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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04화 (104/162)
  • 104화

    신전은 원형의 공간 두 개가 긴 통로로 연결되어 있다.

    위에서 보면 모래시계를 연상시키는 구조인데, 통로의 양옆으로 일곱 개의 기도실이 날개처럼 펼쳐진다.

    왼쪽으로 네 개, 오른쪽으로 세 개.

    대칭이 맞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면 오른쪽의 빈 곳에 뭐가 있느냐 하면.

    「페불라의 8계명.

    하나, 모든 일은 정해져 있나니, 흐르는 대로의 자연스러운 삶을 받아들이라.

    …….」

    아치형으로 다듬은 페불라의 8계명비가 있다.

    그 주변의 벽을 두드리면 텅 빈 소리가 난다.

    저 너머엔 뭐가 있을까.

    늘 궁금했으나 차마 비석을 훼손시킬 수는 없었다.

    한창 교리를 배우던 어린 날에도, 출구를 찾아 신전을 헤매고 다닐 때도, 상상으로나마 단 한순간도.

    스스로를 불량한 신자라 칭하면서도, 페불라를 원망하면서도, 그 뜻을 의심하면서도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녀의 신도였으니까.

    내 신앙은 나와 함께 자라 왔으니까.

    “후우.”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어린 날 그랬던 것처럼 비석의 윗부분을 두드렸다.

    텅 빈 소리가 돌아온다.

    이 신전에 출구란 게 있다면 가능성이 있는 건 이곳뿐.

    나는 양손을 펼치고 주문을 외웠다.내 믿음은 여전히 흔들렸고 속도는 느렸으나 그럼에도 남의 몸과 본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내 몸은 폭포수 같은 성력을 수월하게 흘려보내고 정교하게 다듬으며, 성력이 비워진 자리에는 더 성결한 힘이 차올랐다.

    새하얀 빛.

    흡사 태양 같은 구체는 대장장이의 손길이 닿은 것처럼 펴지고 길어지더니 커다란 망치의 형상으로 자리 잡았고, 푸른 전기가 그 위를 휘감는다.

    ─7주문. 심판judgement.

    나는 망치를 움켜쥔 채 8계명비를 노려봤다.

    “……지금 웃고 계시죠? 나도 웃기는 거 알아요.”

    구태여 신성 주문을 쓸 필요는 없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교단의 무기가 널려 있는데 이런 돌 부스러기를 부수기 위해 뭐 하러 주문까지 쓴단 말인가.

    그럼에도 이런 번거로운 수단을 쓴 건 안심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계명비를 부수려는 지금조차 여전히 페불라의 허락을 구하는 어린아이였다.

    손끝에서 피어오르는 성력에 어쩔 수 없이 안도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살아왔는걸.

    “바깥 상황만 확인하고 돌아올게요. 그 정도는 용인해 주실 수 있잖아요. 여태 고생한 게 있는데 그 정도는 괜찮잖아요.”

    돌아오기만 하면, 잠깐쯤은 상관없잖아.

    페불라께서 믿으실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도 내 신을 죽일 만한 배짱은 없다.

    엘린 때를 들먹인다면 음……. 화가 나면 무슨 말인들 못 하겠냐고 답하고 싶다.

    그땐 진심이었어, 그땐.

    잡념이 이어지니 용기가 흩어지는 것 같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망치를 들어 올렸다.

    성력으로 만들어진 도구에 무게는 없었지만, 양손이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아니꼬워도 용서하소서, 페불라시여.”

    그리고 콰아앙!

    심판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호쾌하게 비석을 부숴 놓았다.

    새하얀 돌은 단번에 산산조각이 났고, 먼지가 뿌옇게 일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얼굴에 핏기가 가신 것이 느껴진다.

    주문을 해제하며 나는 체념했다.

    “……난 지옥 갈 거야.”

    뭐, 외롭진 않겠지.

    거기 내가 아는 사람이 한둘이던가.

    깊이 한숨을 내쉬고, 나는 고개를 들어 드러난 공간을 살폈다.

    부서진 돌조각 뒤에 출구가 있기를 바라면서.

    마침 먼지가 가시며 시야가 깨끗해졌다.

