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에이, 다 지나간 얘기 하지 맙시다. 처음 질문에나 대답해 줘요. 대원로랑 에덴, 사이가 안 좋은가요?”
나는 되도록 자연스럽게 화제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그는 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긴 했지만,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아니요, 대원로는 에덴을 끔찍이 여겨요.”
“아, 다 틀렸어.”
“흑마법이나 교리를 배우지 않은 것도 대원로의 뜻이었죠. 그러다 원로들 꼴이 될까 봐 겁이 났는지.”
3번 실패하면 처리당하는, 그 규칙을 말하는 건가?
“대원로의 아들한테도 그렇게 빡빡한가요?”
“애석하게도 교단의 왕은 대원로가 아니었거든요. 2원로는 규칙에 집착하는 편이었으니, 파벌 싸움엔 그런 이유도 한몫했을 거예요.”
“아하.”
“인질 건은 글쎄요. 뭔가 주워들은 에덴이 그걸 막으려고 무리하게 뛰어들었다 붙잡혔을 것 같은데.”
갑자기 크루엘로의 말에서 신빙성이 떨어졌다.
그런 심경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는지 그가 웃었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몇 번 있었는데. 당장 조금 전만 해도 그렇지 않나요?”
“뭐가요.”
“달링한테 어쭙잖은 정보만 내뱉고 사라진 거요. 원래는 더 진지한 말을 하려고 했을 거예요. 그럴 배짱이 없어서 문제지만.”
아.
그게, 그런 거였구나.
크루엘로의 말이 도로 신뢰를 회복했다.
“이렇게 드러난 정황은 놀랍도록 깔끔하지만, 에덴을 믿지는 말아요. 그냥 권유예요.”
“애당초 이름 뒤에 화이트데저트가 붙은 사람을 믿을 생각은 없는데요.”
“그건 좀 서운한데.”
“아, 물론 크루엘로 빼고요. 뭐예요, 어린애도 아니고. 생략된 말은 좀 알아서 추론해요.”
시오라가 된 초기에야 얘가 얼마나 〈운명〉처럼 물들었을지 걱정했지만, 그것도 옛말이다.
같이 열쇠를 세 개나 모아 놓고도 의심할 정도면 아무도 믿지 못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도, 내가 봐 온 크루엘로가 있었으니까.
과연 장난이었는지 그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면박을 주려던 때, 응접실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곧 상대는 두어 번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화이트데저트에는 키 큰 사람밖에 없는지 목을 상당히 꺾어야 그 얼굴이 보였다.
남색 직모에 창백한 낯.
정돈되지 않은 짧은 수염이 지저분할 만도 하련만, 깔끔한 이목구비 때문에 오히려 매력적으로 보였다.
가느다란 눈을 샐쭉 휘고 있는 중년 사내는 내게도 익숙한 크루엘로의 숙부, 테타니오였다.
“세상에, 내 조카. 이게 얼마 만이냐!”
그는 반갑게 웃으며 크루엘로에게 아는 체를 했다.
낯빛만 아니면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게 참 번지르르하다.
테타니오가 정말 원로면, 보네티의 원로회와는 외모적으로 얼마나 차이가 나는 거야.
나는 새삼 휘슬의 감옥에 갇힌 원로들이 안타까워졌다.
인성은 이쪽이 더 지독할 텐데.
“이런, 약혼자와 함께 왔구나. 반가워요, 크루엘로의 숙부인 테타니오라고 합니다.”
그가 호쾌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별로 반갑지는 않았지만 나는 적당히 인사하며 그의 악수를 받았다.
테타니오가 우리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 내게 네 약혼자를 소개해 주러 온 거구나. 맞지?”
“아니요, 숙부님.”
크루엘로는 테타니오와 같은 톤으로 답하며 눈을 휘어 웃었다.
그러더니 곧장 그 쾌활한 분위기에 찬물을 뿌렸다.
“저는 황태자 시해 미수 사건의 범인을 잡으러 왔어요.”
