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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08화 (108/162)
  • 108화

    비가는 침대 앞에 주저앉아 그대로 매트리스에 얼굴을 파묻었다.

    공작저에 돌아오면서 확장한 감각을 닫아 두었기에, 정말로 놀랐다.

    “어흑흑, 기척 좀 내고 돌아다녀요.”

    위쪽에서 헛웃음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침대를 끌어안은 채로 고개만 들어 올렸다.

    “소공작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이 저택에 내가 못 갈 데가 있어?”

    “아, 예. 그렇네요. 신분제 사회에서 안 되는 게 어디 있겠어요.”

    “신분 들먹일 거 없이 여긴 내 집이야.”

    ‘맞는 말이군.’

    “내 질문에 아직 대답하지 않았어.”

    “저 밤 산책 다녀왔어요. 너무 피곤해도 잠이 안 오거든요.”

    “……뭔가 위험한 일을 하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네에? 이 저택에 위험한 일이랄 게 있나요? 귀신이라도 나오나?”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고는 눈을 깜박였다.

    크루엘로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니면, 뭐 증거라도 있어서 하는 말씀이신가요?”

    “……지켜보겠어.”

    쾅, 문이 닫힌 순간 비가는 승리감을 만끽했다.

    ***

    그리고 그날 이후, 크루엘로는 정말로 비가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빨래할 때도.

    “너 혼자 그 옷을 다 빠는 거야?”

    “빨래 담당이 지난주에 관둬서요. 그래도 오전엔 70벌밖에 안 되네요.”

    주방 일을 도울 때도.

    “……뭐 해?”

    “아, 이거 머랭 치는 거예요. 디저트에 들어간대요. 맛있겠죠.”

    “그게 아니라, 너 청소 담당이잖아.”

    “주방보조가 또 도망갔거든요.”

    엇나간 창틀을 맞출 때도.

    “그거야말로 네가 할 일이 아니지 않아?”

    “누가 하면 어때요. 안 그래도─.”

    “또 누가 그만뒀어?”

    “네, 당연, 아, 됐다!”

    크루엘로의 사실을 비롯하여 한 층 전체를 청소할 때도 따라다녔다.

    이쯤 되면 비가는 소년의 저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소공작님, 실은 심심해서 따라다니시는 거죠?”

    “…….”

    “소공작님?”

    “……이 저택에 얼마나 사람이 없는지 생각하고 있었어.”

    “그거야 뭐…….”

    바깥에서 들린 소란에 비가가 말끝을 흐렸다.

    두 사람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짐을 든 청년이 저택을 떠나고 있었는데 그 발걸음이 하늘을 나는 듯이 후련해 보였다.

    비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와, 엘리엇도 그만뒀네요. 내일부턴 빨래가 더 늘겠어요.”

    “대체 왜 그렇게들 그만두는 거야.”

    그 말에, 비가는 크루엘로를 쳐다봤다.

    지레 찔린 소년이 눈가를 찡그렸다.

    “말해 두는데 상대를 에이미로 오인한 후에 화를 낸 적은 드물어. 검을 빼 든 건 정말 지은 죄가 있을 때만 그랬고.”

    “그래요. 그만큼 감시원이 많은데 어쩌겠어요.”

    “비꼬지 마.”

    “진심인데.”

    크루엘로는 잠시 비가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피했다.

    그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나도 내가 비정상인 걸 알아. 고치려고 해도 안 되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음, 저도 지금 그 아가씨로 보여요?”

    “……넌 언제나 그렇지.”

    그렇구나, 비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소공작님께서는 그 증상을 없애고 싶으시다는 말이죠?”

    “상담 받으란 얘긴 됐어. 해 봤지만, 아무짝에도 소용없었으니까.”

    “혹시 제가 소공작님을 도와드린다고 하면, 그건 주제넘은 말일까요?”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빤히 소녀를 바라봤다.

    “……아니.”

    “그러면 제가 조금 무례하게 구는 정도는 이해해 주세요.”

    크루엘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

    짝!

    이것은 비가가 크루엘로의 등짝을 내리친 소리다.

    소년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비가를 돌아보았다.

    “너, 너, 지금 날 때린 거야?”

    “다이애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길래요.”

    “내가 언제─!”

    “방금 다이애나가 에이미 아가씨로 보였죠?”

    크루엘로는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중요한 실험 사례라도 수집하듯 비가는 진중한 얼굴로 재차 물었다.

