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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94화 (94/162)
  • 94화

    줄리안이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까이 있는 크루엘로, 식물의 잔해물, 멀뚱히 선 나와 팔짱을 끼고 있는 황태자.

    그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개 같은 악몽을…….”

    너도 꿈이라고 생각하는구나.

    줄리안에게도 약간의 동질감이 쌓였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미네르바 소후작.”

    내내, 은근히 소외되던 황태자가 처음으로 주목을 끌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해설 편이 시작되고 만 것이다.

    물론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줄리안은 이번에도 반항하려 했지만, 그의 입을 여는 건 간단했다.

    크루엘로가 인질을 동원했다.

    “자네가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이 건은 황태자 시해죄로 처리되겠지. 그런데 자네를 여기로 보낸 사람이 하필이면…….”

    그는 일부러 말끝을 흐리며 제 검 쪽을 쳐다봤다.

    데이디어 크림슨, 명확한 메시지였다.

    줄리안은 잠시 크루엘로를 죽일 듯이 노려봤으나 곧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편한 건 좋은데 이쯤 되니 어이가 없다.

    우정인지 사랑인지는 모르겠는데 왜 내 영웅전기에서 이 난리를 피우는 거지?

    그 정도로 애틋한 상대가 있으면 처음부터 똑바르게 살아 주면 좋겠다.

    아무튼.

    “……뭘 바라시는 겁니까.”

    “시간 끌 거 없이 간단하게 가자. 몸에 새겨진 그 마법진 말이야, 누구 작품이야?”

    “모릅니다. 만날 때마다 인식 방지 마도구를 둘둘 감고 철저히 신원을 감췄습니다. 스스로는 4원로라고 칭했습니다.”

    제대로 잡았구나.

    머릿속에 종이 울리는 기분이 썩 유쾌했다.

    “교인들에게 물어도 그 존재를 아는 사람조차 드물었습니다만.”

    “신원이 아니라도 좋으니 뭐든 최대한 이야기해 보게.”

    “……처음 접근해 온 건 아카데미 때였습니다.”

    우와, 아카데미…….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 예감에 슬퍼졌다.

    “재능의 벽을 넘게 해 준다고 하더군요. 대신 잡다한 일 몇 가지를 처리해 달라고.”

    “음.”

    “처음에는 간단한 일부터 시작하다가 제가 교단의 정체를 알게 될수록 점점 더 큰일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줄리안은 잠깐 동안 머뭇거리다가 뒷말을 이었다.

    “이 마법진은, 실패에 대한 처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시작은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줄리안이 몸에 마법진을 새긴 건 내가 휘슬에서 돌아왔을 즈음.

    4원로는 실로 오래간만에 줄리안을 불렀다.

    로브에 사제복, 산양 가면과 온몸에 두른 인식 방지 마도구.

    언제나처럼 철저한 차림새였다.

    줄리안은 그가 지시하는 대로 소파에 앉았으나,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서류를 뒤적거릴 뿐 줄리안의 맞은편에 앉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사내가 말을 걸었다.

    “들었어? 아레스가 휘슬에서의 일을 실패했다더라고. 이번이 세 번째인데 안타깝게 됐지.”

    지나가듯 흘린 이야기에 줄리안의 어깨가 굳었다.

    사내는 손에 든 서류를 책상에 내려놓고 느긋하게 소파로 걸어왔다.

    “이제는 2원로님마저 나서시려는 모양이야. 그렇잖아, 아랫사람이 실패하면 윗사람이 수습해야지. 하하, 물론 아랫사람 모가지가 날아갔으니까 어쩔 수 없이 나서는 거지만.”

    그런데 흐음.

    줄리안의 앞에 멈춰 선 이가 대뜸 손을 뻗어 그의 턱을 쥐었다.

    그러고는 흡사 품평이라도 하듯 그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내려다보았다.

    모욕감에 줄리안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우리 줄리안은 참 건강하단 말이야? 네가 실패한 게 몇 번인지 나는 셀 수도 없는데 말이야.”

    “…….”

    “쫄지 마. 뭐. 차기 미네르바 후작씩이나 되는 귀한 몸을 어떻게 하겠어? 어디까지나 우리를 도와주는 입장인데 말이야.”

    가면에 가려 보일 리 없건만, 줄리안은 사내의 입꼬리가 기분 나쁘게 올라가는 걸 본 것만 같았다.

