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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07화 (107/162)

107화

비가의 머릿속엔 온통 대화를 엿들을 생각뿐이었다.

대원로가 크루엘로와 중요한 이야기를 나눠줄 것 같지는 않았으나, 적을 파악하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그렇게 크루엘로의 방 청소를 끝내고 나가려던 때 벌컥, 문이 열렸다.

이번에도 방 주인이었다.

“안녕하세요, 소공작님.”

비가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인사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팍 수그리고 지나가려 했으나 소년은 문가에 서서 비켜 주지 않았다.

“너. 이름이 비가라고?”

여태 이름도 몰랐나.

입술이 비죽 나오려는 걸 참고 비가는 순순히 답했다.

“네, 소공작님.”

대답만 했을 뿐인데도 그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한참 동안 그녀를 내려다봤다.

견디지 못하고 비가의 입술이 1mm씩 튀어나왔다.

마침내 누가 봐도 주둥이라 칭할 만큼 그 모양새가 두드러졌을 무렵.

“뭘…… 좋아하지?”

“엥, 작업이에요?”

“헛, 헛소리하지 말고!”

비가가 반사적으로 내뱉은 말에 크루엘로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로이가 생각난 탓이었다.

“그걸 왜 물어보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이미 묻고 있지 않나. ……저번의 일은 사과하지.”

비가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랗게 커졌다.

크루엘로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어 갔다.

“동료끼리 한 농담이라는 걸 알면서 내가 과했어. 에이미를 흉내 낸다는 말 자체가 내게 유쾌하게 들리진 않지만, 내가 벌인 일도 너희들에겐 비슷하겠지.”

“어…….”

“그래, 에이미가 살아 있었다면, 정신 차리라고 말했을 것도 같아.”

“음, 그럴걸요, 정말로.”

“하지만 그때 네 동료에게 검을 휘두를 생각은 없었어. 어차피 미친놈이라고 생각할 테니 믿지도 않겠지만.”

“그 말 믿어요.”

“믿는다고?”

“쿠션을 던질 때 솔직히 죽을 각오를 했거든요. 그런데 겨우 해고하신 게 전부라 얼마나 놀랐는데요.”

비가는 멋쩍게 웃었다.

“소문이란 게 다 그렇죠.”

“그 소문이 다 헛소문이라는 이야기는 아니지. 네가 더 조심해야 할 것도 맞고.”

“무슨 말씀이세요?”

천진난만한 물음에 소년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진 알아?”

“제가 너무 맞는 말만 하셔서 놀라셨나요.”

“네 눈빛, 말투, 그 내용까지 전부, 너무나 에이미를 닮았다고. 그 애가 남의 거죽을 입고 살아 돌아온 것 같다고.”

정곡을 찔린 비가는 그 자리에서 멈춰 숨을 들이켰다.

그것이 크루엘로에게는 겁에 질린 것처럼 보였나 보다.

그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저택에 남은 금발이 너뿐이라지. 그래서 더 단단히 미친 모양이야.”

“…….”

“앞으론 건방지게 굴지 마. 별거 아닌 일에 목숨 걸지도 말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소년은 방을 나갔다.

***

‘그래도 로이는 로이구나.’

비가는 슬프고 미안한 한편으로 기쁨을 느꼈다.

잠깐 동안 그를 교화할 가능성을 다시 떠올리기도 했으나 금세 고개를 저었다.

오래 살 수 없는 건 비가 역시 마찬가지, 크루엘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방법을 찾고 싶었다.

그녀는 예정대로 크루엘로와 대원로와의 대화를 엿들었고, 노인이 돌아가는 길에는 그와 눈이 마주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눈에 뭔가가…….’

비가는 대원로의 눈에서 검은 마나가 응축된 걸 발견하고야 만다.

그녀는 저택에서 흑마법사들의 기운을 종종 느꼈지만, 대원로의 눈에서 느낀 건 아예 다른 종류였다.