    그러며 보인 건.

    “이게…… 뭐야?”

    딱 기도실만 한 크기의 너른 공간.

    그리고 그 방을 채우고 있는 수십 개의 관과 묘비였다.

    아무리 봐도 출구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예상치 못한 기괴한 광경에 압도당하면서도 나는 홀린 듯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묘비에 적힌 이름들이 시야에 스쳐 지나간다.

    지금도 흔하게 쓰이는 것도 있고 수백 년 전에나 쓰이던 것도 있다.

    처음에는 그게 선배 신도들의 이름이 아닌가 의심했으나, 내가 아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건 그렇고.

    “정말로 관인가?”

    뚜껑을 열면 혹 무언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무심코 관 하나를 열었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내 눈에 보인 건 잠든 사람처럼 온전한 시신이었다.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깨어날 것 같다.

    나는 주춤 물러나다가 기이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달았다.

    “설마…….”

    나는 미친 사람처럼 주변의 관 뚜껑을 모두 열어젖혔다.

    쿵, 쿵, 쿵, 뚜껑이 밀려 떨어지는 소리가 연달아 울린다.

    이내 나는 내가 느꼈던 기묘한 기분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았다.

    관에 든 시신들은 모두 달랐다.

    나이, 신장, 체형, 이목구비 등 대부분의 요소가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같은 점도 있었다.

    “금발의 여자.”

    등줄기에 오싹한 소름이 일었다.

    나는 다시금 묘비의 이름을 확인했다.

    관은 시신의 이름순으로 정렬되어 있었다.

    알아차린 즉시 다리가 움직인다.

    V를 지나 M을 지나 H를 지나, 마침내 첫머리에 이르렀다.

    나란히 세 개의 관이 놓여 있다.

    적혀 있는 이름들은 그랬다.

    “에이미, 비가, 시오라…….”

    절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걸까.

    지독한 악몽 속에 갇힌 것 같다.

    기분은 이미 끔찍했으나 나는 거기서도 멈추지 않았다.

    기어이 시오라의 관에 손을 올리고 그 뚜껑을 밀었다.

    손이 너무 떨리다 보니 마치 손끝이 관을 두드리는 듯했고 그 소리가 내 심장 박동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시오라’의 시신이 어디로 갔을까, 나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차마 더 견디지 못하고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의심하면서도 차마 믿지 않았던, 개인의 일탈일 거라 치부했던 기억들이 튀어나와 제 존재를 드러낸다.

    [악신은 사람들을 홀려 자신을 숭배하게 하고는, 믿음이 생긴 이들을 제물로 삼았습니다.]

    “아.”

    「우리 교단에서 신도들을 제물로 바쳤다고?」

    “제발, 아.”

    “당시의 성자가 인간 제물을 받았지. 강제는 아니었다. 자원한 이들 중에서 까다로운 심사 과정을 거쳐 제물을 선별했지.”

    “뭐라고 말 좀.”

    “선별된 제물은 신에게 있는 수십 가지 이름 중 하나를 부여받아 그 이름으로 제물이 되었어. 그건 신이 쓸 화신체의 몸이었다. 그러니 참 영광스러운 자리였어.”

    “……아무 말이나 해 봐요, 제발.”

    “애당초 고대 신에게 선악의 개념은 중요치 않았다는 증거란다.”

    “페불라시여.”

    몸을 웅크리고 양쪽 머리를 감싸 안았다.

    페불라시여, 페불라시여.

    내 신의 이름을 수없이 불렀으나 이번에도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내가 쓴 몸이 모두 금발의 여성체였고, 이름의 이니셜이 순서대로 이어졌으니까.

    그러나 내가 알게 된 정보와 그 사실을 연결 짓지는 못했다.

    그러지 못한 건지, 그러지 않은 건지.

    사실은 명백했다.

    나는, 제물의 몸을 쓰며 남들의 운명에 끼어들고 있었다.

    엘린의 말이 전부 맞았다.

    그러면 검은 뱀을 만든 것도 정말로 페불라의 성자였을까.

    만약 그게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페불라의 뜻이라면?

    애당초 모든 게 운명으로 정해져 있던 거라면?

