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시의 마리오네트-101화 (101/162)
  • 101화

    “도와줘서 고마워요.”

    크루엘로가 말갛게 웃었다.

    “덕분에 생각보다 훨씬 이르게 마무리했어요.”

    “대원로는 벌써 잡은 물고기 취급이에요?”

    “하하. 달링이 말한 대로 이젠 정말 위험한 일이 없을 테니까요.”

    “음.”

    “협력하기 좋으려고 약혼 관계를 유지한 것뿐이니 원한다면 파혼도 해 줄게요. 물론 자기가 원하는 보상은 두둑이 챙겨 갈 거고.”

    “…….”

    “그땐 친구로 다시 만나요.”

    그때까지 마음을 정리해 두겠다는 선언이라도 되는 걸까.

    그럴 거면 처음부터 고백이나 하지 말든가.

    아니다, 무슨 상관이냐고 물어본 내가 잘못했다.

    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가요.”

    크루엘로의 에스코트를 받아들이며 나는 게이트로 들어섰다.

    이상한,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

    도망친 줄 알았던 테타니오 화이트데저트가 발견됐다.

    놀랍게도 탈출구로 나가기 직전 잔해물에 깔려 버렸다고 했다.

    용케 죽지는 않았으나 신체에 영구적인 손상이 남았다니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원래도 지병이 있던 사람인데 오래 살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황태자와 협의했던 대로 우리는 그를 황태자 시해 미수 사건의 진범으로 고민했다.

    황실에서도 재깍 기사들을 보내 그를 데려갔다.

    그러나 절차가 순조로웠던 건 거기까지, 재판은 차일피일 미루어졌고 화이트데저트에 조사관이 오는 일도 없었다.

    여전히 대원로의 눈치를 보는 꼴인데, 황태자 속이 얼마나 익었을지 멀리서도 궁금했다.

    정작 그 할아버지는 어디에 간 건지 요즘 보이지도 않는다던데 이쪽은 크루엘로가 그토록 자신했으니 그에게 맡기기로 했다.

    어쨌거나 이번 사건을 피드백하자면 그랬다.

    멍청이들의 대결.

    더미에 또 속아 넘어간 우리와, 도망치지도 못하고 잔해물에 깔린 테타니오 중 누가 더 멍청한가의 싸움이었다.

    얼떨결에 이기긴 했지만, 전혀 안 기뻐.

    나는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쪽은 이제 관심도 없지만.”

    신경 쓰이는 건 명백히 다른 쪽이다.

    “받아 달라는 말은 아니니 신경 쓸 거 없어요.”

    “자기만! 신경! 안 쓰면! 다냐고!”

    한 음절씩 끊어서 내뱉으며 나는 소파의 쿠션을 마구 때렸다.

    쿠션이 크루엘로로 보였다.

    고백은 걔가 했는데 왜 내가 차인 기분을 느껴야 해?

    결론이 ‘포기한다’면서 고백은 왜 해?

    덕분에 마음이 아주 엉망이었다.

    “악!”

    나는 답답한 속을 이기지 못해 쿠션을 내던졌다.

    그 순간 내 방의 문이 열렸고, 쿠션은 마치 이끌리듯이 누군가의 얼굴로 날아갔다.

    가보트 보네티였다.

    “시오─악!”

    “오.”

    짝짝짝, 나는 크게 박수를 쳤다.

    “희극 같은 등장이었어, 95점.”

    “사람 얼굴에 쿠션을 던져 놓고 그게 할 소리냐?”

    가보트는 신경질적으로 쿠션을 주워서는 얌전히 소파에 내려놓았다.

    방어하며 반격할 준비를 하던 나는 단번에 머쓱해졌다.

    “이런 게 날 때부터 귀족인 사람의 매너구나.”

    “뭔 헛소리야. 성질머리 더러운 인간이 얼마나 많은데.”

    “그건 그렇지. 가보트가 특별한 거였어.”

    “……시끄러워.”

    부끄러워하며 가보트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심심해서 놀러 왔나.

    “그래서 이번엔 또 뭔데.”

    “뭐가?”

    “저번에 나갔다가 들어온 이후로 사실에만 처박혀서 끊임없이 쿠션을 두들기고 있잖아. 무슨 문제 있어?”

    “내 고민 들어 주러 온 거야?”

