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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의 마리오네트-87화 (87/162)
  • 87화

    크루엘로는 내 옆쪽의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는 가보트에게 턱짓했다.

    가보트 또한 마지못해 그 맞은편에 앉았다.

    애피타이저는 살얼음판이군.

    나는 기계적으로 스푼을 떠 올렸다.

    막 입에 넣으려는 때, 크루엘로가 말문을 열었다.

    “누이가 살아 있다는 게 이제는 믿기나? 대문 앞에서는 내가 살해한 게 아니냐고, 진실을 밝히고 말겠노라 선언하더니만.”

    “푸흡?”

    먹으라며!

    도저히 음식물을 삼킬 만한 서론이 아니다.

    크루엘로가 자연스럽게 손수건을 건네주어서, 그걸로 입을 닦았다.

    창피했는지 가보트의 얼굴이 또 빨개졌다.

    진짜로 말했나 보네.

    “제, 제가 근거 없는 소리를 했습니까? 일주일간 만나게 해 주질 않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한 거 아닙니까?”

    “……일주일?”

    “3주일 같은 일주일이었죠.”

    “와, 그거 속인 거였어요?”

    그래, 어쩐지 3주라기엔 몸 상태가 지나치게 괜찮다 싶었어!

    어처구니가 없어 크루엘로를 돌아봤으나, 그는 뻔뻔스럽게도 재차 수프를 가리킬 뿐이었다.

    좋아, 일단 먹겠어.

    절대로 크루엘로의 분위기가 다 풀어지지 않은 것 같아 눈치를 보는 건 아니다.

    ……서러워서 진짜.

    별개로 수프는 꽤 맛있었다.

    역시 화이트데저트라 그런가, 보네티의 셰프보다 솜씨가 좋다.

    신전으로 돌아가면 맛있는 음식이 그리워서 어떻게 산담.

    “그냥 의식이 없던 거라면, 그렇게 말해 주시면 됐잖습니까.”

    “신관들에게는 말했네만.”

    “시오라의 가족은 보네티입니다.”

    “가족? 혼담을 떠넘기려고 입양한 혈족도 그리 부르던가?”

    “그건!”

    “생각보다 사이가 돈독해 보이니 가족이라고 칭한들 인정 못 할 일은 아니겠지만.”

    “전하의 인정이 필요한 일은 아닙니다.”

    “그래, 가족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나보다 레이디 시오라에 대해 아는 것도 많겠군?”

    “그야 당연히!”

    “그러면 기억 상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줄 수 있나.”

    여상하게 나온 말에 덜컥, 심장이 흔들렸다.

    나는 삐거덕거리며 고개를 돌려 크루엘로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는 곱게 눈을 휘어 웃고 있었다.

    “계속 먹어요, 수프 다 비우기 전까진 다른 거 못 먹게 할 거예요.”

    “아니, 조금 서럽지만 그런 건 괜찮은데 제가─.”

    “혹시 먹여 주길 바라서 어리광 부리는 건가요?”

    되지도 않는 헛소리에 나는 잠자코 다시 스푼을 놀렸다.

    어쩌면 이 수프, 내 입을 틀어막으려고 가져온 건지도 몰라.

    의심이 들지만 모르겠다, 진짜 될 대로 되라지.

    그러며 슬쩍 가보트를 살폈는데, 그는 그야말로 돌처럼 굳어 있었다. 바보.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 그렇다고 죽다 살아난 약혼자한테 캐물을 수도 없고. 이런 건 역시 그 가문 쪽에 묻는 게 정석이 아닌가?”

    “책임을 물으신다면 알겠습니다. 파혼하시죠.”

    “자네에게 그럴 권한이 있나?”

    “보네티 백작에게 전권을 위임받고 왔습니다.”

    “흐음.”

    몰라,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참전 안 할 거야.

    이제는 그릇에 눈길도 고정한 채 열심히 스푼이나 움직였다.

    적어도 배 속은 따뜻해졌다.

    이 상황에 체할 기미조차 없다니, 메뉴 선정이 참으로 탁월했다.

    “백작도 제법 비이성적으로 변했군.”

