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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100화 (100/162)
  • 100화

    나…… 라고?

    지금의 나 또한 크루엘로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일까.

    순간적으로 말문이 틀어 막혔으나 나는 가까스로 입술을 떼어 냈다.

    당장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나는 안 죽었어요. 보면 알겠지만요, 그냥 별거 아닌 환각이잖아요.”

    “……맞아요. 심장 소리가 들리고 따뜻하고 나랑 대화도 하고 있고.”

    약간 상태가 안 좋은데.

    시오라, 그가 재차 나를 불렀다.

    평소의 장난 같던 호칭은 집어던졌으나 내겐 그 이름이 외려 낯설게 들렸다.

    “소중한 사람이 죽어 본 적 있어요?”

    “……네?”

    “없으려나. 부모님을 잃었을 때도 그리 슬프지 않았다고 했고 보네티로 가기 전까지 가깝게 지내는 사람도 없어 보였고.”

    “…….”

    “나는 여러 번 있었어요.”

    결국 이 화제구나.

    나는 입을 다물었고 크루엘로는 긴 숨을 내뱉었다.

    어깨에 닿는 온기에 잠깐 움찔했다.

    “그게 어떨지 달링도 짐작은 하겠죠. 가보트 보네티가 죽을까 노심초사했던 걸 떠올리면요. 그런데 실제로 벌어지면, 추측과는 좀 다를 거예요. 훨씬…… 안 좋거든요.”

    “그게…….”

    “반복되면 더 끔찍해져요. 삶보다 죽음의 무게가 더 무거워져요.”

    크루엘로의 목소리 자체는 담담했으나 사람의 감정을 끌어내리는 어둑함이 있었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

    부모의 죽음.

    안다, 나도 알아.

    그 감정에 동조했기 때문인지, 불현듯 지나간 기억이 떠오르는 것 자체가 안개의 후유증인지.

    머릿속에서 낡은 태엽이 돌아간다.

    “애기, 너 이제 막내 아닐지도 몰라. 내가 임신했거든. 체이스의 아이를 가졌단 말이야.”

    “리나? 체이스! 전부, 이게 다 어떻게……. 어머니, 사람들이 이상해요! 피를……. 그, 검은 뭐예요?”

    “이제, 너뿐이란다.”

    “페불라시여. 선배 신도들을 되돌려 주세요. 저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어요.”

    “페불라시여, 제발. 억울하게 죽어 간 당신의 종들을 되돌려 주세요.”

    “페불라시여, 페불라시여.”

    “…….”

    “또 쓸데없는 기도를 했니?”

    “……또 검을 드셨네요, 죽일 사람이 남으셨나요.”

    “너를 진정 마지막 신도로 남기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란다.”

    “이젠, 울지 않는구나.”

    “두 분은 파문되실 거예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건 교리에 어긋나는 일이니까.”

    “상관없다. 우리는 그것으로 너를…….”

    생각하기 싫어, 머리 아파.

    나는 눈가를 찡그리고 고개를 수그렸다.

    속에 든 감정을 빼내기 위해 가늘게 심호흡을 했다.

    크루엘로의 말이 이어졌다.

    “전에 그랬죠. 페불라의 부흥을 바라지 않는다고. 자연스럽게 내버려 두고자 한다고요. 그땐 그 말이 멋있었는데 지금은 질투가 나네요. 나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이에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요.”

    “시오라.”

    그가 드디어 품에서 나를 놓아주었다.

    내 어깨를 잡고 조금 밀어내 얼굴을 마주 보았다.

    크루엘로의 두 눈은 어둑하게 잠겨 있었다.

    “스스로의 목숨이 가벼워요?”

    “네?”

    “수확제 때 상관도 없는 신수를 구하려 무리했었죠. 처음엔 성직자 특유의 완고한 이타심인 줄 알았어요.”

    그건 그저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은 반박할 겨를도 없이 이어졌다.

    “덫이 되어 달라는 말에도 그러려니. 큐딜의 마차에서 떨어지기 직전에 왔음에도 초조한 기색 하나 없고. 아레스의 타깃이 된 걸 알았을 때도, 보네티 백작이 죽이려 한 것도 별거 아닌 양 넘기고.”