    “필요 없으면 가고.”

    “아아니, 있어 봐!”

    솔직히 말해서 상대가 미뉴엣이었다면 절대로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격이 칼 같아서가 아니라, 말도 안 되게 눈치가 빨랐으니까.

    하지만 가보트라면 괜찮아.

    이 애는 바보니까 모를 거야!

    확신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가보트, 이건 내가 아는 사람 이야긴데.”

    “허? 보통 그렇게 말하면 자기 얘기 아니냐?”

    아니!

    가보트가 내 생각보다 똑똑했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어.

    “뭐야, 왜 그러는데.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얘기해 봐.”

    “……그렇게 철저하게 비밀을 지킬 건 없고 미뉴엣한테만 말하지 말아 봐.”

    “뭐?”

    가보트는 눈썹을 까딱하더니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고는 훨씬 진지한 태도로 목소리까지 낮추어 물었다.

    “너 사람 죽였냐?”

    “뭔 소리야!”

    물론 죽이긴 했지만.

    “그러면 뭔데.”

    “그러니까, 진짜 내가 아는 사람 이야긴데 말이야. 내 이야기는 아니야, 응.”

    따지고 보면 두말할 것 없는 진실이다.

    이건 시오라 보네티의 이야기지, 내 이야기가 아니니까.

    크루엘로는 시오라를 좋아한다고 했지, 날 좋아한다고 안 했어.

    “약혼자한테 좋아한다는 고백을 들었대.”

    “뭐야, 장난이겠지.”

    “아니거든.”

    “온갖 느끼한 호칭을 잘만 굴려 대는데 좋아한다는 말이 대수겠냐.”

    “키스까지 했─!”

    아 씨.

    억울해서 항변하려다 못할 말까지 내뱉어 버렸다.

    나는 다급히 입을 다물었으나 의외로 가보트는 여전히 심드렁했다.

    “약혼식에서 입 맞춘 거 누가 몰라. 그래서 뭐, 이어진 말이 있을 거 아니야. 결혼하재?”

    “파혼하자던데.”

    “진짜?”

    남 이야기라는데 왜 화색이 돌아?

    가보트가 기뻐하며 소리쳤다.

    “그 자식이 그렇게 기특한 짓도 할 줄 안단 말이야?”

    “아니, 그게 기특한 짓씩이나 돼?”

    “뭐야, 시오라. 너 전부터 파혼한다, 소리는 죽어도 안 하던데 설마 그 자식, 좋아하냐?”

    “뭔 소리야, 또!”

    누가 미뉴엣 동생 아니랄까 봐 똑같은 걸 물어봐!

    남매가 나란히 꼬아서 생각하는 것도 재주다.

    아니지, 크루엘로까지 껴 줘야 한다.

    크루엘로는 나더러 가보트를 좋아하냐고 헛소리하고, 가보트는 나더러 크루엘로를 좋아하냐고 헛소리하고.

    서로 그렇게들 싫어하면서 발상은 영혼의 쌍둥이가 따로 없다.

    “아니, 잠깐만. 전에는 그런 기색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네가 달라진 게 최근이니까 파혼하자는 말도 가까운 시일에 들었겠네?”

    “어? 뭐, 그렇……. 아, 내 얘기 아니라니까!”

    “그러면 키스했다는 것도 최근?”

    “…….”

    “그 미친 새끼가 널 추행했어?”

    “나 아니라고!”

    내 항변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가보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불길함이 치솟아 나는 일단 그를 붙들었다.

    “어디 가.”

    “미뉴엣 집무실.”

    “말 안 하기로 했잖아!”

    “이거 놔! 나중에 알면 미뉴엣이 눈 돌아가서 나까지 족칠 게 분명한데 이걸 그냥 있으라고? 놔!”

    “족치긴 뭘 족쳐! 약혼한 사이에 그깟 게 뭐 대수라고!”

    “그래, 그 약혼부터가 문제였어! 피아니시모, 나와서 시오라 좀 떼어 내 봐!”

    “아니야, 차라리 날 도와줘, 피아니시모!”

    허공에 동글동글하게 연둣빛 기운이 뭉쳐 들었다.

    그 동그라미에서 조그만 날개가 뾱, 나뭇가지 같은 다리가 뾱.

