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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09화 (109/162)

109화

‘무슨 소릴 한 거람.’

상식적으로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보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친척이 가까울 건 당연하다.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내뱉은 당사자는 크게 당황했으나, 정작 크루엘로는 그 말을 황당하다는 듯 반응하지 않았다.

“나도 원로회를 의심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에덴은 아니야. 확실해.”

“제가 뭔가 이상한 부분을 찾아냈다고 하면요?”

“……오해가 있었겠지.”

아.

이건 다른 의미로 세뇌와도 같았다.

소년에게 에덴 화이트데저트란, 말하자면 또 다른 에이미였다.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크루엘로가 에덴과 공유한 세월은 에이미의 몇 배는 되었으니.

비가는 제 얄팍한 말 몇 마디로 크루엘로의 생각을 바꿔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에덴의 배신이 제 소년을 얼마나 아프게 할지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입술을 짓씹었다.

“그리고 에덴은 너와 달라.”

“……어떤 식으로 다른데요.”

“그걸 말로 해야 알아?”

“그 공자님과 저는 다른 게 너무 많잖아요. 신분이 다른가요? 아니면 나이? 키? 성별?”

답답함을 누르지 못하고 비가는 토해 내듯 채근했다.

“소공작님이 저를 좋아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건 아닐 거 아니에요.”

그리고 그, 아무 의미 없이 내뱉은 말에 소년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굳었다.

소공작님?

비가의 부름에도 그는 한동안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진 것 고작 몇 초 만의 일이었다.

“난…….”

크루엘로는 당황해 제 얼굴을 가리고는 뒤돌아 뛰어갔다.

혼자 남겨진 비가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중얼거렸다.

아.

“진짜 큰일 났다.”

***

그날 이후, 비가는 다시 크루엘로를 피해 다녔다.

한때의 열병일 게 뻔했지만, 그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아껴 쓴다고 해도 남의 몸, 평생 머무를 수는 없었다.

제 소년에게 두 번째 상처를 남기고 싶지 않았으니까.

처음, 크루엘로는 그런 비가에게 어떻게든 말을 붙이려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는 외려 비가를 피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의 표정은 어두워졌지만.

‘어쩔 수 없잖아.’

치미는 죄책감에 비가는 평소 이상으로 힘주어 창문을 닦았다.

창이 틀에서 떨어져 나갈 뻔했다.

워워, 비가의 손을 붙잡아 창에서 떼어 놓으며 다이애나가 물었다.

“비가, 너 요즘 왜 그래? 소공작님이랑 싸웠어?”

“하녀랑 주인이 어떻게 싸워.”

“네가 그냥 하녀야? 소공작님께서 널…… 그러니까, 보통 아끼시는 게 아니잖아.”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너도 좋아하면서.”

“뭐?”

“솔직히 말해서 비가, 너 소공작님이랑 얘기할 때만 웃거든. 뺨까지 빨개져서는.”

반박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얼굴이 붉어진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다.

내가 진짜 그런다고?

그녀가 되물으려던 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크루엘로였다.

“나와, 비가. 얘기 좀 해.”

‘포기한 게 아니었군.’

다이애나는 히죽 웃었고 비가는 폐부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한숨을 내쉬었다.

비가를 불러내고도 크루엘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결국, 쭈뼛거리며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그동안에도 사람들이 많이 그만둬서요. 제가 할 일이 산더민데…….”

“방금 네 친구는.”

“걔도 이번 주까지만 일하고 나간대요. 음, 애당초 사용인들이 그만두는 게 소공작님의 탓은 아니었던가 봐요.”

“그럴 수도 있겠지. 주제넘게 감시원을 잘라 낸다고 숨통을 조이려 든다는 게 더 자연스러울 테니까.”

비가는 눈만 데구루루 굴렸다.

크루엘로가 입을 열었다.

“너, 뭔가 오해하고 있어.”

“뭘요?”

“그날은 너무 얼토당토않은 말을 듣고 당황해서 피했는데 너 안 좋아해.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그래. 그러니까…….”