    “지금은 어때요?”

    “날 도와주겠다는 게 이런 식이었어?”

    “어떠냐니까요.”

    “……그렇게 안 보여.”

    잘됐네요, 비가가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그녀에게 한 소리 해 주려던 크루엘로는 그 미소를 보고 괜히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후로도 비가의 교정 작업은 계속되었다.

    주로 크루엘로가 누군가를 보고 넋을 놓고 있을 때면 달려와 등을 후려치는 방식이었다.

    분명히 소년은 검을 배웠고 타인의 기척을 예민하게 잡아낼 수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비가가 다가오는 건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 일이 잦게 일어나다 보니, 다른 누군가가 에이미로 보일 때 크루엘로의 반응도 달라졌다.

    넋을 놓고 죽은 이를 그리워하는 게 아니라 제 등을 매만지며 주위를 경계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어처구니없게도 환각은 사라졌다.

    차마 효과가 있다고 말하기도 분했지만.

    한편 크루엘로와 가까워지며 그의 경계심을 조금 풀어낸 비가는 다시 야간 잠행을 계획했다.

    그러기 위해 그녀는 평소보다 일찍 일을 마쳤다.

    “오늘도 청소 끝!”

    개운하긴 했지만, 크루엘로가 따라다니지 않으니 어쩐지 허전했다.

    ‘그래도 일은 해야 하니까.’

    그녀는 잠행에 쓰던 개구멍이 무사한지 확인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려다가, 응접실 앞에 다닥다닥 모여 있는 동료들을 발견했다.

    “다들 여기서 뭐 해?”

    “몰라? 오늘 에덴 공자님이 놀러 오셨잖아.”

    “에덴?”

    비가는 곧 그 이름의 주인이 대원로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는 시큰둥하게 생각했다.

    ‘원로나 놀러 올 것이지.’

    “엄청 친절하고 잘생기셨어!”

    “그렇구나.”

    들떠서 뺨을 붉힌 아이들은 제법 귀여웠지만, 응접실 안의 사람이야 알 바 아니다.

    비가는 동료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바깥으로 나왔다.

    다행히, 개구멍은 당일 밤에 쓰기에도 무리가 없어 보였다.

    ‘그 열쇠의 용도를 어떻게 알아낼지가 문제인데.’

    대원로가 그토록 철저히 보관한 걸 보면 모리온과 연관된 물건일까?

    생각에 빠져 저택으로 돌아가던 중, 비가는 밖으로 나오던 사람과 딱 마주쳤다.

    연갈색 장발에 붉은 눈동자. 낯선 외형이었지만 그녀는 곧바로 상대의 정체를 알아봤다.

    에덴 화이트데저트.

    과연, 동료들에게 들은 대로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외모가 감탄스럽냐면 글쎄.

    형용 못 할 찝찝함이 그녀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에덴은 비가의 이름표를 내려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름이 비가?”

    말을 걸 줄은 몰랐다.

    비가는 조금 당황했지만, 태연히 인사했다.

    “네, 맞습니다. 안녕하세요.”

    “아,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제 얘기를요? 누구한, 아, 소공작님께요?”

    “크루엘로가 아니라, 음…….”

    그의 입매가 묘하게 늘어졌다.

    비가에게 그건 별로 친절한 미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에덴이 돌연 말을 돌렸다.

    “있잖아, 네가 크루엘로의 방 쪽을 청소한다지? 실은 내가 그 근방에서 잃어버린 게 있는데, 혹시 발견하면 보관해 줄 수 있겠니?”

    응접실에만 있다 나온 줄 알았는데 거긴 또 언제 올라갔담.

    비가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겉으로는 숙련된 사용인의 자세가 나왔다.

    ‘프로니까.’

    “그럼요. 뭔지만 말씀해 주세요, 공자님.”

    “뭐냐면 말이야.”

    에덴은 남들이 듣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이 반걸음을 좁히고 속삭였다.

    비가는 그의 붉은빛 눈동자가 기괴하게 반짝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에.

    “황금빛 열쇠야.”

    발견하면 꼭 돌려줘.

    굳어 버린 비가의 어깨를 두드리고 에덴은 그녀를 지나쳐 걸었다.

    ***

    “뭐야, 대체.”

    어떻게 저택에 돌아오긴 했지만, 비가의 머릿속은 온통 엉망이었다.

    에덴 화이트데저트의 존재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다.