    위풍당당하게 나타난 피아니시모가 포르르 날아 움직였다.

    뱁새는 가보트의 온몸에 연둣빛 바람을 휘감아 그를 옴짝달싹도 못 하게 했다.

    “억!”

    그래도 쓰러지려는 가보트를 바닥에 얌전히 놓아주기는 했다.

    피아니시모는 싸우지 말란 듯 그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고 가보트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저런.

    “피아니시모, 너…….”

    그런 건 알 바 아니라는 듯 볍씨는 또 포르르 날아 내 손가락에 앉았다.

    나는 사랑스러운 정령을 다정히 쓰다듬어 주었다.

    착하다, 착해.

    가보트가 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네가 그런다고 평생 비밀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아?”

    “누가 들으면 반역이라도 저지른 줄 알겠다. 대체 크루엘로한테 왜 그렇게 박해? 평판 나쁜 거 말고 특별한 이유라도…….”

    말을 하던 중 번개 같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소설책에서 이런 전개를 본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혹시 나 좋아해?”

    “그걸 말이라고 하냐? 당연히 좋아하지.”

    헉!

    나는 숨을 들이켰다.

    이번에도 고백이야?

    신문의 연애운 난이라도 미리 봐 둘걸!

    “너는 싫어하는 가족 고민 상담도 하고 걱정해 주냐?”

    “아, 가족으로 좋아한다고.”

    내 착각이라 다행이야.

    나는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가보트에게 충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말은 좀 조심하는 게 좋겠어, 가보트. 하마터면 금지된 사랑으로 오해받을 뻔했잖아.”

    “너나 입조심해, 너나!”

    가보트가 치를 떨며 소리쳤다.

    까탈스럽기는.

    ***

    대원로는 제 저택과 그리 먼 곳에 있지는 않았다.

    오로지 스스로만을 위해, 비밀스럽게 만들어 둔 신전이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모리온을 해방할 준비 작업을 했고 지금에야 비로소 일을 마무리했다.

    “드디어…….”

    선조들의 염원이 제 손에서 이루어지리라.

    죽은 교인들은 모조리 살아날 것이고 예정된 영광을 누릴 것이다.

    대원로는 잠시 그리운 얼굴들을 떠올렸다.

    주인공을 불러들이기에 앞서 그는 석상 앞에 무릎 꿇었다.

    그건 시오라 보네티가 망가뜨린 신전에 있던 여성체 신상이었다.

    모든 게 부서지고 엉망이 되었으나 그것만은 상한 곳 하나 없이 온전했다.

    거기서 대원로는 제가 섬기는 악마의 존재를 느꼈다.

    벅차오르는 마음에 전율하며 노인은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계시가 내려올 리는 없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애당초 그건 나이젤리아가 꾸며 낸 거짓말일 테니까.

    수십 년간 제가 느껴 온 박탈감은 근거 없는 허상에 불과할 테니까.

    정성스럽게 기도를 마치고 대원로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때마침, 뒤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크루엘로 화이트데저트.

    “이제 대원로님만 남았습니다.”

    고개를 돌리기도 전부터 냉기가 느껴진다.

    일어나 몸을 돌리며 노인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크루엘로, 어린 가주의 손엔 정성스럽게 얼음을 뽑아 만든 창이 들려 있었다.

    “가주께서 나와 협상을 하러 온 줄 알았소만, 2원로를 해쳤다고 아주 오만해지셨구려.”

    “그건 제가 한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말이오.”

    쯧쯧, 헤오림이 노골적으로 혀를 찼다.

    아이에게 일찍부터 마법을 가르치려 했으나 자의로 배우는 게 좋을 듯하여 강제하진 않았다.

    에덴을 통해 부추겨도 꿈쩍하지 않다가 크루엘로가 마법을 배운 것이 겨우 열일곱부터.

    찬란한 재능은 그럼에도 빛을 발했으나 객관적으로는 아직 멀었다.

    그는 5년도 마법을 배우지 않은 풋내기였다.

    바깥에 상대할 자가 없다고, 또 시오라 보네티의 성력에 편승해 하나둘 해치우다 보니 객관적인 판단력을 잃었나 본데.

    “마지막으로 가주께 겸손의 미덕이란 걸 가르쳐 드려야겠소.”

    노인의 케인에서 청람색 불길이 치솟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