    사내는 툭 내던지듯 그의 얼굴을 놓아주고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도 줄리안은 불편한 기색조차 낼 수 없었다.

    말로는 차기 미네르바 후작이라고 치켜세우지만, 그들에게 미네르바가 얼마나 하찮은지 알았으니까.

    황제마저 화이트데저트의 눈치를 본다고 했을 때, 어렸던 줄리안은 코웃음 쳤다.

    그러나 그건 조금도 과장이 아니었다.

    이 제국 전체가 화이트데저트, 정확히는 그 원로회의 발아래 있었다.

    이제 와 제가 어설프게 반항이라도 하면 자신의 목숨뿐 아니라 미네르바 가문 전체가 위험했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 그 정도의 권력을 가지고도 어찌하여 신하의 자리에 남았는지 줄리안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괴기한 현실에 그의 납득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슨 말을 듣더라도 고개를 수그리고 협조하는 것뿐.

    “시키는 일도 안 빼고 착착 해 줬는데 칼같이 처벌하는 것도 매정하고 말이야.”

    그래, 다 했다.

    원하는 때에 언제나 저를 죽일 수 있도록 마법진을 새기라는 제안에도 거부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되새길수록 굴욕감이 치밀었으나 줄리안은 익숙하게 자기합리화를 했다.

    어차피 이들이 원하는 때라면 언제든 잃을 목숨이니 별반 특별한 일도 아니다.

    이자가 내어 준 베아티투도를 삼키기만 하면, 스스로 그 마법을 지워 낼 수도 있다.

    화가 날지라도, 남들 또한 이렇게 살았다.

    권력자의 앞에 넙죽 엎드려 고개를 조아린 채 살아간다.

    그러니 얻어 낼 게 있는 저는 오히려 나은 처지다, 연거푸 그리 생각하면 정말로 믿을 수 있었다.

    “듣고 있어?”

    “아, 죄송합니다.”

    “아니야, 뭐. 긴장하면 윗사람 말이 안 들릴 때가 있지. 나도 종종 그러거든.”

    사내는 픽 웃고는 줄리안에게 몸소 와인을 따라 주었다.

    잔에 액체가 고이는 소리가 기이하게도 긴장감을 자극했다.

    “하지만 곤란하기는 해. 아무리 네가 말을 잘 들어주더라도 무능력한 실패를 다 넘어가 주기엔 나도 눈치가 좀 보이거든?”

    “…….”

    “알지? 검은 뱀은 친목 모임 같은 게 아니란 말이야. 중책을 줬는데도 제대로 일을 못 하면 책임을 져야지. 그렇다고 내가 데려온 친군데 너무 야박하게 굴 수도 없고, 이것 참.”

    아, 그러면 되겠다.

    4원로는 무언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경쾌하게 말했다.

    “마침 겉보기엔 그럴싸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타격이 없는 처벌이 떠올랐거든?”

    “무엇…… 말씀이신가요.”

    “네가 죽으면 그 몸 좀 빌리자.”

    “예? 그게 무슨…….”

    “몸 말이야, 네 그 재능 넘치는 육신.”

    그 눈.

    그리고 목소리.

    줄리안을 향한 사내의 관심에서 진한 탐욕이 흘러내렸다.

    예상치 못한 말에, 줄리안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쿵, 쿵, 요란한 심장 박동이 상황의 위험성을 알렸다.

    그러나 이미 목이 꿰뚫린 맹수는 도망칠 수 없었다.

    “뭘 어벙하게 군대. 우리가 네크로맨서 단체인 걸 모르던 것도 아니고. 교리는 안 믿더라도 교단의 중책을 맡았다면 죽음을 정복하는 데 어떤 식으로든 기여해야지.”

    네크로맨서.

    죽음을 정복.

    시체.

    단편적인 단어들이 모여 하나의 답을 만들어 냈다.

    그는, 자신에게 죽어서도 노예가 되길 강요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모욕이다.

    다른 데서 들었으면, 아니 적어도 사내에게 길들여지기 전에 들었다면 단번에 그를 공격하더라도 이상치 않았을.

    그러나 수년의 세월을 거쳐 순종적으로 깎여 나간 줄리안은 이번에도.

    “그렇게 할 거지?”

