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2차 관문, 정신계 시험에서 그들은 상당한 시간을 소모했다.
관문대를 통과한 크루엘로의 낯빛이 나빴다는 보고도 있었다.
그걸 듣고서야 테타니오는 깨달았다.
마법을 익힌 지 4, 5년이 된 풋내기니 정신계 마법에 내성이 부족한 것이다.
확신한 즉시, 테타니오는 휘슬의 절벽에 새겨진 마법진부터 긁어 왔다.
그 정도의 마법을 재현하는 건 손이 많이 가서 그대로 쓸 수는 없었으나 흉내는 냈다.
‘바로 여기에 말이지!’
벌컥, 테타니오는 통로의 끄트머리에 있던 문을 열자 공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닥에는 그가 일찍부터 준비해 놓은 거대한 마법진이 있었으나, 반만 완성된 상태였다.
상관없다.
마나의 흐름을 이어 내지 못한 곳에 인형을 세워, 수동으로 연결하면 그만이니까.
“아레스, 나를 따라와. 나머지 놈들은 말해 둔 축으로 가라.”
축에 선 언데드들이 마법진을 연결하는 동안 테타니오는 진에 베아티투도를 뿌렸다.
준비를 마치고 빠져나가기 직전 테타니오가 멈칫했다.
감각 보조용 마도구에 잡히는 두 사람과의 간격은 대략 50m, 아직 여유가 있다.
‘혹시 모르니까.’
그는 크라바트를 풀고 제 목에 손을 올렸다.
세로로 선 진청색 열쇠가 끌려 나온다.
테타니오는 곧장 그것을 마법진의 한가운데에 던져 넣었다.
이러면 작전이 실패하더라도 도주에 여유가 생길 테니까.
이제 간격은 10m.
그는 서둘러 탈출구로 연결된 통로 문을 열면서 소리쳤다.
“발동해!”
주축에 있던 언데드가 진을 발동했다.
중심에서부터 마나가 줄지어 연결되며 단계별로 공동에 불이 들어온다.
그 가운데에서부터 희뿌연 안개가 맹렬하게 피어올랐고, 테타니오는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의 귀에 공동의 반대쪽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타이밍을 잘 맞췄군.
그가 히죽 웃으며 탈출구로 달려가던 순간.
테타니오가 빠진 공동으로부터 새하얀 빛이 물밀 듯 쏟아졌다.
성력을 목도한 적 없는 이라도 그 정체를 알아볼 만큼 명확한 광채였다.
우아아악, 그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어떤 또라이가 상황도 파악하기 전에 공격을!’
그러나 테타니오가 아무리 비이성적인 대처를 비난하더라도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잠깐, 아레스!
퍼뜩 떠오른 이름자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살면서 제일 공들여 만든 인형은 쏟아지는 빛에도 대검을 쳐들고 버티고 있었다.
“하, 하하, 대단……. 아, 안 돼!”
테타니오가 뒤늦게 소리쳤으나 그의 만류는 늦었다.
위험을 감지한 아레스가 성력이 쏟아진 방향으로 암녹색 기운을 쏟아 냈다.
생전 품고 있던 생존 욕구 때문인지, 체내의 마나를 모조리 쥐어짠 공격이었다.
거대한 초승달 모양의 공격은 지하 통로의 벽과 천장, 바닥을 가리지 않고 모든 걸 갈가리 찢어 놓았다.
공간은 버티지 못했다.
마구잡이로 벽에 크랙이 생기고 공간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천장에서부터 돌 부스러기들이 와르르 쏟아지고 흙먼지가 뿌옇게 인다.
‘안 돼!’
유사시 도망치며 무너뜨릴 수 있도록, 일부러 약하게 지은 건물이었다.
이대로는 무너져 버릴 수도 있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출구까지는 얼마 남지도 않았으니 깔리기 전에 어떻게든 나갈 수 있다!
그리하여 문 앞에 다다른 순간, 그는 서둘러 손을 뻗었으나.
“……망할.”
좀 전의 충격으로 개폐 장치가 망가졌다.