그는 머뭇거리다가 애써 말을 이었다.

“굳이 피하려고 애쓸 거 없어. 부담스러운 일 없을 테니까.”

비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다시 그 주제가 나오면 어떻게든 회피할 생각이었으나, 막상 크루엘로가 제 마음을 부정하는 걸 보니 그조차 편치 않았다.

매듭을 짓고 넘어가야 하는구나, 비가는 뒤늦게 깨달았다.

다행히 곧이어 나온 그녀의 목소리는 속과 달리 꽤 담담하게 울렸다.

“소공작님, 저는 평생 이 저택에서 살아갈 수는 없어요.”

“오해라고 했잖아.”

“그렇다고 하더라도요.”

“……왜?”

“전 하녀잖아요.”

솔직히 이 저택에 비가만큼 신분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튀어 보이지 않기 위해, 남들만큼 맞추어 살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내세울 수 있는 이유는 이것뿐이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죠. 저는 튀고 싶지 않아요.”

어떤 의미론 그것도 맞는 말이었지만.

크루엘로는 그녀의 말에 반박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잠시 감겼다가 뜨인 그의 눈동자에는 조금 전과는 다른 눈빛이 깃들어 있었다.

“너, 착각하고 있어. 나한테 네 의사는 중요한 게 아니야. 내가 원하면 네 마음 같은 건 상관없이 내가 갖는 거야. 이게, 네가 그렇게 말하던 그깟 신분제라고.”

“하실 수 있겠어요?”

비가의 담담한 말에 울컥했는지, 크루엘로는 그녀의 양 뺨을 잡았다.

신경질적으로 비가를 끌어당겼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듯 가깝다.

그러나 닿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 거리에서도 비가는 동요하지 않았다.

소년의 눈은 크게 흔들렸고 그의 손에선 천천히 힘이 빠졌다.

크루엘로가 툭, 얼굴을 떨구고 말했다.

“……너, 청소 구역 바꿔.”

“네.”

“내 눈에도 띄지 마.”

“그럴게요.”

“다시는, 건방지게 굴지 마.”

“알았어요.”

“……그래도 위험한 짓은 하지 마.”

“…….”

“대답해.”

“죄송해요, 소공작님.”

그걸 끝으로 크루엘로는 뒤돌아 걸어갔다.

그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비가는 미끄러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양손으로 얼굴을 덮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가의 두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으며.

“침묵하라는 계시 좀 그만 내리세요. 말 안 한다니까요.”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퍽 우울했다.

***

그 일 이후, 비가는 교단의 정보를 캐내는 데만 집중할 수 있었다.

이미 다 모은 줄 알았던 정보들이 새로이 쏟아졌다.

에덴을 만난 이후부터였다.

그러니 그녀는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여태 순조롭게 신전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된 것은 누군가의 안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도 안 되게 손쉬웠던 대원로 습격 또한 같은 맥락의 일이었다고.

그리고 그 의도가 결코 호의는 아니라는 것까지.

마침내 비가가 검은 뱀 교단의 초대 교주에 대해 알게 됐을 때, 그녀 앞으로 편지가 왔다.

크루엘로의 열일곱 번째 생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자정, 고양이를 따라서.

모든 걸 알고 싶다면.」

비가는 고민했으나 저는 이미 상대에게 노출되어 있었다.

맞서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그녀에겐 또 다음 기회가 있을 테니까.

자정이 되기 전, 비가는 마지막으로 크루엘로의 방을 찾아갔다.

똑똑, 노크 소리가 명쾌히 울렸으나 들려오는 답은 없었다.

“소공작님, 계세요?”

비가는 몇 번 더 문을 두드리다가 들으란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고백 거절한 지 몇 달은 됐다. 진짜, 뒤끝이 그렇게 길어서 어떻게 이 큰 가문을 이끌어 가겠어요.”

안쪽에 기척은 있는데 여전히 답은 없다.

에휴, 모르겠다.

