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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93화 (93/162)

93화

그리고 데이디어 또한 다가오는 기척들을 알아챈 듯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줄리안을 견제하는 채로 빠르게 내뱉었다.

“협상이 잘됐다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데리고 도망치는 데는 추가 요금 들어요.”

“돈, 정보, 인력. 원하시는 게 뭐든 협조하겠습니다.”

“그러면 특별히 돈과 정보, 인력만 받고 들어드릴게요.”

고를 시간도 없는데 뭘 선택지를 주고 그런담.

다 주면 그만인데.

데이디어는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으나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줄리안과 함께 가 주십시오.”

그녀는 검을 밀어 치며 줄리안과의 거리를 벌렸다.

그러고는 품에 손을 넣었고, 마도구로 보이는 무언가를 줄리안에게 내던졌다.

물건은 삽시간에 청년의 모습을 집어삼켰다.

여기까지가 1초.

곧바로 반응한 크루엘로가 나를 끌어안은 채 줄리안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의 마나가 이동 마법을 강제로 확장해 우리를 줄리안과 같은 곳으로 이끌리도록 묶었다.

여기까지가 2초.

데이디어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뒤집어졌다.

“이게 무슨 소란─.”

반 토막 난 크림슨 공작의 목소리가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뒷수습은 데이디어가 알아서 하겠지.

그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우욱!”

진짜로 토할 것 같아!

나는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게이트보다 하위 차원의 마법이라 그런지 속이 울렁거렸다.

그러나 한가롭게 구토나 할 상황은 아니라 나는 입가를 꽉 누르고 주변을 살폈다.

넓게 트인 공간에 큼지막한 통창으로 노을빛이 흘러든다.

각양각색의 식물이 모양새 좋게 자란 걸 보면 유리 온실인 듯했다.

그리고 내 앞으로 세 걸음쯤 거리에 사람 하나가 서 있었다.

짧은 백금빛 머리칼, 볼 때마다 점점 눈 밑의 그늘이 짙어지는 듯한 여자는.

“전하……?”

놀랍게도 황태자였다.

뭐지. 꿈인가?

데이디어가 우리를 어디로 보낸 거지?

설마 저번에 줄리안을 보낸 곳도 여기였어? 이 나라엔 미친 인간밖에 없는 건가.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차에 황태자도 입을 열었다.

“꿈인가?”

약간의 친근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자네들이 왜 여기에?”

“음, 그게요…….”

“설마 내 궁의 온실 정원으로 데이트를 하러 온 건 아닐 테고.”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눈동자만 굴리는데, 타이밍 좋게도 줄리안이 정신을 차렸다.

자줏빛 넝쿨이 매섭게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 또한 이동 마법의 여파에 시달렸는지 엉뚱하게 바닥이나 때리고 헤집었다.

황태자가 혼란스럽게 중얼거렸다.

“크루엘로에 시오라 보네티, 그리고 줄리안 미네르바?”

나도 대단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생각한다.

고개를 끄덕이는 때, 이번에는 제대로 된 공격이 날아들었다.

황태자의 머리로 날아드는 가시 달린 줄기.

하나 공격은 그녀의 머리털 하나 해하지 못했다.

쩌저정, 넝쿨과 줄리안이 통째로 얼어붙었다.

역시 크림슨 공작저에서는 상태를 살필 겸 봐준 거였군.

인상을 찡그린 황태자를 향해, 크루엘로가 뻔뻔스럽게 내뱉었다.

“제가 또 전하의 목숨을 구했군요.”

“……자넨 내가 바보로 보이는가?”

바보였으면 좋았을 텐데.

“여기엔 어떻게 들어온 거지? 이쪽의 좌표를 아는 건 비밀 조사관들뿐인데. 자네도 내 쪽에 사람을 심어 두었나?”

“아닙니다, 그럴 가치도 없어서요. 여기에 온 건─.”

“우연이죠, 우연!”

뭐 하는 거야, 진짜!

범인이 데이디어라고 고발하면 우리만 손해다.

기껏 합법적인 노예가 생겼는데 감옥에 들여보내서 뭘 어쩌려고.

