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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02화 (102/162)

102화

그러나 일이 왜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얼음 더미에 갇혀 꿈틀거리며 대원로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조금은 걱정했습니다. 2원로님의 마력이 터무니없이 강해서 대원로님께서 그 반만 되어도 곤란할 뻔했거든요.”

바닥에는 부러진 노인의 케인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크루엘로는 그에게 등을 돌린 채 발로 케인을 툭툭 건드렸다.

고양이가 장난감을 건드리는 모양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노인과 달리 상한 곳 하나 없이 온전하고 여유롭다.

대원로가 침음을 내뱉었다.

“대원로님의 수준이 제가 혼자 상대할 정도여서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여태, 힘을 숨겨 온, 것이오?”

“글쎄, 제대로 드러낼 때나 있었나요.”

사내는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은 채로,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큐딜은 형편없었고 아레스는 제 손이 닿지도 않았죠. 2원로 때는 고생만 했고 숙부님은 제 약혼자가 다 해 주었으니까요.”

“…….”

“그냥 아무런 근거도 없이 대원로님께서 저를 얕보셨을 뿐입니다. 그게 다예요.”

“……충고하리다, 나를 죽이지 않는 게 좋을 게요. 어떤 우두머리도 수하 없이 홀로 설 수는 없는 법이오.”

“하하, 그게 대원로님 식의 살려 달라는 말인가요?”

“가주!”

“죄송하지만 곤란하네요. 대원로님께서 살아서 허튼소리를 하면 골치 아프거든요.”

“감히, 감히…….”

“참 대원로님, 악마 같은 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아요. 모리온은 그대로 사라질 거예요.”

허, 허허.

대원로는 피 섞인 침을 내뱉고는 크게 웃었다.

“으하하하, 내게도 거짓을 말씀하시는구려! 정녕 가주께서 그러길 바라시더라도 불가능한 일이란 걸 어찌 모르시오.”

“뭐, 애당초 제 말을 들으실 거라곤 기대도 않았지만요.”

“모리온의 절반은 선조들의 열망이오. 가주께서 결국 이날 이 자리에 나타난 것만 봐도 모르시겠소? 도무지 통제할 수 없는 그 힘에…… 이끌려…….”

크루엘로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노인이 말끝을 흐렸다.

그의 두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떠졌다.

대원로의 앞으로 나비가 날아들고 있었다.

나이젤리아에게 들었던, 새하얀 나비가.

“계시가 어떤 식으로 내려오냐고? 몇 번을 말씀드리는지 모르겠군.”

“새하얀 나비의 몸을 입은 악마의 사자가 날아온다오.”

“그러곤 그분의 말씀을 속삭이지. 온 뇌리에 새겨질 만큼이나 강렬하게.”

노인이 만든 신전에 창문은 없었다.

그러니 바깥에서 날아들었을 리는 없다.

기존의 기도실과 흡사한 처리를 해 두었기에 섬세한 마법은 이곳에서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2원로가 말한 계시는 거짓이 아니었단 말인가.

저건, 진정…….

동요하는 노인의 이마로 나비가 스며들었다.

[곧, 이 땅에 내 뜻이 펼쳐지리라.]

[세상은 어둠으로 물들고 많은 이들이 절망에 뒤덮이리라.]

아. 아아. 드디어!

이것이 거짓일 리 없다.

노인의 두 눈에 진한 환희가 배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그러나 그곳에 그대의 자리는 준비되지 않았다.]

어, 째서?

이해할 수 없는 계시에 대원로가 입을 벌렸다.

그러나 한마디도 내뱉을 수 없었다.

노인의 그림자가 튀어 올라 그의 입을 틀어막고 그 안으로 기어들었다.

읍, 우웁! 노인이 괴로워하며 몸을 비틀었으나 저항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목구멍을 지난 그림자는 아래로 내려가 격하게 박동하는 심장에 머물렀고.

[그러게, 열쇠를 잘 지켰어야지.]

장난 같은 계시를 마지막으로 노인의 손이 툭 떨어져 내렸다.