    “번거로우실 일 없이 빠르게 처리하겠습니다. 파담이 아홉 번이든, 열 번이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오해한 모양이야, 나는 내 사랑에 대해 궁금했을 뿐 파혼을 바란 적은 없다네.”

    “당사자를 옆에 앉혀 두고 추궁하는 게 그럼 다른 뜻으로 보이겠습니까?”

    상황을 더 극적으로 몰아가고 싶은지, 가보트가 벌떡 일어났다.

    “그래요, 인정합니다. 시오라 측의 결격 사유를 제대로 알아보고 통지하지 않은 건 보네티의 책임입니다. 그러니 책임진다지 않습니까.”

    “앉아.”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어차피 혼담은 가문 간의 결합이니 이쪽에서도─!”

    “자네 누이가 불편해하잖아.”

    내 이름만 언급되지 않아도 훨씬 덜 불편하겠는데요.

    나는 잠깐 멈칫했다가 다시 수프를 열심히 먹었다.

    가보트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마음에 안 든다니 미안하게 됐네만, 별로 따지려던 건 아니야.”

    “허.”

    “그냥 궁금했거든. 과연 속은 게 어느 쪽일지.”

    그렇게 말하며 크루엘로는 설핏 웃었으나 분위기는 더 가라앉았다.

    이거 지금, 보네티 남매를 속인 건지 자기를 속인 건지 돌려서 묻는 건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와중에 수프도 다 먹어 버려서 입을 다물고 있을 핑곗거리도 사라졌다.

    일단 나는 태연한 척 스푼을 내려놓았다.

    “대화 중에 미안한데 갑자기 졸려서요. 자도 괜찮죠?”

    “자네는 이만 가 보는 게 좋겠어.”

    “……시오라를 데려갈 겁니다. 의식도 되찾았는데 굳이 여기 있을 이유가 없잖습니까.”

    “아직 몸도 회복되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업고 갈 텐가? 그 체력으로?”

    “그, 그건, 사람들을 데려오면!”

    “이런 상황에 많은 사람이 들락거리는 게 퍽도 즐겁겠어.”

    크루엘로는 우아하게 가보트를 비웃었다.

    이상한 표현이지만, 정말로 그랬다.

    가보트가 도움을 청하듯 나를 바라봤으나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나이젤리아까지 죽었으니 교단에서도 독이 바짝 올랐을 것이다.

    당분간은 이쪽 그늘에서 동태를 살피는 게 우선이니까, 음.

    “시오라, 너…….”

    “조만간 정식적인 방문을 허락하겠네.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해야겠군.”

    “허락하듯 말하지 마십시오. 시오라는 아직 보네티입니다.”

    가보트가 문으로 걸어가려 하자 크루엘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어디 가나?”

    “예?”

    “들어온 문으로 나가야지.”

    크루엘로는 가만히 창문을 가리켰다.

    그런 상황이 즐거운지 그의 눈은 나긋하게 휘어 있었다.

    “그러면 잘 가게.”

    미친놈.

    나는 간만에 입 안에서 그 단어를 중얼거렸다.

    혹시 가보트가 떨어져 죽진 않을까 말리려 했지만, 그는 외려 오기를 부렸다.

    본인이 그러길 바란다면야 존중해야지.

    “가보트!”

    “됐어, 이미 하겠다고 말했─.”

    “유언 남기고 가!”

    “너……. 알았으니까 이리로 와 봐.”

    엥?

    놀리려고 한 말인데 반응이 시원찮다.

    혹시 나를 붙잡고 뛰어내리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머뭇거리면서도 가보트에게 다가갔다.

    아쉬운 듯 가보트의 옷깃 사이에 들어가 있던 볍씨는 신이 났는지 날개를 펼쳤다.

    그러자 주위의 소리가 차단됐고 가보트가 내 귀에 속살거렸다.

    “원래도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저 자식 눈깔이 완전히 돌아 버렸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조심해라. 또 시간을 질질 끌면 피아니시모 보낼 테니까 할 말 있으면 그편에 전하고.”

    “으응, 뭐.”

    “그리고 파혼해도 된다는 거 진짜야. 내 독단적인 판단이 아니라, 미뉴엣도 동의했어.”

