 것만큼이나 뜨겁다.
아.
정말로.
“……시오라?”
그가 부르는 내 이름이라는 게 ‘시오라’라는 것까지도 너무 서러워서.
나는 그만 어린아이처럼 울어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울어 본 게 얼마 만인지도 모르겠다.
개운하긴 했다, 킁.
크루엘로의 옷을 아예 못 쓰게 만들고서 나는 고개를 들었다.
당황해 내 등을 어색하게 도닥거리던 남자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다 울었어요?”
“좀 남았는데 봐줄게요.”
나는 축축한 얼굴을 닦기 위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땅한 게 없는데 베티를 불러야 하나.
크루엘로가 내게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감사.”
다행히 그의 손수건은 젖지 않아서 얼굴을 말끔히 닦아 낼 수 있었다.
그러고야 그가 물었다.
“그래서 왜 운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