    그러면 내가 바깥으로 나가려 안간힘을 쓰는 것조차 기만이 아닌가.

    세상에 대한 기만.

    그리고.

    “모리온을 없애려는 건 맞아요. 사적인 원한 때문에 복수하고 싶은 것뿐이지만.”

    “갈가리 찢어 주는 것만으론 성에 차지 않아서요.”

    “크루엘로에, 대한…….”

    [너도 땅 좀 팔 줄 아는구나.]

    입 밖에 내뱉은 말이 제삼자에게 잘려 나갔다.

    여기엔 나 외에 아무도 없는데?

    [그래, 나도 잘 알지. 내가 잘 알지. 우울해지면 나만 손해라 얼마나 누르면서 살아왔는데 그걸 모르겠어.]

    심지어 소리는 관 쪽에서 들렸다!

    나는 기겁하며 주저앉은 자세로 재빨리 물러났다.

    “유, 유령!”

    거봐, 베티! 유령 있다니까!

    아니나 다를까, 관 뚜껑 하나가 밀려서 떨어졌다, 쿵.

    새하얀 손이 관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반사적으로 묘비의 이름을 확인하자, 비가란 글자가 선명히 읽혔다.

    동시에 비가가 얼굴을 드러냈다.

    이런, 미친!

    내가 자기 몸을 썼다고 복수하러 왔나 봐!

    “저, 저는 어쩔 수 없었거든요! 제가 쓰려고 해서 쓴 것도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사기 계약을 당한 쪽에 가까운─!”

    [피해자인 척하려면 손에 그거나 치워 봐.]

    손?

    무심코 시선을 내리자 내 손에 들린 심판의 망치가 보였다.

    와, 이거 7주문인데 내 주문 속도가 언제 이렇게 회복됐대?

    사람이 위기에 빠지면 종교를 찾게 된다는 게 맞는 말 같다.

    나는 주문을 해제하지는 않고 망치를 삭, 등 뒤로 감추었다.

    비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봤지만, 뭐!

    아무리 신에게 배신당했어도 내 몸은 지켜야지!

    [오래 버틸 여유가 없을 것 같으니 그냥 말할게. 페불라께서 제물을 바치라고 지시한 게 아니야. 그 성자가 단단히 돌아 버린 놈이었던 거지.]

    “그, 야 그쪽 입장에선 그렇게 말하겠죠! 엘린도 자원해서 받았다고 말했으니까.”

    [무슨 소리람. 나는 비가가 아니야.]

    그러면 뭔데?

    의아해 눈을 깜박이자 비가가 내게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한 걸음, 두 걸음 물러서려다가 뒤쪽에 있던 묘비에 가로막혀 도망칠 수 없게 되었다.

    겨우 반걸음 앞에 멈추어서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비가의 갈색 눈동자에 묘한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나는 너야.]

    “……휴.”

    [꿈 아니니까 실은 개꿈이었구나, 안심하지 말고. 나는 네 영혼 조각이거든.]

    꿈이 아니면 그게 뭔 개소리람.

    눈가를 팍 찡그리자 비가가 높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와, 근데 이거 되게 재밌다. 내가 살면서 나 자신도 놀려 보네. 생각보다 놀리는 맛이 있잖아?]

    “저랑 성격이 비슷하시단 건 알겠는데요.”

    [기억 안 나? 네가 날 크루엘로의 옆에 두고 왔어.]

    영혼 조각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과자 부스러기처럼 흘리고 올 수 있는 거야?

    [나도 진작 돌아가고 싶었는데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게 아니더라고. 그래도 다행이지, 그 애가 부활 의식을 시도하는 바람에 기억을 돌려줄 수 있게 되었으니.]

    “잠깐, 부활 의식은 또 뭔데. 좀 진지하게 하나하나 말해 봐요, 못 알아들을 복선만 뿌리지 말고.”

    [음. 너는 비가가 왜 죽었다고 생각해?]

    “과로사.”

    나는 주저 없이 답했다.

    그리고 그녀 또한 주저 없이 정정했다.

    [나는 살해당했어. 네가 의심하는, 그 성자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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