    음험한 그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사내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잔인하게 파고들었다.

    창백하게 낯이 질린 줄리안은 생각했다.

    괜찮아.

    어차피 죽은 다음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당장 죽는 게 아니라면 그런 것쯤은…….

    그런, 것쯤은.

    줄리안의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 났다.

    그의 시점으로 들으니 왠지 줄리안이 불쌍한 피해자처럼 느껴졌지만, 속지 않는다.

    악행에 동조할 때는 반성하지 않다가 제가 위험해지고서야 흔들리는 꼴이란.

    “그러면 네 몸에 새겨졌던 마법진이 시체를 움직이는 마법이란 거야?”

    “네. 미리 새겨 놓는 거라고 들었습니다. 살아 있을 때도 발동할 줄은 몰랐지만.”

    그는 묘한 얼굴로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마나가 싹 사라진 게 기꺼운지 개운해 보였다.

    남 좋은 일을 해 준 나는 좀 언짢아졌지만.

    “검은 뱀에 아직도 정석적인 네크로맨서가 남아 있을지는 몰랐군. 한참 전에 사장된 줄 알았다만.”

    노기 섞인 황태자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바깥에 나와 관련 도서─에이미 때─를 뒤적거리기 전까진 그렇게 알았다.

    시체를 인형 삼아 조종하는 건 여러모로 까다로웠다.

    섬세하게 마법진을 새길만 한 능력자는 드물었고 인형에 주기적으로 마나를 공급하는 것도 일이었다.

    힘겹게 언데드를 만들어 내도 성력에 터무니없이 약했다.

    신전을 포섭할 수도 없는데 소수의 신관들로 쓸어 버릴 수 있는 병력을 고집하는 건 시대에 뒤떨어진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줄리안을 포섭한 원로가 그런 수단을 사용한 건, 악의 시대가 도래하리란 믿음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운명〉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그자에 대한 단서는 더 없어? 4원로라는 거 말고.”

    아무리 줄리안이 자기합리화의 귀재라고 한들 아무 생각 없이 명령만 듣고 다니진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든 상황을 뒤집으려 이런 정보도 알아보고 저런 정보도 캐 보고 그랬겠지.

    당장, 한스와의 대화를 영상구로 녹화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예상대로.

    “좁혀 놓은 후보가 둘 정도 있습니다.”

    그는 제 추측을 천천히 늘어놓기 시작했다.

    ***

    줄리안에게 정보를 다 들은 뒤, 우리는 일단 그를 보내 주었다.

    사슬 조각은 건재했으니 필요하면 또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 줄리안을 하옥해 봐야 4원로한테 힌트를 주는 꼴밖에 안 된다.

    이제 엉망이 된 온실 정원에 남은 사람은 셋.

    황태자는 그나마 온전한 의자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그녀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교단의 본거지를 무너뜨렸던 게 자네인가?”

    “말씀하시는 교단이 ‘검은 뱀’이 맞다면요.”

    “그렇군, 그래서 자네에게 나이젤리아의 후계 혐의를 씌운 거였어.”

    그녀는 헛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생각할수록 이상하긴 했지. 그깟 혼담이 무어 그리 대수라고 그렇게 일을 크게 벌이는지 말이야. 그저 원로회 내부의 파벌 싸움인 줄 알았다만 자네의 입지를 줄이려던 거였군.”

    “단번에 현 신전까지 적으로 돌릴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제가 황태자전하 앞에서 성력을 썼다고 뭐가 잘못되지는 않겠지요?”

    “당연한 일을. 솔직히 말하면…….”

    황태자는 말을 한 번 끊으며 품에서 엽궐련을 꺼냈다.

    피워도 괜찮겠냐는 듯 눈짓하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크루엘로가 고개를 저었다.

    “냄새납니다, 전하.”

    “……자네도 피우는 걸로 아는데.”

    “크루엘로, 궐련 피워요?”

    “아니요, 전하께서 잘못 아셨나 보네요.”

    마지못해 그녀가 궐련을 집어넣었다.

    “솔직히 말하면, 미네르바 소후작을 보면서 나 또한 할 말이 없었네. 원로회에게 목줄이 매여 그들의 뜻대로 해 온 건 이 황실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음.”

    “하나 이제는 그것도 끝낼 때가 된 것 같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자네가 날 도와주길 바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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