그게 뭘지 한참을 고민했으나 머리를 굴리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어.’

그녀는 일단 시간을 벌기로 했다.

“저 아파서 죽을 것 같아요!”

이불 더미에 베개를 쑤셔 넣고 창문을 통해 저택을 빠져나갔다.

낡아서 버린 메이드복을 주워다가 천 쪼가리를 잘라 얼굴에 뒤집어쓰고 비가는 잠행에 나섰다.

목적지는 대원로의 저택, 아는 사람이 많아서 찾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페불라의 성력 자체가 몹시 은밀하여 잠입하는 것도 쉬웠다.

마침 저택의 주인도 자리를 비운 때였다.

대원로의 저택엔 수준 높은 흑마법사가 많았으나 이번 몸의 운동 신경과 성력의 합작으로, 비가는 무리 없이 그 집을 탈탈 털었다.

개중에서도 가장 단 결실은 노인의 집무실에 있었다.

벽면의 한 귀퉁이가 마나로 잠겨 있었다.

특정한 방식으로 벽이 열리는 구조 같았으나 비가에겐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이럴 때를 위해 성력을 아껴 온 거지.’

─9주문. 수정modification.

암호 마법을 열기엔 과한 주문이었으나 위험을 감수해야 할 때가 있다.

비가의 직감은 그것이 지금이라 말하고 있었다.

벽면이 돌아가더니 숨은 공간을 드러낸다.

아니나 다를까.

‘이거 설마…….’

내부에 연결된 공간은 신전.

그녀의 도박은 대성공이었다.

***

“엣취!”

“괜찮아? 쉬었다더니 몸이 더 안 좋아 보이는데.”

“좀 으슬으슬하긴 한데 훌쩍, 괜찮아.”

비가는 동료의 걱정에 씩씩하게 답하고는 일터로 향했다.

머리가 아프고 몸이 으슬으슬했지만, 전날 퍼부어 댄 성력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선방이었다.

평소처럼 일도 할 수 있었다. 아픈 티는 좀 났지만.

방에서 책을 읽던 크루엘로가 눈가를 찡그렸다.

“쉬지 그래? 감기 옮을 것 같은데.”

“걱정, 킁, 안 해 주셔도 돼요.”

“지금 누가 걱정을 했지?”

“아, 안 옮아, 안 옮아.”

성력 과다 사용 부작용인데 무슨 걱정이람.

“말이 짧네.”

“아니에요, 길게 하면 목이 아파서, 훌쩍, 요!”

“……그래, 네 맘대로 해.”

그럼에도 자꾸 기침 소리가 나는 게 신경 쓰였는지 크루엘로는 비가 쪽을 계속 바라보았다.

눈치가 보여 비가는 평소보다 일을 빨리 끝냈다.

그녀가 꾸벅 인사하고 방을 나가려던 때, 소년이 머뭇거리다 그녀를 붙잡았다.

“감기에 좋은 차가 있으니 주방에 타 달라고 해. 내가 시켰다고 말하고.”

“…….”

“왜 그렇게 봐?”

“감동해서요. 감사해요, 소공작님.”

비가는 씨익 웃고 방을 나섰다.

***

신전의 위치는 알아냈으나 다른 문제가 있었다.

숨을 곳이 많지 않았고 모든 교인이 같은 옷을 입어, 제대로 잠입할 수가 없었다.

‘옷을 구할 수 있을까?’

비가는 저택에서 정체를 감추고 돌아다니는 흑마법사 몇을 떠올렸다.

그러나 어쭙잖은 협박으로는 일을 그르칠 가능성이 커 보였다.

‘별로 신실해 보이지는 않으니 회유한다든가.’

고민 끝에, 그녀는 사비를 쓰기로 결정했다.

한숨을 백 번쯤 내쉬고 나서 결정한 일이었다.

모처럼 쉬는 날, 그녀는 마차를 빌려 콜티쉬 뱅크로 향했다.