목적을 다 이룬 대원로의 그림자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대원로님?”

이어지는 정적에 이상을 깨닫고 크루엘로는 대원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축 늘어진 노인을 보고 허, 그가 실소했다.

“담담한 척하더니 죽음 앞에선 별수 없군.”

노인의 얼굴엔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이 드리워 있었다.

그조차, 나이젤리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크루엘로는 가지고 놀던 케인을 짓밟아 부러뜨렸다.

자, 장례를 치를 시간이다.

***

이름 아침부터 나는 부고장을 받았다.

비몽사몽으로 확인한 문서에 적힌 이름은 헤오림 화이트데저트.

대원로였다.

장례식에 와 달라는 크루엘로의 요청─깔끔하게 그 말뿐이었다─대로 어영부영 마차에 오르면서도 영 정신이 없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대원로가 왜 죽었는데!

이런 상황에 자연사했을 리는 없고 그만한 마법사가 어지간한 일로 사고를 당했을 리도 없다.

그렇다면 누가 그를 죽였을까.

상식적으로는 크루엘로겠지만, 나는 계속 나이젤리아의 일이 마음에 걸렸다.

페불라. 악신. 성자. 계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괴로워하다가 나는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몰라, 물어보면 알겠지.”

때마침, 마차가 대원로의 저택에 도착했다.

바깥으로 보인 건 보네티 백작의 장례에서도 본 검은 물결이었다.

온통 새까맣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물밀 듯이 안으로 쏟아졌다.

나도 자연스럽게 그 흐름에 섞여 들었다.

곳곳에서 속삭이는 말들이 들려온다.

“어쩌다 돌아가신 거래요?”

“모르겠습니다. 화이트데저트 측에서 사인을 밝히지 않겠다고 했다더군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러게, 진짜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조문용 꽃을 쥔 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손님들을 맞고 있던 크루엘로가 나를 보고 다가왔다.

“급하게 불렀는데 와 줘서 고마워요.”

“장례식이라는 게 절반은 급하죠, 뭐. 장례는 왜 크루엘로가 주관하고 있어요?”

“에덴이 실신했거든요.”

“아하.”

나는 주위를 한 번 살펴보고는 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그래서 뭐예요, 대원로는 누가 죽인 건데요.”

“내가요.”

크루엘로가?

걱정하던 답이 아니라 다행이었으나 크게 달갑지도 않았다.

나는 눈가를 찡그렸다.

“대원로가 저택에 오면 부른다고 했잖아요.”

“더 적당한 때가 없을 것 같았어요. 혼자서도 무리 없이 제압할 만은 했고. 실수로 죽긴 했는데 하는 수 없죠.”

“……무리 없이 제압했다는 게 크루엘로가 죽기 직전까지 갔지만 그래도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그런 뜻은 아니겠죠?”

“안 다쳤어요, 거의.”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크루엘로를 바라보다가 기습적으로 그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깨끗했다.

그러면 반대쪽!

음, 통과.

내가 하는 짓을 웃으며 지켜보던 크루엘로는 내가 그를 놓아주고야 용건을 꺼냈다.

“헌화하면서 시신을 확인해 주면 좋겠어요. 대원로의 거처에서는 열쇠를 못 찾았거든요, 몸에 도로 넣어 놨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그 짧은 시간 동안? 사람도 이렇게 많은데?”

“여차하면 장례식이 끝난 뒤에도 시간을 낼게요. 어차피 화이트데저트는 내 관할인데, 도굴인들 못 하겠어요.”

“내 능력과 윤리를 시험하지 말아요.”

아무리 내가 요즘 내 신과 데면데면하다곤 해도 성직자한테 그런 말을 한담.

크루엘로는 장난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고는, 농담이었다고 변명했다.

이어 그는 내게 부탁한다고 말하고 몸을 돌렸다.

다른 손님들을 맞으러 가나 했더니 발걸음이 향한 방향이 아예 바깥이다.

“어디 가요?”