“제 달링이 그렇다네요.”

황태자가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말을 돌리면 좋을까 고민하던 때, 이번에도 줄리안이 나를 도와줬다.

줄리안 쪽에서 이상한 흐름이 느껴졌다.

피부를 물들이던 연보랏빛 색채가 순식간에 검은 마법진 쪽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러며 줄리안의 살갗은 원래 색으로 돌아왔으나 기운은 더 지독해졌다.

얼음 조각의 표면이 갈라지더니 쨍그랑, 조각났고 줄리안의 눈빛은 한층 더 맛이 갔다.

그리고 그쯤에서 나는 새삼, 여기가 온실 정원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줄리안의 몸에서 폭발적으로 치솟은 검은 마나가 정원의 식물들에게로 흡수되었다.

커다란 한 방을 준비하듯 식물 줄기들이 꿈틀거리며 쑥쑥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 위압적인 기세에 황태자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혹시, 자네 나를 암살하기 위해 미네르바 소후작의 정신을 현혹해 이리로 불러들인 건가?”

“글쎄요.”

“저희도 여기에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닌─.”

나는 말하다 말고 줄리안이 입술을 달싹이는 걸 발견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듯했다.

뭐라고 말하는 거지?

“하기야 자네의 마법이라면 게이트가 열렸겠지. 그러면 비밀 조사관의 마도구를 하나 빼앗은 건가? 대체 누구의─.”

“잠깐! 잠깐만 조용히 해 주세요.”

“……조용? 설마 나한테 한 말인가?”

“아니, 불경한 거 아는데 진짜 잠깐만!”

황태자가 기막혀하는 것 같았지만, 황제 앞에서도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한 마당에 이인자쯤은 알 바 아니었다.

어쨌거나 집중할 여유가 생겼다.

나는 줄리안의 입 모양을 겨우겨우 읽어 낼 수 있었다.

“주인, 님께서 부르신다?”

어.

나는 눈을 한 번 깜박였다.

“줄리안한테 그런 성향이 있는 게 아니라면, 저거 숨은 원로 이야기겠지요?”

“그럴걸요.”

“부른다고 했으니까 내버려 두면 안내해 주려나?”

“그전에 죽을 것 같네요.”

그건 그렇다.

슬슬 저 검은 마나가 줄리안의 생명력까지 빼 쓰는 것 같았으니까.

무기력한 주변 인물 역을 수행 중이던 황태자의 눈빛이 갑자기 또렷해졌다.

“그 말은, 죽지만 않으면 미네르바 소후작이 화이트데저트의 어떤 원로에게로 향할 거란 말인가?”

“앗, 듣고 계셨군요.”

“짐작하시지 않습니까. 저렇게 대놓고 흑마법의 기운을 풍기는데.”

“그렇군. 검은 뱀과 원로회를 연결한 증거가 제 발로 찾아왔다는 말이지. 무려 후작가의 후계를 조종할 정도면 어설프게 발뺌하지는 못할 테고.”

이쪽도 다른 의미로 눈이 돌아 버린 것 같은데.

“제멋대로 내 정원에 들어온 건 용인해 주겠네. 일단은 줄리안 미네르바를 제압하고 다시 이야기하지.”

앗. 딱히 용서받아야겠다는 생각도 없었지만!

어쨌거나 일이 알아서 풀렸다.

성장기가 끝났는지 바닷속의 해초처럼 꿈틀거리던 온실의 식물들이 한데 뭉치기 시작했다.

교단의 비밀 통로에서 나를 쫓아오던 동그란 괴생물체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렇게 귀여운 사이즈는 아니었다.

템페스타스에서 본 바람 거인의 절반 정도?

그 생김새는.

“크어어어어!”

“뭐 해요, 달링?”

“그냥 이렇게 울부짖을 것 같아서요.”

정말 딱 그렇게 생겼다.

어쨌거나 식물이 엮여 만들어진 거인이라는 게 꽤 볼만하기는 했다.

숙주처럼 우뚝 서 있는 줄리안은 좀 보기 그랬지만.