페불라 교단의 계좌를 털어먹기 위해서였다.

혹시 선배 신도들이 제게 거짓말을 한 게 아닐까 걱정했으나 다행히 직원은 그녀에게 막대한 돈을 내어주었다.

양손이 무거워진 만큼 비가의 기분도 좋아졌다. 전부 써야 할 돈이었지만.

그녀는 뱅크를 나가려다가 다시 직원에게로 돌아왔다.

원래 계좌의 이름은 ‘페불라의 은총’, 철저하게 보안이 유지되는 뱅크라지만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이름이다.

“계좌명을 바꾸고 싶은데요. 그렇게 하면 이전의 기록들은 아예 말소되는 게 맞죠?”

“예, 맞습니다. 바꾸고자 하시는 이름을 말씀해 주세요.”

“음……. ‘과로사’로 할게요.”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록을 보니 공동 계좌네요. 후에 원래의 계좌명을 찾는 분들께 전할 메시지를 남겨주십시오.”

“그럴 일은 없을걸요?”

“내부 방침이니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뭐, 그러면…… 마지막 이용일이 너무 오래돼서 계좌가 말소된 것 같다고 전해 주세요.”

비가는 성의 없이 답했다.

그 대답이 훗날 제 속을 뒤집어 놓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

***

비가는 당근과 채찍으로 흑마법사를 섭외해 옷을 구했다.

신전의 위치는 죽어도 알려 줄 수 없다며 더 많은 돈을 바라는 기색이었지만, 그건 이미 알고 있었고.

이어 비가의 본격적인 교단 털이가 시작되었다.

번번이 아픈 척을 할 수는 없어서 낮에는 하녀 일을 하고 밤에는 신전에 잠입했다.

고강도 노동을 겸업으로 하려니 끔찍했지만, 나오는 정보들이 달아 참을 만했다.

그러나 아무리 뒤적거려도 모리온에 닿을 수는 없었다.

결국 비가는 원로 사냥을 결의한다.

‘대원로의 눈에 든 거, 아무래도 확인해야겠어.’

다른 사람도 아닌 대원로니 아는 것도 많겠지.

그녀는 거의 대원로만이 쓰는 기도실에 함정을 깔고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뒤.

“……할아버지, 대원로 맞아요?”

잔뜩 긴장하며 이런저런 주문을 준비하긴 했는데, 너무 어처구니없이 쉬웠다.

주문 한 번에 의식을 잃고 픽하니 쓰러져 버렸다.

이게 맞나?

혹시 함정이 아닌가?

의심하면서 비가는 발로 슬쩍 엎어져 있는 대원로를 밀어 보았다.

그러나 얼굴은 그녀가 알던 그대로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그녀는 대원로의 눈꺼풀을 열고 내내 찜찜하던 그 마나 덩어리의 정체를 확인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서도 좀체 알 수가 없어 성력을 동원한 순간.

“어?”

노인의 하늘빛 눈동자에서 무언가 길쭉한 것이 끌려 나왔다.

그 기괴한 형태에 온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비가는 황금빛 물체를 손에 쥐었다.

“열쇠…… 같은데? 이걸 왜 눈에 넣어 놓은 거람.”

열쇠를 꺼내 놓고도 그게 뭔지, 어디에 쓰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는 일단 흑마법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그것을 잘 보관하기로 했다.

이어 비가는 대원로를 깨워 심문할 생각이었으나 기도실로 다가오는 많은 수의 기척을 느끼고 일단 자리를 피했다.

노인이 알고 있을 정보가 한둘이 아니기에 섣불리 그를 죽이진 않았다.

‘내 얼굴도 못 봤으니 괜찮겠지.’

비가는 서둘러 공작저로 돌아왔다.

그리고 베개를 밀어 넣었던 침대에 들어가려던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그 너머에 선 건 크루엘로.

비가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굳어 버렸다.

소년이 물었다.

“너, 밤에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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