“장례 절차란 게 생각보다 복잡해서요. 만나야 할 사람도 많고 작성할 문건도 많고. 나 좀 도와줄래요?”

“잘 다녀와요.”

나는 놓을 때를 아는 사람이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크루엘로가 웃었다.

“그러면 부탁할게요, 달링.”

***

장례 절차를 집사장에게 떠넘긴 크루엘로는 곧장 게이트를 열었다.

그가 다음 순간, 모습을 드러낸 곳은 대원로가 죽은 그 자리였다.

거대한 여성체 신상이 놓인 공동.

노인은 모리온을 해방시키기 위해 정성스럽게 마법진을 깔고 마정석을 설치했었다.

모리온의 힘을 안정시키기 위해.

그리고 그 힘의 흔적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 신관을 불러들이지 않기 위해.

“……고맙게도 말이지.”

가만히 중얼거린 크루엘로는 지체하지 않고 열쇠들을 꺼냈다.

그러고는 하나씩 허공에 던져 띄우기 시작했다.

첫 번째, 큐딜의 보랏빛 열쇠.

두 번째, 아레스의 녹빛 열쇠.

세 번째, 나이젤리아의 붉은빛 열쇠.

네 번째, 테타니오의 진청빛 열쇠.

그리고.

“마지막.”

시오라가 찾고 있을 다섯 번째, 헤오림의 황금빛 열쇠.

묘한 미련에 그것을 만지작거리다가 크루엘로는 허공에 손을 휘둘렀다.

온전히 모인 다섯 개의 열쇠들은 주변에 준비된 마정석에서 마나를 끌어들이며 맹렬히 회전했다.

곧이어 열쇠들은 서서히 자리를 잡아 갔다.

그들을 축으로 허공에 거대한 역오망성의 마법진이 그려진다.

마법진은 열쇠의 색을 따라 보랏빛으로, 녹빛으로, 붉은빛으로, 푸른빛으로, 황금빛으로 번갈아 물들었다.

그 색이 한데 합쳐져 새까만 색이 되었다.

열쇠가 회전을 멈춘 순간, 정 가운데에 직사각형의 게이트가 열렸다.

“…….”

그 안으로 들어서기 전, 크루엘로는 공동의 한쪽으로 향했다.

그곳엔 그가 미리 가져다 놓은 관이 있었다.

관 뚜껑을 열고, 그는 쉬고 있던 이를 품에 안았다.

이어서 게이트로 들어가는 걸음엔 조금의 망설임도 남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흑마법이 만들어 낸 공간은 새하얬다.

눈길이 닿는 곳 전부가 백색.

그 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수정만이 주위의 빛을 다 빨아들일 것처럼 검었다.

길이를 짐작해 보면 족히 5m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수정 형태의 에너지였다.

어째서 모리온이라 이름 붙였는지 알 만큼 흑수정을 닮은 에너지는, 제가 쌓아 온 불길함을 아낌없이 뽐냈다.

크루엘로는 고개를 꺾어 모리온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감흥이 없던 그의 눈에 서서히 열망이 깃들기 시작했다.

“이게 모리온…….”

혼잣말로 중얼거린 크루엘로는 품에 안은 이를 조심스럽게 그 앞에 내려 두었다.

이미 오래전에 죽은 이였으나 마법으로 보존된 덕에 시신은 그저 자고 있는 것처럼 온전했다.

다만 생전과 달리 살갗엔 잿빛이 돌았고 체온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크루엘로가 그 차가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어, 비가.”

그녀의 이름은 비가.

수년 전에 죽은, 그의 하녀였다.

‘죽음을 정복하고 사자를 되살리라’.

많은 이들을 유혹하는 검은 뱀의 교리는 그랬다.

에이미의 죽음, 그리고 비가의 죽음.

소중한 이들의 죽음을 연달아 겪으며 교단이 바라는 것이 크루엘로의 가슴속에도 떠올랐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건 악마의 강림 따위가 아니었다.

크루엘로는, 죽음을 되돌리는 힘 자체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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