나갈, 수가 없다.
이미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낯으로 그가 달려온 곳을 뒤돌아본 순간 콰과광, 지하 공간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
‘비밀 공간을 만들지 않으면 성에 안 차는 건가?’
검은 뱀, 검은 뱀, 하더니 자기들이 진짜 뱀인 줄 아나 봐.
나는 크루엘로의 안내대로 복잡한 비밀 통로를 헤집고 다녔다.
별의별 마법 장치가 깔려 있어서 나는 한 걸음 한 걸음을 조심해야 했다.
덕분에 테타니오의 기척도 잘 잡히지 않았고 게다가.
“게이트도 안 열릴 가능성이 높으니까 조금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비상 탈출 장치도 막혔다.
유사시 도망칠 수는 없겠구나.
하나 무섭지는 않았다.
상대가 나이젤리아 정도면 몰라도, 나는 이미 테타니오의 허접함을 확인했으니까.
게다가 2원로 때도 도망칠 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쉴 새 없이 새끼 뱀이 날아들었고 그녀 자체도 워낙에 뛰어난 마법사라 게이트로 도망치는 걸 내버려 두진 않았을 테고.
이젠 죽었지만.
어쨌거나 귀찮긴 해도 우리는 착실히 거리를 좁혀 나갔고 수상해 보이는 문에 다다랐다.
“오?”
철문을 밀어 열자 넓게 트인 공동이 나왔다.
순간적으로 함정을 파기 딱 좋은 곳이라 생각했고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눈보라처럼 희뿌연 안개가 몰아닥쳤다.
시야가 백색으로 물들기 직전의 찰나에만 공동에 있던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규칙적인 배열로 서 있는 언데드들과 그 가운데 떠 있던 열쇠.
“이거 정신 공격이에요!”
나는 우선 반사적으로 소리쳤고.
그다음으로는 비밀 통로를 내달리며 준비한 주문을 쏟아 냈다.
─6주문. 광휘brilliance.
환각에 갇혀 있을 때 물리적인 공격이 들어오면 끝장.
그러니 잠재적인 위협부터 없애야 한다.
눈앞에 환각이 나타나려다가 내가 쏟아부은 빛에 덮여 잠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성력이 걷히면 뭐라도 나오겠네.
테타니오가 그렇게 마법진에 재주가 넘친다니, 이번엔 뭐가 보일는지.
그러나 광휘가 걷힌 순간 드러난 광경은 예상과는 달랐다.
“어라?”
안개는 깨끗이 사라져 있었다.
이것마저 환각은 아닐 테고.
언데드들이 쓰러지면서 진이 망가졌나?
아니면 아까 규칙적으로 서 있던 언데드들이 마법진의 일부였나?
의아해하던 때 이상 징조가 생기기 시작했다.
공동의 반대쪽 문을 덮친 강한 충격파.
이어 공간 전체에 이리저리 금이 가고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흔들렸다.
“윽!”
요즘은 어째 어딜 들어가기만 하면 무너지려고 하네. 건축신의 저주를 받았나.
이런 일이 자주 있다 보니 나는 침착하게 상황을 점검했다.
지금 제일 급한 게 뭐지?
“열쇠!”
답이 나온 즉시 나는 움직였다.
쓰러진 언데드 사이를 헤집어 잽싸게 열쇠를 집어 올리고 서둘러 크루엘로를 찾았다.
그 잠깐 새 환각에 홀렸는지 그는 낯빛이 좋지 않았다.
눈빛도 흐리멍덩하고 무너져 가는 공동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날 죽이려 들진 않으니 조금만 시간을 주면 괜찮아질 것이다.
나는 약간만 버티면 된다.
건물이 무너지기 전에 가호로 몸을 방어하면 그쯤이야…….
“오…….”
그 순간,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지하 공간을 잡아먹을 듯하던 크랙이 기어이 일을 치렀다.
바로 위에서 떨어지는 잔해물을 올려다보니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가호는 광휘와 같은 6주문.
1초도 안 되는 시간 내 읊을 수는 없다.