    “그건…….”

    “만난 지 몇 달이 됐을 뿐인 양동생을 위해 목숨을 걸고. 과도하게 성력을 쓰면 위험해진다는 걸 알면서도 관련 없는 남을 위해 터무니없이 남발해 댔죠.”

    “…….”

    “내가 환각에 취해 당신을 죽이려고 했을 때조차 말장난 몇 마디로 넘어갔어요. 그런 일이, 셀 수도 없이 많았어요. 그러다 보니 어느 날 알게 됐지 뭐예요.”

    아.

    “시오라 보네티의 목숨은 세상 누구의 생명보다 가볍고, 심지어는 제 호기심보다도 뒷전일 때가 있다는 걸.”

    “크루엘로.”

    “그건 이타심이 아니에요, 이기심이지.”

    절로 실소가 나왔다.

    그야 당연한 일이 아닌가.

    나는 시오라 보네티가 아니다.

    시오라가 죽는다 한들 그게 내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엘린과 싸울 때는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나는 누구보다 안전했으니까.

    하지만 그걸 모르는 입장에서는 그래, 내가 철없이 무모해 보일 수도 있겠다.

    기분이 좋지는 않았으나 걱정해 주는데 화를 낼 수도 없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아까 주웠던 열쇠를 그의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진지해지지 말아요, 이제 열쇠 모으기도 거의 끝나 가는데 뭐 어때요.”

    “……꼭 열쇠를 모으는 게 인생의 목적인 것처럼 이야기하네요.”

    “제발요, 크루엘로.”

    “모리온을 정리하면 삶이 다 끝나기라도 할 것처럼요.”

    “그냥…… 위험할 일이 더 없을 거라고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끝나긴 뭐가 끝나요, 모아 놓은 돈도 다 못 썼는데.”

    “달링의 목적은 모리온을 없애는 거겠죠. 그때는 여태까지 썼던 성력보다 많은 힘을 내야 할 거고……. 그러다 죽을 수도 있겠어요?”

    몸이 움찔 떨렸다.

    장담할 수 없는 문제였으나, 그럴 가능성도 충분했다.

    엘린을 상대하는 데에도 수명이 닳을 만큼 애를 썼고 운이 따라 주고야 겨우 이길 수 있었다.

    200년을 살아온 사람을 상대하기도 버거웠는데 그 배가 되는 시간 동안 쌓여 온 에너지는 어떨까.

    크루엘로에게는 허를 찔렸다.

    평소에는 뻔뻔스럽게 잘 움직이던 혀가 굳어서 꼼짝하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크루엘로의 시선이 차차 무거워져서, 나는 애써 아무렇게나 말을 꺼냈다.

    “……그래서 크루엘로가 손해 볼 거 있어요?”

    “…….”

    “같은 목적을 가진 파트너로서 내가 그 목적에 그만큼 진심이면 고마워해야죠.”

    “시오라.”

    “그러니까 내 말은……. 크루엘로도 내 목숨을 너무 신경 쓴다는 거예요. 우리도 겨우 몇 달 알았잖아요. 그렇게 마음 쓸 이유가 있나요?”

    “좋아해요.”

    “그러……. 네?”

    그건 힘겹게 이어 가던 내 설득도 내 머릿속도 내 감정까지 모든 걸 백지로 물들이는 말이었다.

    “내가 시오라를 좋아해요.”

    잘못 들었나 되짚을 새도 없이 한층 명확해진 말이 날아들었다.

    그게, 그러니까, 뭐?

    머릿속도 고장 나 버린 것 같았다.

    크루엘로가 날 좋아한다고?

    진심이야?

    왜?

    내가 뭘 했다고?

    끝도 없이 증식하는 의문이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받아 달라는 말은 아니니 신경 쓸 거 없어요.”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그러니까요, 어떻게 신경을 안 쓰겠어요.”

    크루엘로가 입매를 늘여 웃었다.

    좀 전에 비해 분위기는 확연히 느슨해졌으나 그걸 반길 수는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죽는 게 무서워요. 그걸 한 번만 더 겪으면 나 자신을 아예 잃어버릴 것 같아.”

    “아…….”

