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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98화 (98/162)
  • 98화

    삽시간에 터져 나간 빛이 테타니오와 그 인형들을 뒤덮었다.

    전자는 흑마법사가 아니라 통하지 않았지만, 후자에게는 통상적인 수준의 몇 배나 되는 효력을 발휘했다.

    그들의 살갗 위로 넘실거리던 검은 마나가 사그라지며 인형들이 하나둘 툭툭 쓰러졌다.

    끈 떨어진 마리오네트 꼴이었다.

    이번에도 주문을 외는 속도는 오래 걸렸지만, 성취감은 괜찮군.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린 테타니오를 기쁘게 바라보았다.

    “어, 떻게?”

    “언데드가 성력에 약하다는 거, 몰랐던 사람처럼 왜 그러세요.”

    그 졸개 같은 반응에 조금 시시해졌다.

    줄리안의 배후라고 해 놓고, 어쩌면 줄리안 미네르바 때와 한 치의 차이도 없담.

    나이젤리아의 다음 순서가 이렇게 쉬워도 되는 건가?

    이 사람의 수준은 아레스만도 못 한, 딱 큐딜 다음이다.

    음.

    4원로는 꽤 높은 숫자인데, 생각하다 보니 궁금하네.

    “저기, 이런 질문이 실례라는 걸 아는데, 어쩌다 4원로가 되셨어요?”

    “이렇게까지 차이가 날 리 없어, 그럴 리 없다고! 내가 베아티투도를 얼마나 들이부었는데!”

    “아, 말해 줄 생각 없구나.”

    “제에엔장! 젠장!”

    말해 줄 생각이 없을뿐더러 얌전히 잡힐 생각도 없어 보였다.

    테타니오는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몸이 약하다는 게 진짜였는지 속도는 영 어중간했다.

    크루엘로가 느긋하게 던진 얼음 창이 테타니오의 그림자에 처박혔다.

    그리고 그 순간, 발밑에서부터 올라간 한기가 그의 몸을 천천히 집어삼켰다.

    발목, 종아리, 무릎과 허벅지.

    점점 위로 올라오는 얼음에 그가 허우적거렸다.

    “헉!”

    얼음을 떼어 내려고 필사적으로 문대 봐도 마나도 담기지 않은 손으론 의미가 없었다.

    결국 허리춤이 얼어붙을 때가 되어서야 테타니오가 절박하게 애원했다.

    “살, 살려 줘! 옛정을 떠올려 주렴, 크루엘로, 나는 네 숙부다, 크루엘로!”

    구질구질하기로 원로의 순서가 정해졌다면 단연 대원로급이다.

    긴장감이 떨어져 하품까지 나왔으나 테타니오에 반응한 이들도 있었다.

    인형 몇이 꿈틀거리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뒤쪽에 있어 광휘의 영향을 덜 받은 언데드들이었다.

    그들은 크루엘로를 공격하려 했으나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서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었다.

    애처롭기까지 한 몸짓에 크루엘로가 눈가를 찡그렸다.

    번거로운 일을 아예 끝내 버리려는지 그가 허공에 얼음창을 소환했다.

    유려한 문양으로 깎여 나간 거대한 창이 이미 죽은 이들에게 안식을 주려 움직였다.

    창을 쏘아 내기 직전, 테타니오가 돌연 소리쳤다.

    “그, 그건 에이미다!”

    헛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반사적으로 그쪽을 쳐다보았다.

    창의 바로 앞에 있는, 인형들 중 가장 체구가 작은 언데드.

    그렇다고는 해도 덩치가 작은 어른 정도다.

    저걸 속으라고 한 말인가?

    설사 진짜 에이미의 시신이라도 지금 상황에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에이미를 다시 죽일 생각이냐, 크루엘로! 저 애는 너를 위해 죽었어!”

    “아니, 근데─.”

    콰득, 창은 가차 없이 남은 인형들을 꿰뚫었다.

    테타니오가 에이미라 주장한 언데드에게서 가면이 떨어져 나왔다.

    툭 떨어진 가면이 크루엘로의 발치로 굴러 간다.

    드러난 얼굴은 노년의 사내.