슬슬 봄이 오는 줄 알았는데 아직 겨울인가 보다.
크루엘로의 직언에 테타니오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 범인이 이 저택에 숨어들기라도 했다는 뜻이야?”
“아니요, 숨지도 않고 뻔뻔스럽게 낯을 치켜들고 인사를 건네던걸요.”
“그게 무슨.”
그는 말을 내뱉다 말고 터무니없는 진실을 깨달은 사람처럼 입을 벌렸다.
연기 진짜 잘해.
“설마 너, 나를 의심하는 거냐?”
“그보단 확신이라는 단어가 맞겠네요.”
“크루엘로!”
테타니오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쳤다.
“나는 계속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어! 책이나 읽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런 무서운 일을 벌인단 말이야!”
“혼자 계셨다는 말씀이시네요. 주위에 아무도 없이요.”
“난! 무슨 일이 있었는지라도 말해 다오. 그래야 내가 해명을 하든 뭘 하든 할 수 있을 것 아니야!”
“딱히 그럴 성의는 없어서요.”
그 말이 진심임을 드러내듯 크루엘로가 마나를 끌어모았다.
응접실 내부의 공기가 영하로 떨어진다.
낯빛이 희게 질린 테타니오가 주춤주춤 물러났다.
“이러지 말거라, 나는 네 숙부야. 레, 레이디! 좀 말려 주십시오! 저 아이가 후회할 일을 만들어선 안 되지 않겠습니까!”
앗.
연극의 관람객처럼 동떨어져 상황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무대로 끌려들어 갔다.
딱히 크루엘로에게 할 말은 없는데.
테타니오 화이트데저트가 정말 그 숨은 원로인지는 열쇠를 탐색해 봐야 알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그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어린 크루엘로를 어떻게 대했는지 분명히 알고 있으니까.
더군다나 공작 대리까지 맡을 정도면 원로회와 아예 무관한 인사도 아니겠지.
나는 그저 안됐다는 표정만 지어 주었다.
“안타깝게도 숙부님, 이게 잘못 짚은 거라고 해도 후회할 일은 없을 거예요. 이미 지은 죄가 있으시잖아요.”
“그, 그게 무슨!”
“제 부모님을 해친 게 누구인지 제가 정말 모를 줄 아셨나요?”
크루엘로의 말투가 워낙에 담담한 탓에, 나는 한 박자 늦게 말뜻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전대 공작 부부를 죽인 게 테타니오였어?
그러면서 공작 대리를 맡은 거야?
권력이란.
테타니오 쪽을 쳐다보자 그 또한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조금 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얼굴이 굳어 있었다.
“너…….”
“하기야 그러실 만도 하네요. 저도 처음 들었을 때는 그럴 리 없다며 믿지 않았거든요. 결국 큐딜이 증거까지 들이밀어서 믿게 됐지만.”
크루엘로는 가벼이 미소 지었다.
“제 생일 선물이라더군요. 그날의 대화를 녹음한 영상구가요.”
테타니오도 테타니오지만 큐딜도 참 대단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인성이었으나 그 주체가 큐딜이라는 점에서 신빙성은 충분했다.
같은 생각이었는지, 겁에 질려 있던 테타니오의 얼굴에서 천천히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손으로 입가를 틀어막았으나 곧, 그 안쪽에서부터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큭, 크큭, 풉, 푸하하하!”
우스워 죽겠다는 얼굴로 허리를 꺾었다.
웃고 있기는 들어올 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인데도, 새삼스럽게 그 온도가 아예 달라 보였다.
테타니오가 눈에 맺힌 물기를 닦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은근히 걱정되더니만 큐딜, 그 망할 것이 기어이 재미를 본 모양이구나.”
“이제 부정할 생각은 없으신가 봐요.”
“뭐, 그래. 나도 이깟 연기가 통할 거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혹시나 해서 시도해 봤을 뿐, 당연히 다른 수단을 준비해 왔지.”