하지만 게이트라면?
그 단어가 생각난 즉시 크루엘로를 붙들고 반지를 문질렀으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게이트도 안 열릴 가능성이 높으니까 조금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그 말을 떠올린 즉시 질끈 눈을 감았다.
이번 사인은 압사로군.
내 인생의 허무한 죽음에 2위로 기록될 사인이다.
“……페불라시여.”
콰드득.
머리 위에서 요란한 소리가 터졌다.
혹시 내 몸이 부서지는 소린가 싶었지만 아프진 않다.
곧바로 다른 몸으로 옮겨 온 건…….
한쪽 눈꺼풀만 슬쩍 밀어 올려다봤을 때, 시야에 보인 건 고슴도치처럼 피어난 하늘색 방벽이었다.
아.
“의식…… 없는 줄 알았잖아.”
힘이 풀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저번에 영 크루엘로의 상태가 안 좋길래 이번에도 전력 외일 줄 알았는데 다행이다.
다음부터는 크루엘로만 믿지 말고 방어 주문을 외워 둬야지.
아니, 지금부터 하자.
건물의 상태는 아직도 심상치 않았으니까.
나는 꾸물꾸물 안쪽으로 기어들어 가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마저도 넘어질 뻔한 걸 크루엘로가 잡아 주었다.
“고마워요, 근데 얼음으로 버틸 수 있는 거 맞죠? 아니, 뭐, 의심하는 건 아닌데 혹시 여기에 갇혀 버리면 질식하는 것도 걱정해야 하고.”
“건물이 다 붕괴돼 버리면 깔아 놓은 마법진도 무력화될 거예요.”
“아하, 그럼 언제 뚫릴지 모르니까 계속 반지 문지르고 있을까요?”
그렇게 말하며 잠시 벽면에 기대려는데 이번엔 그쪽이 부서졌다.
그대로 엎어질 뻔했으나 크루엘로가 나를 당겨 품에 넣었다.
얼음 방벽은 영역을 확장해 사방을 둥글게 감쌌다.
이렇다 보니 더더욱 고슴도치 같아졌다.
“얌전히 있어요.”
“내가 무슨 사고뭉치인 것처럼…….”
멋쩍어 투덜거렸지만, 빠져나갈 생각은 없었다.
아직 주문이 완성되지도 않았고 주위 온도가 너무 떨어져 추웠으니까.
크루엘로의 체온이라도 두르고 있자.
방벽 바깥에서 나는 요란한 소리를 들으며 나는 상황이 정리되기를 멍하니 기다렸다.
그렇다 보니 크루엘로의 심장 박동이 유독 빠르다는 걸 알아차린 건, 조금 시간이 지나서였다.
그 안개에서 뭘 본 거지?
조심스럽게 물어보려는 때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또 죽을 뻔했네요.”
“그렇……죠, 창피할 뻔했어요! 2원로도 아니고 겨우 저 손에─.”
“나는 또 죽일 뻔했고.”
분위기를 환기할 겸, 장난스럽게 내뱉은 말이 잘려 나갔다.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크루엘로는 나를 고쳐 안고 제 품의 더 깊은 곳으로 끌어당겼다.
그래서 나는, 그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다.
“별거 아닌 상대였는데 잠깐 방심하니까 이러네. 그렇단 건 내 쪽이 더 별거 아니라는 거겠죠.”
“그렇다기보다는…….”
“내 역량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건 단순한 자조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설마 모리온을 떠올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표정을 보기 위해 크루엘로의 품에서 나가려 했으나 그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답답했으나 이 상황에 제대로 저항할 수도 없다.
나는 다급히 물었다.
“방금 안개에서 뭘 본 거죠? 뭐였어요? 말해 봐요.”
안개에 뒤덮인 건 한순간.
그마저도 나는 성력에 뒤덮여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나 크루엘로는 무언가를 본 게 틀림없었다.
약간의 정적 끝에 크루엘로가 답했다.
“시오라.”
“네?”
“시오라 보네티가 죽어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