    너무나 당연하게도, 에이미 로열샌드가 아니었다.

    “숙부님.”

    가면을 짓밟아 부수며, 크루엘로가 들어 본 중 가장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로 화가 났는지, 주변의 온도가 한층 더 뚝뚝 떨어졌다.

    그가 테타니오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숙부는 이제 가슴께까지 얼어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떼어 낼 때마다 크루엘로의 근방이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숙부께서는 제가 아직 갖고 놀기 좋은 어린아이로 보이시나 본데.”

    “너, 너…….”

    “에이미의 모습이라면 질리도록 봤어요. 그런 걸 헷갈릴 리가 없잖아요.”

    테타니오의 바로 앞에 멈추어 서서, 크루엘로가 검을 뽑았다.

    “그런데 그 이름을 입에 담는 건, 어서 죽여 달라는 애원인가요?”

    검의 끝이 테타니오의 목울대에 닿을 듯 가까웠다.

    그는 차마 침조차 삼키지 못한 채 크루엘로를 바라봤다.

    그렇죠?

    “곱게 죽기 싫다는 거잖아.”

    쩌적, 착실히 영역을 넓혀 가던 얼음이 테타니오의 목을 탐낸다.

    중년 사내는 사색이 된 얼굴로 말했다.

    추위 때문인지 공포 때문인지 그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내, 내가 잘못 봤구나. 하지만 에이미의 시신이 내게 있는 건 사실이야. 날 죽이면─.”

    “거짓말쟁이.”

    단번에 테타니오의 전신이 얼어붙었다.

    나는 얕게 숨을 들이켰다.

    겁만 주려는 줄 알았는데 진짜 저질렀네.

    열쇠는 어쩌지? 아직 죽은 것 같진 않으니까 녹이기만 하면…….

    그때 크루엘로가 검을 쥔 팔을 들어 올렸다.

    인형극장에서의 잔상이 겹쳐 보였다.

    그가 기어이 조각마저 베어 낼 것 같아서 나는 그의 팔에 매달리며 소리쳤다.

    “열쇠! 열쇠!”

    주제가 에이미인 만큼 내가 할 말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크루엘로가 가만히 나를 쳐다봤다.

    그의 눈에는 아직 살의가 들끓고 있었다.

    가보트 식으로 표현하자면, 돌아 버린 눈빛이다.

    텁, 나도 모르게 크루엘로의 두 눈을 덮어 버렸다.

    “…….”

    할 수 있다, 나는 나를 비가로 보고 죽이려던 크루엘로도 진정시켰던 사람이다. 분명…….

    그런데 다시 생각하니까 억울하네.

    왜 비가를 죽이려고 그래?

    환상 속의 비가가 아무리 자기를 죽이라고 했다지만, 그런다고 정말 죽이려는 사람이 어디 있어!

    당시 나는 그 큰 저택을 거의 혼자서 쓸고 닦느라 과로사까지 한 몸이다.

    은혜를 저버리는 것도 유분수지.

    마음이 울컥했지만, 화를 낼 처지도 상황도 아니라서 가까스로 삼켰다.

    “한 번만 봐주자, 한 번만! 숨은 원로 찾기에 이어 숨은 열쇠 찾기? 같은 레퍼토리로 시간 끌면 재미없어요. 심호흡 딱 세 번만 하면 참을 수 있어요. 따라 해요, 후우! 하아! 후우…….”

    대사는 완벽했다.

    이게 크루엘로한테 하는 말인지 나한테 하는 말인지 잘 모르겠는 걸 빼고는.

    “……나를 애로 보는 거예요, 개로 보는 거예요?”

    “그런 건 상상할 여지를 남겨 둘게요.”

    어처구니가 없단 듯 헛숨을 내뱉고 크루엘로가 내 손을 치워 냈다.

    진정한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섣불리 그를 놔주지 않고 얼굴을 들이밀어 두 눈을 살폈다.

    그는 당황했는지 주춤 물러났지만, 곧장 따라붙어 가며 확인했다.

    “뭐…… 해요?”

    “좋아요, 또랑또랑하네.”

    통과! 이성을 잃고 사람을 해칠 눈빛은 아니다.