    미뉴엣이?

    아까부터 안 믿기는 소리만 듣고 있는데 혹시 그 애도 바꿔치기 된 게 아닐까?

    나중에 확인해 봐야겠다.

    결심하면서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가보트는 비장한 얼굴을 하고 커튼에 매달렸다.

    다행히 단말마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네 발로 땅에 엎어져 헉헉거리는 가보트의 모습을 흐뭇하게 내려다보며 엄지를 들었다.

    내 동생, 할 땐 하는구나.

    그때 내 어깨에 손이 올라왔다.

    “이제 쉬어야죠.”

    “……넵.”

    목소리가 부드러워서 섬뜩하기는 처음이야.

    나는 허겁지겁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일단 들어오긴 했는데 이렇게 현실을 외면하고 잠에 들어도 되는 걸까.

    “뭐 해요, 자고 싶다며.”

    “아, 아니, 양치 안 한 게 신경 쓰여서요.”

    적당히 둘러댄 핑계에 크루엘로가 손끝을 움직였다.

    설마 하는 사이 허공에 맺힌 물방울 하나가 입 안을 훑고 지나갔다.

    마법 뭔데.

    이쯤 되면 그 편의성에 감탄하기보다는 의문이 인다.

    어떤 할 일 없는 인사가 양치 마법 같은 걸 개발한 거야?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순순히 눈을 감았다.

    자는 척이라도 해야 혼자 생각할 시간이 날 것 같아서.

    그런데 빤한 시선이 너무도 선명히 느껴진다.

    “저기, 안 가세요?”

    “여기 있으려고요.”

    “시선이 느껴져서 부담스러운데요.”

    “여태까지는 잘만 자던걸.”

    “그건 의식이 없었으니까…….”

    “대원로가 바짝 독이 올랐는데 조심해야죠. 이제는 나이젤리아를 방패로 쓸 수도 없잖아요.”

    나도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크루엘로의 입으로 들으니 왠지 분하다.

    “신관을 자주 들인 것도 반쯤은 그것 때문이었어요. 보는 눈이 많으면 일을 벌이기도 어려울 테니까. 상의도 없이 저지른 점은 사과할게요.”

    “음, 그거야 뭐, 제가 계속 자고 있었으니까요.”

    “저번에도 자고 있었잖아요.”

    나이젤리아에게 제안했을 때?

    그건 그렇지.

    “달링은 상의도 없이 기억 상실 이야기를 숨겼지만요.”

    “……네?”

    “농담이에요.”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은 채라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크루엘로와 눈이 마주쳤다.

    “기억 상실이란 거, 거짓말이에요.”

    “음.”

    “아니, 다 말할 수는 없잖아요. 페불라의 신도니, 어쩌니, 숨겨야 할 이야기가 많은걸요.”

    “그리고요?”

    “또 있어요?”

    “달링이 내게 말해 주지 않은 게 참 많잖아요. 어떻게 페불라를 섬기게 되었는지, 왜 모리온을 잡으려고 안달이 났는지.”

    “아.”

    “말해 주지 않을 걸 알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은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조금……. 화풀이였어요.”

    크루엘로는 머쓱한 듯 어깨를 으쓱였다.

    “믿어도 되죠? 아직은.”

    “……네, 아직은.”

    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었다.

    그러더니 대뜸 내 눈 위로 손을 덮어 버렸다.

    “이제 자요.”

    “졸리다는 거 거짓말이었는데.”

    “알아요. 그런데 지금은 진짜 졸리잖아, 눈이 가물가물한데.”

    “……이럴 시간에 뭐라도 정리하고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요?”

    “하루 더 잔다고 아무 일 없어요. 2주는 시간을 벌었잖아요.”

    “참 나. 자기가 3주라고 거짓말한 걸 이렇게 써먹네.”

    어이가 없었으나 확실히, 시간이 더 생긴 것 같은 착각은 일었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으니 졸려진 것도 사실이라 나는 저항 없이 눈을 감았다.

    의식이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좋은 꿈 꿔요.”

    그 말대로, 이번엔 나쁜 꿈을 꾸지는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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