    〈운명〉에서 에덴은 언급조차 없었는데?

    경계하지 않았던 인물의 대두, 제 행적이 드러났다는 것과 어쩌면 누군가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모든 게 충격적이었다.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은 명백해졌다.

    ‘에덴 화이트데저트를 조사해야 해.’

    그게 가능할지 여부는 제쳐 놓고서라도.

    한숨을 내쉬는 비가의 눈에 크루엘로가 들어왔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저 눈빛은…….’

    비가는 성력을 써 기척을 죽이고 살금살금 걸어갔다.

    소년의 등 뒤에 서서 힘차게 손을 들어 올렸고 그 순간 빙글, 크루엘로의 몸이 돌아갔다.

    탁, 그는 한 치의 지체도 없이 비가의 손목을 붙잡았다.

    두 사람은 마치 춤을 추다 멈춘 듯한 자세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얼굴 사이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

    어……. 당황한 비가가 눈을 깜박이다가 물었다.

    “제가 누구게요?”

    “에이미.”

    “저런.”

    “……라고 할 줄 알았어? 이젠 너를 봐도 에이미로 안 보이니까 그만해.”

    “혹시나 해서, 헤헤. 그게 다 제 덕분인 거 아시죠?”

    “이게 왜 효과가 있는지조차 의문이지만, 그래.”

    마지못한 인정을 듣고 비가는 뿌듯하게 웃었다.

    ‘역시 매가 약이야.’

    실은 매에 섞은 성력이 약이었다.

    이런 쪽 문제에도 효과가 있을지 몰랐는데 살살 섞어 넣길 잘했다.

    “그러니 이제 내 등을 두드려 대는 건 그만해.”

    “왜요?”

    “왜? 넌 내가 네 동료 하인으로 보여?”

    “아, 또 신분제……. 알겠어요.”

    칫.

    비가는 일부러 풀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크루엘로의 눈썹이 까딱 움직였으나 그녀가 꾸며 낸 태도란 걸 알면서도 소년의 표정은 조금 부드러워졌다.

    틈을 놓치지 않고 비가가 물었다.

    “오늘 왔다 가신 손님 있잖아요.”

    “에덴? 에덴이 왜.”

    “그냥 어떤 분인가 궁금해서요.”

    소년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표정에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유부남이야.”

    “네에에? 저는 곧 열일곱인데요! 저보다 열 살도 많은 사람한테 관심 없는데요!”

    “그게 아니면 왜 에덴한테 관심을 두지? 너…… 혹시, 전에 들쑤시고 다니던 게 원로회 쪽은 아니겠지.”

    크루엘로의 눈빛은 아예 싸늘해졌다.

    비가가 어색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네에에? 원로회요?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

    “그러고 보니 소공작님을 감시하라고 시킨 게 원로님들이란 소문은 들어 봤─.”

    “선 넘지 마.”

    그 얼음장 같은 목소리에 비가는 크게 움찔했다.

    충격, 당황, 서운함, 어쩔 수 없다는 체념.

    ‘그래, 여긴 신분 사회였지.’

    순식간에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가고 그녀는 곧 고개를 수그렸다.

    “네, 죄송합니다.”

    그러면 가 보겠습니다, 그녀는 꾸벅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감정의 스위치가 꺼진 사람처럼 아주 칼 같은 태도다.

    이번에는 크루엘로가 당황하여 비가를 붙들었다.

    “잠깐만.”

    “팔 함부로 잡는 거 아닌데. 특히 이성 간에는요. 여기도 선이 있다는 거 아실라나 몰라.”

    비가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그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크루엘로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녀를 달래듯 애써 목소리를 부드럽게 냈다.

    “그 소문을 듣고 호기심에 파 보는 거면 관두란 말이야. 네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사람들이니까.”

    “일개 하녀가 파 본다고 뭔들 나오겠어요. 그럴 재주 있으면 진작 일 때려치우고 나가서 수사관이라도 자원했겠다.”

    “…….”

    “저는 선 안 넘고 주제를 잘 아는 하녀니까요, 감히 소공작님의 시간을 그만 뺏고 들어가서 자려고요. 그럼 놓아주시겠어요?”

    “……에덴은 진짜 아니야.”

    비가가 크루엘로에게 휙 고개를 들고 물었다.

    “믿어요?”

    “믿어.”

    “저보다요?”

    그 말이 왜 나왔는지는 말한 본인조차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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