    나는 크루엘로의 팔을 놓아주었고, 그는 내 말 때문인지 제 눈가를 매만졌다.

    그러고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툭, 데구루루.

    옆쪽에서 난 가벼운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테타니오가 얼어 있던 자리였다.

    먼저 바닥을 굴러가는 푸른색 구슬이 보였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 떨어져 있는 건 지푸라기 인형…….

    아.

    나는 천장을 향해 고개를 꺾은 채 내 눈가를 덮었다.

    “더미 진짜 너무 싫어.”

    ……또 속았어.

    또, 기껏 갚아 준 지 하루도 안 되어서 또!

    더미면서 왜 그렇게 열렬히 생존욕을 불태웠는지 무생물에게도 화가 날 지경이다.

    “더미 판별 마법은 없나요?”

    “통상적인 수준의 더미는 그냥 보면 알아요. 다만…… 숙부님의 솜씨가 예상보단 정교하네요. 변명 같지만.”

    “잔재주만 타고나서는!”

    “그래도 문제없어요.”

    그는 허리를 수그려 통신구를 집어 들었다.

    짚 인형과 함께 떨어진 구슬이었다.

    “조금 전까지 연결되어 있었어요. 저택 내부네요.”

    열쇠만 빼고 선배들한테 보내 버려야지.

    어디, 지옥에서 고문 기술은 잘들 익혀 두셨을지 모르겠네.

    ***

    “콜록, 콜록!”

    사내는 수많은 언데드를 거느리고 지하의 비밀 통로를 내달렸다.

    한동안 쓰지 않은 탓에 먼지가 뿌옇게 일고 속이 답답했다.

    불만이 치솟았으나 이런 상황엔 어쩔 수 없었다.

    테타니오 화이트데저트.

    선천적으로 병약하게 태어나 약삭빠른 인사로 자라났다.

    그가 그렇게 자라난 데는 형인 도미니언의 몫이 컸다.

    도미니언은 인정이 없고 의심이 많았는데 테타니오가 후계 자리를 노릴까 봐 언제나 경계했다.

    그 때문에 테타니오는 마나를 익히지 않았고 마법적인 재능도 철저히 숨겼다.

    그늘에 바짝 엎드려 살면서 분노와 열등감이 들끓어도 살아남고자 했으니까.

    환경이 달라진 건, 도미니언의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였다.

    도미니언은 제 아이를 위한 불행의 제물이 되어 사라졌고 테타니오는 자유를 찾았다.

    뒤늦은 재능을 찾아 마법진을 공부하고 시체를 되살리는 연구도 진행했다.

    그렇더라도 그는 숨죽여 살던 평생의 습관을 버리진 못했다.

    그러니 테타니오가 크루엘로와 시오라를 만나러 맨몸으로 응접실에 나설 리는 없는 것이다.

    통신구를 든 더미를 보낸 것은 그저 전력을 파악하기 위해서.

    그러나.

    ‘내 인형들은 전혀 안 통했어.’

    한 번의 주문에 모든 언데드가 무력화됐다.

    그 정도의 격차라면, 설사 온전한 나이젤리아의 시체를 구해 인형으로 만들었어도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성직자 앞에서 언데드가 무력해지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대신관의 신성 주문이라도 몇 번은 버틸 텐데 겨우 한 번에 끝났다고?

    시오라 보네티가 쓴 주문은 생전 처음 보는 종류라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면 현 신전의 신관은 아니라는 건데.’

    고대 교단 중에 그 정도의 성세를 가진 이들이 남았던가?

    생각할수록 골치가 아팠으나 절망한 것은 아니었다.

    애당초 정체가 드러난 이상, 도망쳐 다니는 데는 한계가 있었으니까.

    통신구가 추적당한 그 순간부터 테타니오는 결론을 내렸다.

    ‘크루엘로를 눌러야 해.’

    그리고 그 정체 모를 신관은 죽여야 한다.

    터무니없이 들릴지도 모르겠다.

    도저히 죽을 것 같지 않던 나이젤리아마저 그들에게 패배해 죽었는데 어떻게 그들을 상대하느냐고.

    하나 방법은 있었다.

    ‘분명 휘슬에서 반응을 보였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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