그 말과 함께 천장에서 사람들이 쏟아졌다.
아니, 사람이라고 하는 게 맞을지는 모르겠다.
교단의 복장을 한 이들은 이미 죽어 시체가 된 이들이었으니까.
생기가 없어서인지 아레스보다도 기척이 흐렸다.
“참, 말이 나온 김에 인사시켜 주마.”
내가 그들을 관찰하는 동안 테타니오는 개중 두 사람을 앞으로 나오게 했다.
주인의 지시에 그들이 산양 가면을 벗었다.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녀는 퍽 그럴듯한 외관의 소유자였다.
추가로 눈에 띄는 점을 이야기하자면…… 크루엘로와 묘하게 닮아 있었다.
“뭐 하니, 크루엘로. 네 부모님께 인사해야지.”
그 말에, 테타니오가 불러낸 언데드가 누구인지 분명해졌다.
진짜로 단단히 미쳤구나.
절로 얼굴 근육이 굳었다.
반사적으로 크루엘로를 쳐다봤는데 그는 상처 입은 듯 보이지는 않았다.
부모님의 죽음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지, 생각하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가슴께에 차오른 뜨거운 숨을 느리게 뱉어 냈다.
“도굴하신 겁니까?”
“내가? 몸도 안 좋은데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할 리가.”
“그러면.”
“대원로 그 영감탱이가 직접 건네줬지. 원 없이 인형 놀이를 하게 지원해 줄 테니 네가 다 자랄 때까지 공작 대리를 떠맡으라고 하더구나.”
테타니오는 언데드들을 방벽처럼 제 주위에 쌓아 놓고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관절이 자리를 찾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아주 귀찮은 일이지만 거부할 수 없어서 열심히 했다. 그랬는데 기껏 키워 준 꼬맹이가 나를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꼴이라니.”
“…….”
“아주 불쾌한 경험이지만 그래, 어쩔 수 없지. 너는 우리의 주인이 될 몸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테타니오는 품에 손을 넣었다.
잠시 뒤, 그의 손에는 마나가 느껴지는 동그란 패가 들려 있었다.
마도구 같은데.
“내 인형들과 잘 어울려 주렴. 나는 쉬러 가야겠구나.”
“가능할 거라 생각하세요?”
“안 될 거 있겠니, 이 패를 문지르기만 하면 끝날 일인데.”
그렇게 말하며 테타니오는 크루엘로 쪽을 가리켰다.
동시에 새까만 인형들이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난장판을 벌여 놓고 그는 곧장 패를 문질렀다.
그러나 일어난 일이라고는 그 인형들이 죄 얼어붙는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크루엘로가 구태여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패에 손을 올린 채로 테타니오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게이트까지 막고 들어오다니 아주 작정했구나. 마나 소모가 보통이 아닐 텐데.”
“열쇠를 얻기 위해서 그 정도 노력은 해야죠.”
“인형들만 아깝게 됐구나.”
사내가 재차 손짓하자, 이번에는 응접실 문밖에서 언데드들이 몰려들었다.
그 수로 따지면 조금 전 천장에서 떨어진 이들의 세 배는 되었다.
하루 종일 인형만 만들었나.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숙부님.”
“의미야 만들기 나름이지.”
가볍게 말한 테타니오는 크게 손뼉을 쳤다.
모여 있는 인형 전체에서 검은 마나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언데드를 얼렸던 얼음에 쩌억 금이 가더니, 그들은 다시 자유로운 상태를 되찾았다.
수로 따지면 종전의 네 배가 되는 이들에게서 수준급의 마나가 넘실거렸다.
이번에는, 쉽사리 얼어붙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까지는 아니라도 단번에 처리할 수는 없는 수준.
크루엘로가 눈을 가늘게 떴고, 테타니오는 여유롭게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쯤에서 열심히 외고 있던 내 주문이 완성되었다.
“그러면 난 이만─.”
“잠시만요, 이거 가져가세요!”
─6주문. 광휘brillia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