크루엘로가 냉기 마법을 캐스팅하며 물었다.

“온실 정원 하나쯤은 새로 만드셔도 괜찮겠지요, 전하.”

“황후폐하께서 하사하신 정원이다.”

“그러면 겨울 테마로 재정비하시는 건 어떠세요?”

“똑같은 말이잖나.”

“어차피 식물들이 다 뿌리 뽑혔는데 의미 있어요?”

“최소한 티가 나지는 않도록 부탁하네. 폐하께서는 내가 뱀 사냥에 나서는 걸 달가워하지 않으시니.”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게 해 달라는 뜻이로군.

그렇다면 내가 적격이긴 한데 보여 줘도 될지 모르겠네.

기어이 줄리안의 손짓을 따라 거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십 줄기의 넝쿨이 날아든다.

나는 크루엘로에게 재빠르게 물었다.

“황태자전하 믿어도 되나요?”

“교단 문제에 한해서는요.”

“……당사자를 앞에 두고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자네들.”

데이디어가 숨겨 준 보람도 없네.

하기야 원로회 인간들도 이제는 다 알 텐데 숨겨서 무엇 할까.

나는 메스꺼움이 가셨을 때부터 준비해 뒀던 주문을 쏟아 냈다.

─6주문. 광휘brilliance.

물리력 없이 검은 마나만을 공격하는 빛이 사방에 터져 나갔다.

코앞까지 들이닥쳤던 줄기들이 힘을 잃고 늘어지고 식물 거인이 허우적거렸다.

단단하게 뭉쳐 있던 줄기가 느슨하게 풀리며 팔다리와 몸통이 죄 무너져 갔다.

거인에 매달려 있던 줄리안 역시 빛에 피습한 건 마찬가지였다.

정확히는 그에게 걸린 저주라고 해야겠다.

피부에 그려진 검은 마나가 물에 씻긴 듯이 지워져 갔다.

기세에 비해 허무하리만치 연약했으나 당연했다.

시각적으로 충격을 줘 봐야 끄나풀의 끄나풀, 하수인의 하수인이다.

마법 좀 씌워 놨다고 두 배, 세 배로 파워업?

현실은 그렇게 쉽지가 않아요!

별개로 다른 문제 때문에 내 입맛은 썼다.

주문 쓰는 속도가 영 회복이 안 되네.

열쇠가 두 개나 남았는데 계속 이 모양이면 곤란한데 또 베아티투도라도 구해야 하나.

“아…….”

세척 서비스를 다 받은 줄리안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의 주위로는 식물 줄기가 너덜너덜하게 흩어져 있었다.

전직 하녀의 입장으로는, 저걸 치우게 될 사람이 불쌍했다.

“잠깐, 방금 자네, 성력을 쓴 건가? 하지만 그런 주문은…….”

황태자가 혼란스럽게 중얼거렸으나 아직 그녀에게 할당할 여유는 없었다.

엎어진 줄리안이 울컥, 울컥, 무언가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체내에 남은 검은 마나의 흔적이 덩어리져 떨어졌다.

그리고 그 끝에 나온 건 구슬처럼 동그란 무언가였다.

“응……?”

어린아이의 주먹만 한 사이즈.

보고 있으니 정 가운데에 실선이 생기고 틈이 갈라졌다.

그러고는 마치 눈꺼풀이 열리는 것처럼 그 사이가 움찔움찔 벌어지기 시작했다.

왠지 모를 예감에 나는 곧장 말했다.

“밟아요, 크루엘로.”

“네.”

찍.

흡사 쥐 같은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뭔지 모를 물체는 영원히 사라졌다.

“방금 그거 뭐였어요?”

“마법진을 새긴 사람이 심어 둔 무언가? 눈을 뜨려는 것 같던데, 원격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패밀리어일지도 모르죠.”

“내가 우리의 정보를 지켰어요.”

“멋져요, 스윗하트. 어차피 줄리안을 공격할 사람은 뻔하겠지만요.”

“윽…….”

검은 마나를 다 토해 낸 줄리안이 머리를 짚으며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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