    “하지만 말 몇 마디 내뱉는다고 사람의 가치관이 바뀔 리는 없겠죠. 더군다나 모리온을 없애려는 것도 포기할 리 없고요.”

    그건 당연하지.

    속으로만 생각한 건데 겉으로 티가 났는지,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제야 표정 관리를 했으나 뒤늦은 일이었다.

    “그래서 받아줄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마음은 정리할 거니까요.”

    크루엘로가 겪은, 앞선 죽음이라는 것 또한 나였기에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수그렸다.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지 크루엘로도 잠시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 음.

    일단은 확인부터 하자.

    “좋아…… 한다는 게요, 그러니까 이성적으로 좋아한다는 거죠? 파트너나 친구나, 뭐 그런 식이 아니라요.”

    “그런 게 중요해요?”

    “당연히 중요하죠! 뭐야,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아닌가 본데. 지금 나 놀림당한 거죠?”

    “놀린 거 아닌데.”

    아니긴!

    사람을 완전히 오해하게 해 놓고서!

    화를 내려던 순간 그가 내 얼굴을 잡고 끌어당겼다.

    어…….

    곧이어 코 아래쪽에서 무언가가 눌리는 느낌이…….

    어라?

    “그런 뜻 맞아요.”

    입술이 눌린 채 속삭이는 목소리가 그대로 뇌를 뚫고 들어오는 것 같다.

    머릿속이 다시 희게 물들었다.

    아악!

    나는 크루엘로를 밀치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그에게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이, 이게, 무, 뭐!”

    내가 내뱉고 있지만, 도무지 사람의 어휘력이 아니군.

    이야기 신의 신도라고는 나도 믿기지 않을 정도라 일단은 입을 다물었다.

    크루엘로가 눈을 휘어 웃으며 더욱 불을 질렀다.

    “왜 안 피했어요? 충분히 피할 수 있었잖아요. 내가 뭘 할지 알았으면서.”

    이거 내가 약혼식 날에 했던 말이잖아!

    이게 그거랑 같아?

    두 눈으로 세상의 모든 욕을 쏟아 내자 그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웃겨? 좋아?

    그래, 좋아하는 사람한테 입, 그걸 했으니 좋긴 하겠지.

    아니, 그런데 포기한다며.

    입, 입맞, 하여튼 이건 뭔데!

    “그러니까 지금 고백하면서 날 차 놓고는 키…… 한 거예요?”

    어처구니가 없어서 되묻자 크루엘로가 더 크게 웃었다.

    미쳤어.

    진짜 미친놈.

    이쯤 되면 이름을 미친놈으로 바꿔야 하는 수준 아닌가?

    온 얼굴이 화끈거렸다.

    “새삼스럽지만, 정말 일이 얼마 안 남았네요.”

    “말 돌리지 말아요.”

    “그럼 계속 이야기할까요?”

    “……와! 건물 붕괴가 멎었어요. 이제 나가면 될 것 같아요!”

    나는 티 나게 말을 돌리며 얼음 방벽 쪽으로 다가갔다.

    뒤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지만 못 들은 체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이야깃거리를 바꾸자.

    “정말 대원로의 열쇠만 빼앗으면 끝이잖아요. 문제는 그 할아버지가 열쇠를 몸에서 빼놓고 다니는 건데……. 어쩌죠?”

    “사람한테는 누구나 역린이란 게 있으니까요.”

    “엥?”

    “에덴에게 추적 마법을 걸어 뒀어요. 인질로 잡으면서 살살 낚아 보려고요.”

    그게 그렇게 담담히 할 말인가.

    실로 오래간만에 크루엘로가 〈운명〉의 악당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견은 없지만 문제는.

    “그런다고 열쇠를 가져올까요? 아무리 아끼는 아들이라고 해도…….”

    “안 되면 그땐 다른 방법을 고민해 봐야죠. 저는 될 거라고 생각해요. 아들에게 교리조차 가르치지 않았으면 교단보다 아낀다는 증거가 아닐까 해서.”

    근거는 확실하군.

    고개를 끄덕이자 크루엘로가 게이트를 열었다.

    “일단은 올라가죠. 혹시 에덴이 도망쳐 버리면 곤란하니까.”

    게이트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그가 나를 불렀다.

    “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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