비가는 문에 기댄 채로 쭈그려 앉았다.

어차피 자기 마음 편하려고 온 거니, 듣든 말든 상관도 없었다.

“소공작님, 어쩌면 조만간 저 잘못될지도 몰라요. 위험한 일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있는 힘껏 했거든요.”

“…….”

“그렇게 되면 그냥 그렇게 생각해요. ‘날 차 버리더니 속 시원하다, 건방진 하녀 주제에!’”

그렇게 말한 비가는 혼자 킬킬거렸다.

얼마 안 가 멋쩍어진 탓에 그만뒀지만.

음.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방문 앞에 두었다.

황금빛 열쇠였다.

비가는 죽을 각오를 마쳤다.

직접 가지고 있다가 적의 손에 고스란히 넘겨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편이 나을 것이다.

“제가 선물 하나 두고 갈 건데요, 이게 뭔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근데 아마도 중요하고 좋은 걸 거예요.”

제가 말하면서도 내용이 궁색하다.

비가는 픽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눈이 높다 못해 하늘 꼭대기에 달려 있어서 소공작님을 차긴 했지만, 그래도 소공작님의 안목은 인정해요.”

“…….”

“그래도 다음부턴 좀 더 괜찮은 사람을 좋아해 봐요. 친한 척 얼쩡거리는 건방진 하녀보다는 나은 사람, 분명 있을 거예요.”

“…….”

“소공작님, 저는 소공작님이…….”

네가 행복해지면 좋겠는데.

그녀는 한동안 문을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안쪽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없었다.

나올 기미조차 없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안 보여 준다니 할 수 없지.

그래도 몇 년을 건너뛰고는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잘 자요.”

아쉬움을 뒤로 하고 비가는 몸을 돌렸다.

***

‘고양이를 따라서.’라는 게 무슨 말인가 했더니, 자정이 되자마자 비가의 눈앞에 고양이가 나타났다.

정확히는 고양이 모양의 그림자였는데, 그 형체가 그녀를 안내했다.

목적지는 저택에 있는지도 몰랐던 지하실이었다.

아래로 내려가자 곧, 그녀는 편지의 주인을 만날 수 있었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노래를 흥얼거리던 이가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안녕.”

어둠에서 붉은 안광이 선명히 빛난다.

“안녕, 에덴. 아니, 길을 이끌어 주신 선배님이라고 해야 하나.”

반전은 없다. 그는 에덴 화이트데저트였다.

비가는 삐딱하게 선 채 인사를 건넸다.

하하하, 에덴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궁금한 건 다 풀렸어?”

“풀렸겠어? 네가 페불라의 성자였고, 검은 뱀 교단의 초대 교주였다는 거 말고 뭘 말해 줬는데.”

“제물 이야기도 줬잖아. 아, 교단에 대한 정보도 꽤 풀었는데.”

“미안하지만, 난 부활에 관심 없어.”

흐음. 그는 아쉬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네. 좀 더 신을 의심하길 바랐는데 말이야.”

“남이 떠먹여 준 정보를 온전히 믿는 바보가 어디 있겠어? 대놓고 이간질인데.”

“애석해라, 그러면 다음엔 좀 더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정보를 줘 볼까?”

다음?

알 수 없는 말에 비가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나 그에게 묻고 싶은 게 한둘은 아니었다.

저렇게 우쭐해 있는 상태라면 몇 가지쯤은 답을 얻어 낼 수 있을지 모른다.

죽음을 각오하고 왔으니 최대한 알아내는 게 다음을 위해 좋았다.

“어떻게 그 긴 세월을 살아온 거지? 사람들이 왜 네 정체를 의심조차 하지 않는 건데.”

“글쎄.”

“주변 사람들을 세뇌했어? 처음부터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식으로.”

“비슷할 수도 있고. 좀 재미있는 질문은 없어?”

“내가 페불라의 신도인 건 어떻게 알았는데.”

“네 전에 다녀간 신도가 있었잖아.”

에덴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에이미 로열샌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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